
40년 만에 광주와 전남이 재결합했다. 광역자치단체 간 통합의 첫 사례이자, 이재명 정부 ‘5극3특’ 전략의 첫 번째 결실이다. 그 역사적 무게감이 엄청나다. 이 무게를 받치기 위해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설치 특별법’이 지난 3월 제정됐다.
408개의 조문, 재정·산업활성화·도시개발·농림수산 등에 관한 수많은 지원과 특례 조항, 그리고 장관급 시장과 4명의 차관급 부시장. 특별법이 부여한 특별시의 외형은 단연 ‘특별’하다. 문제는 내용이다.
중앙정부 지원과 특례 조항 대부분이 재량적 조항이다.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안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이는 곧 통합특별시가 무엇을 하려 할 때마다 중앙부처에 가서 협의(현실은 사정) 해야 한다는 뜻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 통합특별시 성공의 최대 관건은 첨단산업 육성이다. 인공지능·반도체·에너지·미래 모빌리티 등의 산업을 육성하고 기업 유치를 위해서는 입지 지정, 자금 지원, 세제 감면, 전력 인프라, 환경영향평가, 인허가 패스트트랙이 동시에 작동해야 한다. 그런데 특별법의 산업활성화 관련 조항을 보면, ‘지원을 할 수 있다’ 또는 ‘협의하여야 한다’는 표현이 줄지어 있다.
예를 들어, 국가 산업단지 입지 지정과 개발계획 변경은 여전히 국토부장관 권한이다. 첨단산업 특화단지 지정은 산업부장관 협의를 전제로 한다. 입주기업 세금 감면과 보조금은 재경부·예산처 장관 협의, 재생에너지 육성을 위한 전력계통 정책도 산업부 권한 그대로다.
환경 특례도 마찬가지다. 산업활성화 기본계획 수립, 투자진흥지구 지정, 농촌활력특구 지정, 글로벌 콘텐츠 관광단지 개발 등 주요 시책도 기후부장관과 환경영향평가 협의를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
도시개발에 관한 특례 역시 도시계획법 적용 사항 일부를 특별시 조례로 정하도록 위임하고 있으나 국토부장관의 사전 동의가 필요하다. 결국 통합시는 ‘결정 주체’가 아니라 중앙에 ‘협조 요청 주체’에 머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대부분의 결정권은 여전히 중앙에 있다. 광주와 무안과 여수의 운명을 좌우할 결정이 세종청사 어느 사무관의 책상 위에서 멈출 수 있다는 의미다. 권한 이양 조항 옆에는 어김없이 ‘관계 중앙행정기관의 장과 협의하여’라는 단서가 따라붙는다. 특례를 주면서 동시에 빗장을 거는 구조다. 형식은 특별시지만 실질은 중앙 승인형 자치구조다. 권한을 이양하는 듯 하면서 통제 장치는 그대로 둔 것이다.
가장 우려스러운 부분은 재정지원이다. 법 54조는 ‘국가는 통합특별시의 성공적인 정착·운영을 위하여 필요한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할 수 있다’는 재량적 일반 조항만 두고 있다. 개별 특례조항에 재정적 지원을 언급하고 있는 것 역시 전부 ‘할 수 있다’이다. 정부가 약속한 20조 원 근거 조항은 물론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구조가 그대로 굳어지면 통합특별시의 분권과 자치는 요원해진다. 선도적 성장 모델도 불가능하다. 권한을 행사하는 자치 지방정부가 아니라 시책별로 중앙부처에 승인 도장을 받으러 다니는 집행기관이 되는 것이다.
시장이 장관급이든, 차관급 부시장이 4명이든 다섯 명이든, 승인권이 세종에 있다면 그 직급은 권한의 무게가 아니라 의전의 무게일 뿐이다.
