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봄', 이 얼마나 예쁜 말인가? 봄처럼 포근하고 따사로움이 늘 함께한다는 뜻일 것 같은 '늘봄'. 그러나 이제 이 언어는 그렇게 쓰일 수가 없다.
언어의 의미는 사회에서 규정된다. 아무리 좋은 언어라도 사회에서 다른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하면, 언어의 오염이 시작되고 결국 그 언어는 이전의 의미로는 쓸 수 없게 된다. 나에게 '늘봄학교'은 '녹색성장'과 같이 그렇게 오염된 채 다가왔다.
2024학년도 1학기 광주지역 늘봄학교, 신청에서부터 선정까지 학교 현장 갈등
2월 현재 광주에서는 30여개 초등학교가 늘봄학교에 참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신청한 18개 학교 중 중17개교는 협의록이 없으며, 교장 결정 3개교, 교장과 교감이 함께 결정한 학교 1개교, 교장, 교감, 행정실장이 결정한 학교 2개교, 부장교사가 요청하여 승인한 학교 1개교 등 내가 속한 학교지만 어떻게 늘봄이신청되고 선정되었는지를 학교 구성원은 잘 모른다. 그래서 서로 의심하고 속상해한다. 이렇게 늘봄학교는 불필요한 학교 현장 갈등을 양산 시키고 있다.
교사? 돌봄전담사? 일반직? 과도한 노동을 강요받고 있어
"우리가 일 때문에 늘봄학교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늘봄학교 거부의 본질이 업무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거겠지만, 노동자에게는 일도 중요하다. 여전히 시간제가 많은 돌봄전담사의 업무도 아니고, 수업과 생활교육이 고유 업무이자 이것만으로도 과도한 노동을 하는 교사의 업무는 더더욱 아니다. 늘봄지원실을 만들어 일반직을 배정한다는 것도 총액인건비제에 묶여있는 공무원 상황을 보면 실현 가능하지 의문이 들고, 기간제에게 맡기는 것 또한 노동의 불안정성을 부추김과 동시에 결국은 기간제 공고부터 선정 관리까지 다시 학교의 업무가 되는 것은 학교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안다. 학교의 누군가는 일을 해야 한다. 본연의 업무가 아니라 강요받은 업무를 그것도 과도하게 말이다.
가장 중요한 사실, 우리 아이들의 삶이 없는 '늘봄학교'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늘봄학교에는 우리 아이들의 삶이 없다는 것이다. 올해 초 늘봄학교에 대한 기사가 쏟아질 무렵 내 마음을 훅 치는 기사 하나가 있었다. 기사 중에는 지금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자녀로부터 들은 초등돌봄교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엄마, 나는 초등학교 때 돌봄교실이 제일 싫었어. 다른 친구들은 학교 끝나면 엄마랑 만나서 놀이터에서 놀고 학원에 가고 집에서 쉬는데, 난 혼자 돌봄교실에 갔어. 나도 다른 애들처럼 엄마랑 만나고 싶었어." 우리 아이들의 삶을 생각한다면 아침 7시부터 밤 8시까지 학교에 있는 게 폭력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 안드는지? 어른들보고 그렇게 있으라고 한다면 아마 대다수 집에 간다고 하지 않을까?
늘봄학교에는 주체인 우리 아이들의 목소리는 빠져있고, 즉 아이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에 대한 고민과 사유는 실종되었다.
학교, 지자체, 무엇보다 보호자가 우리 아이를 충분히 돌볼 수 있도록
필자도 아이를 돌봄교실에 보냈었고, 아이를 맡길 데가 없어서 발을 동동거린 적이 있다. 대한민국 보호자들이라면 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두 번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때 절실하게 느낀 것이 돌봄의 사회적책임이었고, 학교 현장에 있는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돌봄의 사회적 책임은 보호자의 노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과 동시에 보호자의 양육권을 보장하기 위한 적절한 노동시간 합의와 양육시간 확보도 해당될 것이다. 후자의 대표적인 것이 소위 '저녁 있는 삶'과 같은 것이다.
학교가, 지자체가 함께 우리 아이들을 돌봄과 동시에 보호자가 우리 아이를 충분히 사랑하고 충분히 돌볼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천천히 가더라도 그렇게 가야 우리 아이들의 삶이, 우리들의 삶이 있다.
