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슴 안에 울화통 비슷한 게 생긴 건 작년 12월3일부터였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과 공포로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도 어느 것 하나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분노와 무기력증이 혼재하는 상황이 두 달째 이어지고 있다. 5월 광주를 경험한 세대여서도 아니고,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 극공감 해서도 아니다.
흡사 영화에서나 볼 것 같은 기가 막힌 일들이 눈앞에서 펼쳐졌으니, 그 충격과 분노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국회에 헬기가 뜨고, 무장한 특전사 군인들이 민의의 전당 유리창을 깨고 난입하는 폭거, "문짝을 도끼로 부수고서라도 들어가 끌어내라. 다 잡아들여서 싹 정리하라". 헌정을 유린하는 증언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현실이다.
상황이 이쯤 됐으면 국민들 앞에 참회의 삼보일배를 해도 시원찮을 판인데, 해괴한 논리로 법망을 피해가려는 그의 비굴한 모습이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계엄령이 아닌 계몽령이고 경고성이었다'. '요원을 끌어내라는 지시였는데 의원으로 둔갑시켰다'는 식의 궤변들. 국민을 바보로 보지 않고서야 어찌 감히 엄두를 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울화통이 또 도진다.
尹측, 궤변으로 일관
12·3계엄사태의 충격파는 대한민국을 끝없는 나락으로 이끌 수 있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미국의 포브스誌가 '윤석열 대통령의 이기적인 계엄 사태에 대한 비싼 대가는 한국의 5천100만 국민들이 시간을 갖고 분할해서 치르게 될 것'이라고 지적한 대목이 뼈아프다.
실제 계엄사태 이후 환율이 들썩이고 주가가 급락하고 해외투자자들이 등을 돌린 것은 대표적인 시그널이다. 세계사적으로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룬 유일무이한 나라 대한민국. 아래로부터의 민주화를 배우기 위해 동남아와 중동 국가들이 줄을 섰던, 그 자랑스러운 역사를 일순간에 무너뜨린 게 바로 12·3비상계엄이었다.
한낱 '경고성'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혹독하고 비싼 대가다. 우리 앞에 닥친 메가톤급 충격파를 고려하면 보수니, 진보니 지금 아스팔트에서 벌어지고 있는 해묵은 정쟁이 한가롭다.
나라의 현실이 이처럼 엄중한데도 사태를 초래한 세력들은 여전히 책임 회피에만 급급하고 있다. 적어도 헌정을 짓밟고 국가를 누란의 위기 속으로 몰아넣은 책임만큼은 져야 하는데도 해괴한 법리만 내세우고 있다.
'계엄은 대통령의 고유 통치권이고 경고성이었다. 국회 봉쇄가 아닌 질서 유지 차원에서 군병력을 투입했다. 국헌문란의 목적이 없던 만큼 목적범인 내란죄 처벌이 불가하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법리가 먹히지 않을 사실관계와 증언들은 차고도 넘친다.
무엇보다 계엄군을 직접 지휘했던 주요 군 사령관들의 증언이 구체적이다. 대통령을 상대로, 없는 사실을 꾸며댈 이유가 없다. 온 국민이 TV와 모바일을 통해 지켜봤던 계엄 당시 상황이 이를 뒷받침한다.
엄연한 사실과 증거들을 거스른다면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얼마든지 불법계엄 사태가 되풀이될 수 있다는 것을 공표하는 셈이다. 헌재의 시간이 임박했다.
백척간두의 위기 때는 나라를 바로세울 핵심 주체가 정치권인데, 지금의 상황은 답답하기 짝이 없다. '헌정사상 첫 현직 구속기소 대통령'을 배출한 오명의 국민의힘은 제대로 된 사과조차 없이 대통령의 궤변을 측면 지원하는 데 여념이 없다.
