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년 전 쯤에 썼던 낡은 취재수첩을 꺼냈다. ‘양심’이란 단어가 주는 양가적 감정 때문이었다. 위기는 기회였다. 국난은 되레 국민을 뭉치게 했다. 1990년대 후반,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겪던 시기였다. ‘양심냉장고’는 암울했던 사회 분위기에 한줄기 빛이었다.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사람들은 울고 웃었다. 신용·믿음의 상징인 양심이 화두로 등장한 배경이다.
고육지책이었다. 전남 장성군 북하면 신촌마을 입구의 ‘양심가게’가 문을 연 건 2005년 5월이었다. 농촌 인구가 갈수록 줄면서 마을 구판장이 폐업하면서다. 인건비조차 건지기 힘들다는 이유에서였다. 초고령화 된 공동체는 흔들렸다. 거동조차 힘든 주민들이 간단한 생필품 하나 사기 위해 20㎞ 이상 떨어진 읍내까지 나가야 했다. 당시 마을 이장이 수 백만원의 사비를 털어 가게를 오픈한 이유다.
결국 문 닫은 장성 양심가게
주인은 따로 없었다. 주민들은 지켜보는 이가 없더라도 각 물품 아래 붙은 가격표를 보고 동전과 지폐를 가게에 두고 가는 시스템이었다. 전국 최초 무인 양심가게 탄생에 국민은 환호했다. 때마침 대기업 광고와 방송 다큐멘터리에 소개되면서 방문객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우여곡절도 겪었다. 이듬해 가을, 200만원 상당의 절도 사건에 CCTV를 설치했다가 3일 만에 뗐다. 경찰에 신고도 못한 채 속앓이만 했다. 자부심에 상처가 났다.
결국 고령화와 탈 농촌의 그늘을 빗겨가지 못했다. 사랑방 역할을 했던 양심가게가 문을 닫았다는 뉴스에 속내가 복잡했던 이유다. 20여 년 전, 가게 문을 열 당시 51가구 136명이 살았던 마을엔 현재 30여 명만 생활한다고 했다. 단골 고객이었던 어르신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난데다, 요양시설과 자녀 집 등에 머물고 있는 주민들도 많아서다. 애써 외면했던 현실이 언친 듯 걸렸다. 장성의 무인가게는 전남 일선 시·군이 겪고 있는 농업·농촌 문제의 축소판이다. 고령화와 인구 감소에 따른 우리네 미래를 암시하는 듯 해서다. 주민과 인프라가 사라진 마을에선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다. 양심가게 이야기를 꺼낸 건 광주·전남의 상황이 녹녹치 않기 때문이다.
광주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2025년 11월 139만4천301명으로, 인구 140만 명이 무너진 지난 한 해에만 1만3천여 명이 순유출됐다. 올해도 이 같은 추세는 지속되고 있다. 지난 1분기 광주의 인구 순유출 규모는 전국 최고 수준이었다. 광주에서 3천973명이 순유출돼 경남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 순유출률도 1.2%로, 세종에 이어 전국 2위 수준이었다. 전남은 지난 1분기 1천498명이 순유출됐다.
문제는 청년들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광주에선 매년 6천여 명에 달하는 청년이 떠나고 있다. 청년으로 분류되는 20~39세 인구는 지난해 34만5천785명이다. 전체의 24.8% 수준. 5년 전, 27.29%에 비해 2.49%p 줄어든 수치다. 고용률도 낮다. 광주의 분기별 고용률은 37%대로, 서울(50%대)과 10%p 이상 격차를 보였다. 수도권에 청년이 빠르게 집중되면서 실업률 증가와 부동산값 급등 등 부작용이 되풀이 되고 있다.
이처럼 인구 감소와 지역 경제 침체 등 위기의 광주·전남에 기회가 왔다. 인공지능(AI)과 에너지로 대표되는 최첨단 산업의 대전환 시기와 맞물려서다. 막대한 지방재정을 집행하고, 개발사업을 인·허가하는 권한을 가진 대표를 뽑는 6·3 지방선거가 일주일 뒤 치러진다. 전국 첫 광역단체 간 통합에 따라 320만 명 규모의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첫 수장이 선출되는 거다. 지역내총생산(GRDP) 150조원 규모의 초광역 지방정부다.
대의 민주주의 위기 속, 미래는
선거기간, 여러 경고음이 잇따랐다. ‘대의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는 거다. 더불어민주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인 광주·전남지역 민심 이반과도 무관치 않다. 민주당 후보 경선 과정에서 불거진 공천 잡음과 함께 무투표 당선 등 그 간 지속된 일당 독점 폐해와 부작용 등이 갈수록 악화되면서다. 그들 만의 잔치가 돼 가는 건 민주주의의 위기다. 공천 후폭풍에 휩싸인 민주당의 균열을 틈타, 조국혁신당과 무소속 후보들의 선전이 눈길을 끌 정도다.