320만 시민들은 묻고 있다. “특별법의 ‘특별함’은 어디에 있는가.” ‘할 수 있다’는 곧 ‘안 해도 된다’의 다른 말이다. ‘협의해야 한다’는 곧 ‘거부당할 수 있다’의 다른 말이다. 특별시가 진정 ‘특별’해지려면 중앙정부의 그림자가 걷혀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특별시는 ‘특별’하지 않다. 7월1일 출범하는 통합특별시가 받아야 할 것은 새 간판이 아니라 특별한 결정권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보완 입법을 서둘러야 한다. 각종 지원과 특례는 의무규정으로 바꾸어야 한다. 20조 원의 법제화도 필요하다. 산업·환경·도시계획 특례는 사전 통제에서 사후 평가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
물론 시간이 많이 걸리고 쉽지 않은 일이다. 이미 법 제정 단계에서 지방세·교부세 확충, 예타 면제, 환경평가, 여러 핵심 인허가권 등은 중앙부처 반대로 무산됐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다. 통합시 총체적 역량을 결집해 입법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현행법에 따라 특별시 업무는 시작돼야 한다. 법이 개정될 때까지 아무것도 안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앙부처, 국회 등 관련 기관과의 소통과 협의 역량 강화가 절대적이다. 특별시 조직과 인력을 ‘일’ 중심으로 구성해야 하는 것 또한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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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국경 건넌 진혼, 1회 비엔날레의 ‘경계’를 넘다
중외공원 야외공연장에서 열린 와라비좌의 제1회 광주비엔날레 기념 특별공연1995년 9월 20일, ‘경계를 넘어’를 주제로 제1회 광주비엔날레가 막을 올렸다. 광주가 세계의 미술과 본격적으로 만나는 거대한 사건이었다. 세계 각국의 작가와 작품들이 광주에 모였고, 전시뿐 아니라 각종 공연과 문화 행사가 함께 마련되었다. 광주비엔날레 창설 소식은 새해 벽두 바다를 건너가 재일한국인 미술 애호가 하정웅의 심장을 뛰게 했다. 꼭 하고 싶은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을 가로지르는 문화의 다리를 만드는 일”이었다.하정웅은 ‘두 조국’을 잇는 가교를 만들 단짝으로 일본의 민족가무단 와라비좌(わらび座)를 택했다. 와라비좌는 아키타현 다자와 호수 인근에 예술촌을 두고 일본 각지의 민속예능을 현대적인 무대예술로 재구성해 온 공연단체다. 다자와 호수가 하정웅의 어린 시절이 깃든 장소라는 사실만으로도 하정웅과 와라비좌의 접점은 깊다. 그러나 그 접점은 장소적 친밀성 이상으로 각별하다. 그 인연은 다자와 호수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다자와 호수에는 ‘히메관음(ひめ觀音)’이라 불리는 관음상이 있다. 오랫동안 이 관음상은 수질 악화로 사라져간 물고기와 호수 수호신의 혼을 달래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하정웅은 석연찮은 이 건립 배경 뒤에 은폐된 또 하나의 기억을 밝혀냈다. 발전소와 다자와 호수를 잇는 도수로 공사에서 많은 조선인 노동자가 희생되었으며, 히메관음상은 이들을 추모하려는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후 그는 인근 사찰에 조선인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를 세우고, 매년 가을 지역 주민들과 함께 추모행사를 이어오고 있다.와라비좌는 해마다 열리는 ‘조선인 무주고혼(無主孤魂) 추모 위령제’에 함께했다. 1993년 8월에는 아시아 국제무용 페스티벌에 초청된 한국의 무용가와 함께 진혼무를 선보였다. 한국의 현대무용가 이정희는 한국에서 가져온 흙을 뿌리고 살풀이춤을, 와라비좌의 아다치 마리(安達眞理)는 반주에 맞춰 진혼무를 추며 희생자의 혼을 달랬다. ‘한국에서 가져온 흙’은 상징적이었다. 일본 땅에서 죽은 조선인들의 혼 앞에 고향의 흙을 놓고, 그 위에서 한국과 일본의 예술가들이 춤을 추었다. 그것은 단순한 친선행사만은 아니었다. 잊힌 죽음을 함께 기억하고 예술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만들려는 공동의 진혼이었다.