사법부를 비판하고 헌재까지 압박한다. 심지어 부정선거론을 옹호하는가 하면 이름부터 오싹한 백골단을 국회로 불러들이는 국회의원까지 있다. 모든 걸 떠나 계엄의 위헌, 위법성만큼은 자명한데도 여기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진영 갈등', '이재명 불가론'의 프레임 정쟁에만 골몰하고 있다. 그 와중에 뒤로는 조기대선을 염두에 두는듯한 모습이 이율배반적이고 한심하기까지 하다. 딱하기는 민주당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케케묵은 양비론으로 접근하려는 게 아니다. 계엄.탄핵 정국 속에서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지표는 곳곳에서 나타난다. 보수 과표집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최근 여론조사 추이를 보면 민주당이나 이재명 대표 지지율이 탄핵 찬성 여론을 오롯이 흡수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다.
정치권 눈높이 못미쳐
민주당의 독주나 이재명 대표의 사법리스크에 대한 반감이 작동했다는 분석이다. 특히 이 대표의 비호감도가 40%를 넘어선다는 지표는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당내 비명 그룹에서 일극체제의 정치문화를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이 대표가 그토록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바란다면 지금 시점에서 대선 불출마를 고려해 봄직 하다'는 일부 지식인들의 시각도 있다. 당내 역학구도상 그것이 어렵다면 민주당의 체질과 문화를 확 바꿔야 하는 것은 불문가지다. 비판세력과 중도까지 아우를 수 있는 포용의 리더십, 국민들을 향한 희망의 메시지가 지금 민주당에게 간절하다.
많은 이들이 벚꽃대선, 장미대선을 얘기하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윤 대통령은 탄핵심판이나 형사재판 내내 계엄의 당위성과 수사의 불법성, 내란죄 불성립 등으로 맞설 공산이 크다. 보수 진영의 여론전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헌재의 탄핵심판을 통해 엄중히 매듭을 지어야만 역사가 바로 선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끝없이 추락하는 대한민국의 좌표를 지켜볼 수 밖에 없다. 나라가 온통 계엄.탄핵에 파묻혀 엉망진창이 돼 버린 시대. 고작 이런 정도의 국격을 후세들에게 물려줄 수야 없지 않겠는가.
탄핵과 조기대선, 이를 통한 민생안정과 경제 활성화, 국격 회복. 이것이 대한민국호가 가야할 길이다. 무릇 지름길이 안 보이면 큰 길로 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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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시평] 윤석열식 민주주의와 아테나 여신 이욱연 서강대 인문대학장 이게 이렇게 길어질 일인가 싶다.굳이 민주주의 원리에 비추어 볼 필요도 없이, 상식으로 보더라도 시비가 분명한 일이다. 그런데도 헌재 탄핵 심판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그만큼 한국 사회 곳곳이 골병들었다는 증거다. 한국 민주주의가 깊이 위기에 빠졌다는 증거다.오늘 많은 사람이 어처구니없어하는 것은 피와 죽음으로 이룬 한국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린 장본인이 전두환 같은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도 아니고, 민주적인 선거로 뽑힌 대통령이어서다.탄핵 심판이 끝나더라도 무너진 한국 민주주의를 어떻게 회복할지, 참으로 어려운 숙제가 우리 사회에 떨어졌다. 한국 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해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 차원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기원으로 돌아가 민주주의 자체가 지닌 빛과 어둠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민주주의는 그리스에서 태어났다.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란 이름은 '아테나'에서 왔다. 아테나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이다. 이 여신상은 특이하다. 한 손에는 부엉이를, 다른 손에는 창과 방패를 들고 있다. 어찌 보면 연관이 없거나 모순되는 두 가지를 왜 같이 들고 있을까?아테나 여신이 지혜의 신이자 전쟁의 신이어서 그렇다. 그녀가 들고 있는 부엉이는 어둠 속에서도 세상을 볼 수 있고, 사물을 분간할 수 있는 지혜를 상징한다. 