그렇게 간다면 다시 '늘봄', 이 언어의 원래의 의미를 되찾아 진정 우리가 바라는 '늘봄'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정애숙 광주동산초등학교 교장
- [교단칼럼] 김대중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 김대중 대통령의 유산과 광주교육의 미래 올해는 민주주의, 평화, 인권을 향한 한국의 여정에 기념비적인 인물인 김대중 대통령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김대중 대통령의 유산을 되돌아보는 것은 특히 그가 중요하게 생각했고 오늘날 광주 지역사회에 핵심 가치인 교육과 청소년 개발 분야에서 그의 공헌을 평가할 수 있는 심오한 기회를 제공합니다.1924년 전라남도 작은 섬 하의도에서 태어난 김대중 대통령의 삶은 민주주의, 평화를 향한 끊임없는 추구로 정의되었습니다.'아시아의 넬슨 만델라'로 알려진 그의 삶은 권위주의 통치에 대한 반항으로 수년간의 투옥, 망명, 암살 시도 등 고난으로 얼룩졌습니다. 이러한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인동초라 불리는 그의 회복력은 그를 희망과 억압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변모시켰습니다.김대중 대통령의 삶과 비전은 1980년 광주에서 발생한 5·18민주화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권위주의 통치를 종식하려고 모인 평화시위대에 대한 잔혹한 탄압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평생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싸우겠다는 그의 의지를 불태웠습니다.김대중 대통령에게 광주의 투쟁은 불의에 맞서는 한국 국민의 회복력과 용기의 전형이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의 비극은 민주주의가 시민 참여, 투명성, 인간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구축되어야 한다는 그의 믿음을 확고히 했습니다.그는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결국 1998년 대통령 당선을 하였고, 이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교육을 국가 발전과 민주적 성장의 수단으로 삼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의 리더십 하에 한국은 공교육에 상당한 투자를 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교육시설 자원을 확충하고, 소외계층 학생들을 지원했으며, 비판적 사고와 시민적 책임을 강조하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그의 개혁은 또한 디지털 자원 및 인터넷에 대한 접근성 향상과 같은 교육 분야의 기술 발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여 지역 간 교육 격차를 더욱 해소했습니다.2000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노벨평화상 수상은 한반도의 민주주의,인권, 평화를 위한 그의 평생 헌신을 전 세계가 인정한 것이며, 정의와 이해가 갈등보다 승리하는 세상에 대한 그의 비전을 기념했습니다.이러한 위대한 업적을 거둔 김대중 대통령을 기념하기 위해 전라남도교육청은 김대중 100년 평화 페스티벌을 개최했습니다.이러한 기념 정신에 더해 광주광역시교육청이 후원하는 제15회 김대중 정신 계승 글쓰기 대회도 열렸습니다. 미래를 만들어나갈 학생들이 글쓰기를 통해 평화, 민주주의, 사회 정의에 대한 이해를 표현하고 김대중 대통령의 가치에 대해 깊이 성찰하여 그의 비전이 생생하게 남아 있도록 해 줄 것입니다.김대중 대통령 탄생 100주년은 한국 사회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공헌, 특히 민주주의, 평화, 교육에 대한 그의 헌신을 되돌아보게 합니다.광주에게 이는 학생들이 사려 깊고, 참여하며, 행동하는 시민이 되도록 역량을 부여하는 교육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구축하라는 요청입니다. 현재 광주의 교육체제는 기회와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디지털 리터러시, 글로벌 인식, 기후 위기와 같은 새로운 문제는 광주의 교육 시스템이 김대중 대통령의 가치에 충실하면서 발전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광주광역시교육청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의 정신을 기리는 민주시민 교육을 강조하며, 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확대해야 합니다.광주교육은 김대중 대통령의 비전을 전진시키고, 미래 세대에게 화합과 이해, 희망의 길을 밝힐 수 있습니다.광주교육을 통해 우리는 그의 놀라운 삶에 경의를 표할 뿐만 아니라 그가 쟁취한 민주적 이상이 미래 한국의 생생한 일부로 남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추가로 김대중 대통령이 평화민주당 총재 시절 16년 만에 이루어진 고향 방문길 중 광주 망월동 5·18 민주화운동 묘역에서 행한 추모사 일부를 발췌한 글을 소개하고자 합니다.5·18민주화운동 추모사나는 80년의 군사 법정에서 이렇게 유언했습니다. "나는 이제 죽지만 다시는 이 땅에 정치 보복이 결코 있어서는 안된다." 죽음을 기다리는 최후 진술에서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사형을 선고하는 비극의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나는 나에게 죽음을 강요했던 그들을 사랑할 수는 없으나 용서할 수는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춘향이의 맺힌 한은 이도령을 만나서 마침내 풀어지는 것이요, 심청이의 한은 심봉사가 눈을 떠야만 풀어지는 것입니다.나는 선언합니다. 독재를 가능하게 한 제도는 결코 용서할 수 없지만 인간은 용서할 수 있습니다.용서와 화해를 통해 이 나라에 진정한 민주화를 실현하는 일이, 집결된 국민의 힘으로 통일의 날을 앞당기는 일이 이 시대가 우리에게 부여한 가장 큰 소명입니다.추운 겨울을 고통과 외로움으로 참고 이겨낸 인동초(忍冬草)가 해독제로 쓰이듯 나는 고난과 시련의 세월을 지나 오늘 나의 소중한 님들 앞에 서서 이 김대중의 모든 것을 바쳐 한 포기인동초가 될 것을 굳게 약속합니다.광주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으며, 사랑하는 우리들의 고향 광주를 아직은 노래하지 않으리라고 절규한 시인의 고통의 깊이를 나는 이해합니다.영령들이여, 부디 편히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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