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과 인간을 읽다

한반도 끝자락 바다에는 수군의 울음소리가 맴돈다

입력 2023.09.19. 18:33 양기생 기자
[마을과 사람을 읽다] ⑨고흥 포두면
고흥 외초마을에 사는 명충남(83) 어르신은 방조제 사업으로 사라진 새뚜마을 출신으로 당시 간척지 사업에 직접 참여했다. 명 어르신은 상전벽해가 된 마을을 보며 당시를 회상했다. 

[마을과 사람을 읽다] ⑨고흥 포두면 

포두(浦頭)는 포구 뱃머리다. 그런데 그곳엔 포구도 바다도 없다. 머나먼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들판의 벼들이 바람이 일 때마다 물결처럼 푸르게 출렁인다.

괭이와 삽으로 산들을 헐어 고흥만 방조제를 막던 장면을 상상하기도 어렵거니와 나룻배와 어선이 드나들고 어부들이 고기를 잡던 모습, 나아가 전투함을 이끌고 왜선에 맞서 싸운 장수들의 모습을 그리기는 더욱 어려웠다. 상전벽해는 포두를 두고 하는 말이다.

포두면 노인회장인 송오수(83) 씨는 바다를 막기 전 마을 앞은 농어, 모뎅이(숭어 새끼), 장어, 꼬막이 지천이었단다. 밀 줄기로 밀대를 엮어서 끌고 가면 물고기들이 바글바글 잡혔다며 유년의 길두 해변을 가리켰다. 집안 어르신들에게서 이순신 장군의 오른팔이었던 송희립 장군 활약상이나 마을에서 여산 송씨 58호 중에서 40여 분이 참전해 대부분이 전사했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다며, 앞 들녘 아니 앞 바다는 조상들이 피와 눈물로 지킨 땅이라며 숙연해했다.

포두면 외초마을에 사는 명충남(83)어르신은 지금은 사라진 새뚜마을 출신이다. 그는 스무 살 때 간척지 공사에 직접 참여했다. 마을까지 바닷물이 찰랑찰랑했단다. 바다에서 맛나기로 유명한 새뚜 복숭아를 던져놓고 서로 먼저 도착한 사람이 차지하는 놀이를 하면서 놀았는데, 커서는 곧장 간척 사업에 뛰어들었다.

오직 지상목표인 식량 증산을 위해 바다를 메워 논밭을 만들어야 했다. 매일 300~400명의 지역민들이 물막이 공사에 나섰다. 주민들은 4~5명이 한 조를 이뤄 토차로 흙을 실어 나르고 돌배로 바위를 실어서 둑을 쌓았다. 지금의 제2 수문이 있는 곳은 당시 오동도 섬으로 채석장이었고, 지금은 제1 수문 자리는 새의 머리처럼 생긴 새두산이 있었다. 낙안읍성을 쌓은 바위같이 커다란 성이 마을에서 저 멀리 남성리까지 이어졌었는데, 그 성의 많은 돌들을 모두 물막이 공사로 썼다. 지금까지 그 성이 있었더라면 장관이었을 텐데 소중한 자산을 잃어버렸다며 아쉬워한다.

그럼에도 방조제에서 등태로 돌을 짊어지고 나르며 밀가루 배급도 받고 돈도 벌었으며 결혼도 했다며, 험난한 공사 중 여기저기서 사고로 사람이 죽으면 눈물바다가 되기도 했지만 간조 날이면 포두면 전체가 돈 바다가 되었다고 기억한다.

포두 앞 간척지는 1955년부터 1965년 사이에 진행된 미공법 480조, 밀가루 원조 사업으로 이루어진 가난함이 만든 육지, 굶주림을 채우기 위한 허기와 적지 않은 죽음이 쌓은 방조제였다.

안동사 현판

포두면에서 발포 방향으로 내려가다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후동마을 안동사(雁洞祠)를 찾았다.

전쟁은 군사력과 작전은 물론 전투력도 뒤져서는 안 된다.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물리쳤던 것은 이순신 장군의 지혜와 용기는 물론, 판옥선과 여러 장수, 그리고 전투를 도왔던 백성들의 애국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정걸 장군이 만든 판옥선이 아니었다면 그 많은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도 번번이 승리하기란 쉽지 않았을 터이다.

이순신 장군은 덕장이자 지략가였으며 용병술에 능했다. 장군이 임진왜란 중에 승리할 수 있었던 제1 묘수는 정걸 장군을 기용한 것이다.

이 장군은 47세로 전라 좌수사로 임명을 받자 곧장 자기보다 31세나 더 많은 정걸 장군을 고문이자 참모 역할인 조방장으로 모신다. 을묘왜변 때 달량진 전투에서 승리했고, 주변 환경과 왜군을 손바닥 보듯 하고, 판옥선 등 각종 무기를 제작한 경험이 있는 산전수전 다 겪은 정걸 장군이 제일 먼저 들어왔을 터이다.