창과 방패는 상대를 무찌르고 나를 방어하기 위한 전쟁을 상징한다.아테나 여신이 지닌 이런 모순적인 두 가지 속성을 어떻게 이해할까?아테네 여신에 담긴 지혜의 뜻과 의미가 우리 보통 생각과 달라서 그렇다. 아테나 여신에게 지혜란 단순히 어떤 일이 진리이고 정의인지를 아는 능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이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고 정의라고 판단한 것은, 창과 방패를 동원하여 전쟁을 치러서라도 관철해야 하고, 그렇게 수행된 전쟁은 정의롭다는 의미도 함께 담고 있다.서구 역사에서 일어난 수많은 종교 전쟁이나 처참한 살육이 이런 아테나 여신이 지닌 지혜의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정의나 신의 명령을 내세우지만, 그것은 자신들 만의 명분이나 신념이거나 사욕과 위선을 그렇게 포장한 것일 뿐인 경우가 많았다. 지혜를 앞세워 총과 칼의 전쟁을 포장한 것이다.아테나 여신이 지닌 '지혜'와 '전쟁'이라는 상징적 의미는 민주주의의 양면성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그리스에서 탄생한 민주주의는 다양한 의견과 생각을 존중하는 열린 체제이다.하지만 리더가 어떤 생각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지혜'가 자신만의 강한 신념으로 굳어지는 순간, 그것은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교조적 이념이 되어,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을 탄압하고, 배척할 수 있다.더구나 이런 정치적 신념이 종교와 결합할 경우, 자기 생각을 실현하고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을 척결하는 것을 신성한 종교적 사명이라고 여기는 미신적 도취에 빠지게 된다. 그 순간, 민주주의는 무너지고 파시즘 세상이 된다.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아테나 여신에게서 지혜는 사라지고, 창과 방패를 든 전쟁만 남게 된다.그동안 한국 정치에서 계엄은 군인 출신 대통령이나 쿠데타와 연결되었다. 박정희나 전두환이 그랬다.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은 전시도 아닌 상황에서 민주 선거를 통해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 일으켰다는 점에서, 새로운 역사를 쓰면서 민주주의를 파괴했다.독일에 파시즘 시대를 열었던 히틀러도 민주적 선거로 선출되었다.히틀러는 자신이 진리라고 믿는 거짓 신념을 지혜라고 믿으면서 장애인과 정치 반대파, 동성애자, 유대인 등을 학살했다.공정과 상식을 내세우면서 다수 한국인의 선택을 받아 집권한 윤석열 대통령도 민주주의의 허점을 파고들면서 한국 민주주의 자체를 위기에 빠뜨렸다.윤석열 대통령의 민주주의는 지혜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기가 맹신하는 정치 신념을 위해서 자기 지지만 쳐다보면서, 정치적 반대 세력과 생각이 다른 국민을 압박하고 자기 권력욕을 채우는 창과 방패의 민주주의였다.세상 순리대로라면, 그리고 헌재가 쿠데타 면허증을 윤 대통령에게 내줄 생각이 아니라면, 윤 대통령 탄핵 국면은 곧 끝날 것이고, 우리 사회는 빠르게 대선 국면에 들어갈 것이다.곧 이어질 대선 국면에서 한국 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해서 유권자가 명심할 것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윤석열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는 점이다.수많은 '윤석열들'이 있다.정치인만이 아니라 수많은 지지자 대중이 있다. 그들도 민주사회 유권자다. 전두환 시대 때보다 윤석열 탄핵 시대가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게 더욱 어려운 건 이 때문이다.전두환은 특정 시기에 군사 쿠데타라는 특수한 방법으로 나타나서 다시 전두환이 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하지만 윤석열은 선거를 통해서 출현했기 때문에 언제든 다시 복제되어 그 후예가 출현할 수 있다.민주주의의 상징인 아테나 여신이 그렇듯이, 민주주의 자체가 지닌 한계와 어둠을 생각하면서 대선 국면을 맞아야 또 다른 윤석열과 윤석열식 민주주의가 다시 출현하는 걸 막을 수 있다.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구호로 공정과 상식을 내세웠듯이, 대선 후보가 내세우는 지혜를 가장한 말에 두 번 다시 속지 말고 그 뒤에 감추어진 창과 방패를 간파해 내는 유권자가 되도록, 각오를 단단히 할 일이다. 위기에 빠진 한국 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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