통합된 전남광주의 꿈을 위해선 ‘강한 지방’이 전제돼야 한다. 문제는 가시밭길도 예고돼 있다는 점이다. 광주와 전남, 전남 서부권과 동부권 등 각 지역 간 대결구도가 형성되고 있는 점은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민선 9기, 통합시장 취임 때부터 핵심 현안을 놓고 잠재된 갈등과 지역주의가 표출될 가능성이 높다. ▲통합시 주청사와 의회 청사 ▲20조원 재정인센티브 ▲인공지능(AI)과 반도체 ▲국립전남의대 ▲군공항 이전과 무안국제공항 이슈 등이 대표적이다. 7월 공식 출범을 앞두고 시·도민들의 신뢰를 토대로 한 협력과 협치를 위한 통합 동력 확보가 중요한 이유다.
광역단체장이 대권 경쟁에 나서는 시대다. 전남광주통합시는 첫 수장 취임과 함께 낙후된 광주·전남 발전 등을 위한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내야 한다. 경쟁력을 스스로 키워야 한다는 거다. 수도권 블랙홀에 중앙-지방 격차와 불균형은 갈수록 심 화되고 있다. 광주시와 전남도가 이재명 정부의 ‘5극 3특’ 정책에 맞춰 통합을 이뤄내는 등 이른바 ‘퍼스트 펭귄’을 자처한 것도 이 같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다. ‘퍼스트 펭귄’을 자처할 만큼 절박하다.
투표엔 미래 가치가 담겼다. 전남광주통합시의 새로운 브랜드와 방향성은 상상력이 필요한 고차 방정식이다. 통합시가 초고령화된 전남지역 농촌은 물론, 청년과 미래 세대에게 희망을 주는 기회의 땅이 될 수 있을까. 전남광주 유권자들이 시장 후보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다. 리더는 도시를, 도시는 리더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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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칼럼] 광주특별시에 ‘이재명·삼성·SK 路’가 들어선다면
7월 초 쯤 이었다. 양가적 감정 탓에 영 불편했다. 아슴찮하면서도 염치 없음이랄까. ‘전라디언으로서의 굴레’는 스스로를 옥좼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가가 빠졌다’는 소식에 덜컹 내려앉았다. 뭔가 잘못된 행동을 하다 눈총을 받는 것처럼, 괜스레 움츠러들었다. 일주일 전인 6월 29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광주 반도체 팹(Fab·반도체 전용공장) 클러스터 청사진이 공개된 터었다.이재명 대통령의 폴더인사가 화제가 됐다. 대통령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향해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그러면서 “국가 영웅” “국민 영웅”이라고 치켜세웠다. 광주에 총 800조원 규모의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고 한 두 총수에 대한 파격적인 예우였다. 올해 정부 예산(약 728조원)을 훌쩍 뛰어넘는 숫자다. 당시 대통령은 이재용·최태원 회장에게 큰절을 하려했다고 한다. 참모들이 가까스로 말렸다는 게, 강훈식 비서실장의 전언이었다.대통령, 이재용·최태원 회장에 폴더인사전남광주는 아껴둔 땅이었다. 국토균형 발전과 지역 거점 전략을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장기간 개발에서 소외된 호남에 기회의 요인이 된 측면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풍부한 용수·신재생에너지 등을 장점으로 꼽았다. 투자 계획도 발표됐다. 전국 지자체 가운데 반도체 입지 경쟁력인 이른바 ‘전수토인(전력·용수·토지·인력)’이 제대로 갖춰진데다 다양한 인센티브 지원이 기대된다는 이유에서다. 이재용·최태원 회장은 각각 400억원 씩을 광주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에 투자하겠다고 설명했다.말 뿐만이 아니었다. 대통령은 발표 이튿날, 광주를 찾았다. 역사적·정치적 의미 등을 직접 설명하기 위해서다. 광주시·전남도 행정통합으로 전남광주통합특별시가 공식 출범한 날이었다. 인구 320만명, 지역내총생산(GRDP) 159조원 규모의 초광역 메가시티. 수도권 일극 체제 타파와 남부권 독자적 경제 거점 구축 등의 취지에서다. 그 간 인구 소멸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던 곳이다.산업화 차별과 민주화의 보상. 박정희·전두환 등 군사정권 시절, 수도권과 영남 중심 전략은 산업화 성과에도 극단적 수도권 집중이란 부작용을 낳았다. 광주 만의 잘못이 아니다. 고도 성장기에 산업화에서 배제된데다, 지역 출신 기업가도 적다 보니 양질의 제조업 일자리가 적고 중산층도 얇다. 이 대통령은 “차별과 설움을 견뎌내며 민주주의를 만들고 지켜 온 호남에 대한 역사적·국민적 보상으로 생각하고 차질 없이 반드시 성공시키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동서가, 수도권·지방이 균형 성장하는 첫출발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기득권이었던 보수층은 집요했다. 3대 메가 프로젝트 가운데 유일하게 광주 반도체 만이 지역간 갈등으로 비화됐다. 