망월동 5·18묘역 을 방문한 하정웅과 와라비좌 극단 단원들.2년 뒤 광주비엔날레 창설 소식을 들은 하정웅은 와라비좌를 한국에 소개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서는 일본 대중문화가 공식적으로 개방되기 전이었고, 일본 문화에 대한 사회적 경계심도 여전히 강했다. 광주비엔날레 측도 처음에는 초청에 난색을 보였다고 하정웅은 회고한다. 그는 오히려 ‘경계를 넘어’라는 주제를 설득의 근거로 삼아 초청을 거듭 요청했다. 국경과 역사적 갈등을 넘어 서로의 문화가 만나는 일이야말로 비엔날레의 주제를 실천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하정웅이 보관해온 당시의 문서들은 이 과정이 말 몇 마디로 정리되지 않는 엄청난 에너지의 결과임을 보여준다. 참가 검토 문서와 협약서에는 그의 제안이 협의와 설득을 거쳐 공식적인 국제교류 사업으로 구체화되는 과정이 담겨있다. 결국 와라비좌 광주 공연이 성사되었고, 하정웅은 광주비엔날레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이자 와라비좌 기념공연단 명예단장으로 양측을 연결했다.1995년 9월 28일 열린 와라비좌의 기념공연은 ‘조류를 타고(潮の流れにのって)’라는 주제 아래 일본 각지의 춤과 북, 민속예능을 새롭게 구성한 것이었다. 특히 ‘바다의 통곡’은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을 추모하는 진혼의 무대였다. 한국과 일본을 갈라놓으면서 동시에 이어온 바다는 이 공연에서 죽음과 애도의 기억을 실어 나르는 통로가 되었다.와라비좌의 광주 방문은 공연장에서 끝나지 않았다. ‘월간 와라비’에 실린 광주비엔날레 방문기(하정웅)에는 공연단이 하정웅과 함께 ‘95광주통일미술제가 열린 망월동 오월묘역을 찾아 5·18 희생자들을 참배한 기록이 남아 있다. 공연 후 와라비좌가 하정웅에게 보낸 팩스에는 더욱 직접적인 증거가 있다. “망월동에서 불렀던 노래의 가사”를 보낸다는 문구와 함께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를 일본어로 번역(부분 개사)한 노랫말이 적혀 있다.1995년 광주를 1993년 다자와 호수와 나란히 놓으면 두 장소 사이에 흥미로운 교차가 나타난다. 다자와 호수에서는 한국의 예술가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억울하게 죽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혼을 일본 예술가들과 함께 위로했다. 2년 뒤에는 일본의 예술가들이 광주로 건너와 중외공원 야외무대에서 진혼의 춤사위를 추고, 5·18 희생자들이 묻힌 망월동 만장 깃발 아래 서서 ‘타는 목마름으로’를 불렀다.물론 두 죽음의 역사적 원인과 성격은 다르다. 하나는 식민지와 전쟁기의 노동에 얽힌 역사고, 다른 하나는 1980년 5월 국가폭력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다. 이를 하나의 비극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두 장소에서 이루어진 행위에는 공통점이 있다. 상처가 남아 있는 장소를 찾아가 죽은 이들 앞에 몸을 세우고, 흙과 꽃을 바치며 춤과 노래로 기억하는 것이다.이 과정에서 하정웅은 단순한 공연 후원자나 문화교류의 중재자 이상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다자와 호수에서 잊혀가던 죽음의 기억을 찾아내고, 한국과 일본의 예술가들을 히메관음상 앞에 세웠으며, 다시 와라비좌를 광주로 연결해 중외공원과 망월동이라는 또 다른 기억의 장소로 이끌었다. 이 가교에서 중심에 놓인 것은 국가나 제도가 아니라 사람과 기억, 죽음의 장소, 그리고 그것을 매개하는 예술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정웅은 ‘문화교류의 중개자’ 이상으로 서로 다른 기억의 장소를 이은 ‘기억의 문화예술 기획자’ 역할을 했다.1995년 와라비좌의 광주비엔날레 참가를 단순히 일본 민속공연단의 한국 초청으로만 기록한다면 이 사건의 중요한 의미를 놓치게 된다. 그것은 문화가 국경을 건넌 사건인 동시에, 한 장소의 기억이 다른 장소의 기억을 만난 사건으로 봐야 한다. 제1회 광주비엔날레의 ‘경계를 넘어’라는 주제는 그렇게 전시장 밖에서도 실현되고 있었다. 다자와 호수에서 광주로, 히메관음상에서 중외공원과 망월동으로, 흙과 춤에서 꽃과 노래로. 사람들이 경계를 넘었고, 그들과 함께 기억도 경계를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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