고흥 포두면 승유재

그 판옥선의 주인공 정걸 장군을 만난다니 정말 가슴이 뛰었다. 안동사는 마을 외진 고샅에 숨어 있었다. 압해 정(丁)씨의 조상을 모신 고흥 승유재(承裕齋) 맨 위에 정걸 장군을 모신 안동사는 꼭꼭 숨어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백성을 위해 왕은 세종 외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과 사대부를 위한 시대, 성리학은 그들의 법전이었으니 당시 백성들은 참으로 고단한 삶을 살았다. 위로는 각종 세금과 노역에 시달리고, 북쪽은 오랑캐, 남쪽 바다로는 왜놈들이 수시로 출몰하여 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수탈해 갔다.

대부분 성곽도 위로는 청나라와 오랑캐의 침략에 대비한 수어(守禦)진이었고, 아래로는 수시로 침범하는 왜군에 대비한 방어(防禦)진이었다. 고흥에만 사도진성 녹도진성 여도진성 발포진성이 있었다. 성종실록에 1491년에 사도성이 축성됐는데, 높이 15척, 둘레 1천440척이었다.

전라도 흥양에 출몰하는 왜선을 토벌하기 위해 설치됐다고 기록됐다. 임란 100년 전이다.

예전에 바다였던 안동마을 쉼터

포두면에서 태어난 정걸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78세의 나이로 옥포해전에 첫 출전하고, 한산해전과 부산포 해전에 참전해 공을 세운다. 1593년 2월에는 행주대첩에서 화살이 떨어져 위기에 처한 권율 장군에게 배 두 척에 화살을 실어가 같이 싸우는 등 그를 돕는다.

임진왜란은 조선, 일본, 중국 3국간 동북아 최대전투였다. 그런 만큼 간단한 싸움이 아니었다.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 못지않게 가려진 수많은 장수와 수군들에 대한 삶과 역사가 바다에 수장됐다.

순천 고흥 보성 장흥 해남 영암을 빼놓고 임진왜란과 수군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하드웨어를 뺀 소프트웨어 이야기만 하는 것과 같다. 대부분의 전투 준비는 전라좌수영과 우수영에서 이루어진다. 특히 고흥과 보성은 군량미를 보급한 곳이자 가장 많이 수군에 참여한 곳이다. 임진왜란 때 죽은 병사 중에서 상당수가 고흥출신 수군이었다는 사실로 보아 그만큼 고흥 사람들이 수군으로 많이 활약했다는 것이다.

고흥은 바다는 물론 육지 곳곳에서 백성들이 지키고 있었기에 왜적이 감히 넘보지 못한 곳이다. 고흥은 왜군에게 눈엣가시였던 셈이다.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가 없었고, 고흥이 없었다면 임진왜란 승리도 없었던 셈이다.

명장 밑에 졸장 없다고 했다. 온 국민들의 뜨거운 애국심과 고흥 해남 영암 장흥 보성 순천 등 호남사람들의 보급과 전투력, 고흥사람들의 희생과 정걸 장군의 노하우를 잘 끌어낸 이가 바로 장군 이순신이다.

포두면 거리를 걷는다.

이곳에서 정걸 장군은 오늘도 남쪽 바다를 지키고 있다. 그만큼 포두면 후동 마을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안동사는 몸을 납작 엎드린 감시초소 같다.

어쩌면 정걸 장군은 이곳에서 바다가 육지가 되는 과정도 오롯이 지켜보았을 것이다.

당신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바다는 결국 땅이 되었고, 땅 역시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한다면 무슨 상관이랴 마는 자기 살기 바쁜 후세 사람들을 보고, 국가와 백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당신의 삶과 견준다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진다.

포두면 바다와 농지

고흥은 소멸 위기에 처한 대표적인 읍이다. 옛 지명 흥양은 어디 가고 고흥은 인구수에서 지금 자꾸 뒷걸음질 친다.

중앙으로부터 가장 멀다는 이유만으로 소멸 1순위가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고흥 없는 대한민국은 없다. 서울은 왕이고 수도권이 사대부라면 전라도와 함경도 변방은 백성과 다름없는 불평등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정운, 송희립, 나대용, 정걸 장군은 전라도 출신 맹장으로 고흥을 중심으로 맹활약한 이순신 심복이다. 이순신 장군이 이들의 마음을 읽었고, 이들 역시 이순신 장군의 마음을 알았다. 그래서 바다를 지킬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반도국가여서인지 평온할 때가 거의 없다. 중국과 러시아, 일본은 지금도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는 진정 인과관계가 없을까. 망각의 강, 삼도천을 지나면 우린 정말 모든 과거를 망실하고 마는 걸까.

역사는 되풀이된다. 고흥 바다에서 수장된 고흥 수군들의 호곡을 듣는다. 박용수 시민전문기자


박용수는 화순 운주사가 있는 곳에서 태어났다. 전남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줄곧 수필 쓰기만 고집해 왔다. ‘아버지의 배코’로 등단하여, 광주문학상, 화순문학상, 광주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하였다. 광주동신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며, 작품으로 꿈꾸는 와불, 사팔뜨기의 사랑, 나를 사랑할 시간이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슬퍼요
0
후속기사 원해요
1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

댓글0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