달뜬 지역의 분위기와 달리 광주 밖에선 보수 정치인·언론 등이 ‘정치적 결정’이란 프레임을 씌웠다. “영남 역차별” “정치적 보은”이라며 판을 깔았다. “경제적 원리에 따른 기업의 판단”이라고 전제 한 뒤 “그 간 차별과 설움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지켜온 호남에 대한 역사적 보상”이란 대통령의 발언을 문제 삼은 것이다.소모적인 논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폭염에 마른장마가 닥쳐도 의심의 눈초리를 겨눈다. 막대한 산업용수 확보와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라는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식이다. 반도체 팹 부지는 물론 ‘반도체 구인 남방한계선’이란 ‘그들의 잣대’를 들이댔다. 정주 여건 등을 고려했을 때 경기도 평택, 남쪽으로는 인재 유치가 힘들다는 논리다. 문제는 그 기준이 뭔지 모르겠다는 점이다.우려는 현실이 됐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뉴스 댓글 창에 독버섯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광주가 지목됐다. 주가 하락이 반도체 투자 탓이라고 했다. 왜 꼭 전라도여야 하느냐며 비꼬는 글들이 이어졌다. “전라도에 지으면 망한다” “중국산 반도체”라는 비아냥은 점잖은 축에 속했다. “‘홍어들’한테 퍼주다니 기업이 미쳤다” “대형마트 하나 없는 미개하고 낙후된 동네에 무슨 반도체 공장이냐” “7시 남쪽나라 청정구역으로 반도체 공장이 왜 가냐? 삼전닉스 망하려고 환장했네” 등의 날 선 조롱과 저주 가득한 혐오 표현이 쏟아졌다.구체화된 광주 반도체 인프라 시간표광주 군공항 부지에 들어설 반도체 클러스터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정부 차원의 연도별 로드맵이 처음 공개되면서다. 그 간 부지와 전력망, 용수, 인재 양성, 규제 혁신까지 전 과정을 책임지는 지원 체계 구축 등 병목으로 지목됐던 인프라 시간표가 구체화 된 것이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제시한 팹 1차 완공 일정은 상징적이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광주에 짓겠다고 발표한 팹 4기 가운데 1기 이상을 2029년 1차 완공하겠다는 거다. 지난 11일 이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다.반신반의는 확신으로 바뀌고 있다. 그 중심엔 이 대통령이 콕 짚은 일본 구마모토 모델이 있다. 일본 반도체 부활의 상징인 구마모토 TSMC 공장은 2021년 10월, 발표에서 반도체 양산(2024년 12월)까지 3년2개월이 걸렸다. 부지·전력·용수는 물론 행정기관의 인·허가, 인력 양성 등을 원스톱으로 한꺼번에 처리한 덕분이다. 인프라 속도전의 결과다. 정부의 과감한 재정 지원과 신속한 행정, 지방자치단체의 협력이 뒷받침 됐기 때문이다. 기반시설 구축과 규제 완화, 인허가 등이 제 때 이뤄지지 않으면 난항을 겪을 가능성이 큰 탓이다.광주특별시가 기로에 섰다. 인공지능(AI)과 에너지 등으로 대표되는 대전환의 시기를 맞아서다. 반도체 클러스터는 그 간 낙후의 대명사로 꼽혔던 전라도 미래 발전의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 지역 특성과 산업 기반을 활용, 소재·부품·장비기업은 물론 대학과 연구기관 등이 함께 성장하는 반도체·AI 생태계 구축 땐 천문학적인 경제적 파급효과가 기대된다. “낡은 관행이나 불필요한 절차를 과감히 개선 또는 단축하고 조기 투자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선제적으로 제거하는 데 전 부처, 전 지방정부가 힘을 모아야 한다.” ‘속도전을 넘어 전격전’을 주문하고 있는 이 대통령의 당부다.광주는 7개 특광역시 가운데 노사분규가 가장 적은 곳이다. 세간의 인식과 달리 기업 친화적이란 의미다. 이젠 정치색이 아닌, 광주의 진정한 실력을 보여줄 때다. 일각에서 지적하는 온갖 냉소와 억측·비난 등에 답해야 한다. ‘구마모토의 교훈’은 겉으로 드러난 속도가 아니다. 사전에 잘 준비된 부지와 전력·용수 인프라와 원스톱 행정 지원 등이 유기적으로 작동한 덕분이다. 기업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준 인프라와 인적 기반이란 뜻이다. 스스로의 실력으로 전남광주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음을 초대 민형배 특별시장이 보여줘야 한다. 그의 리더십에 전남광주의 미래가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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