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과 인간을 읽다

양한묵 선생의 애국심, 향민들의 자부심이 되다

입력 2023.05.31. 10:46 양기생 기자
[마을과 인간을 읽다]②화순 앵남마을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 옥사
고향을 그리던 마음 헤아려
서울서 화순으로 유해 옮겨
주민들 '조국 위한 삶' 기억
"마을서 제2의 지강 나오길"
화순 앵남리의 양한묵 선생의 묘소. 지강 양한묵은 1919년 3·1운동을 일으킨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1919년 5월 26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고문으로 순국했다. 서울 수철리에 안장됐다가 1922년 5월 화순으로 이장했다.

[마을과 인간을 읽다]②화순 앵남마을

산비탈엔 들국화가 환-하고 누이동생의 무덤 옆엔 밤나무 하나가 오똑 서서 바람이 올 때마다 여윈 가지를 내어 저었다. 갈길을 못 찾는 영혼 같애 절로 눈이 감긴다. 무덤 옆엔 작은 시내가 은실을 긋고 차단-한 비석이 하나 노을에 젖어 있었다. -중략- 한 줌 흙을 헤치고 나즉-이 부르면 함박꽃처럼 눈 뜰 것만 같아 서러운 생각이 옷소매에 스몄다. -김광균의 '수철리(水鐵里)'


화순 앵남마을 뒷산을 오르면서 수철리 시가 떠올랐다. 서울특별시 금호동에 있던 수철리는 양한묵 선생이 처음 묻힌 곳이다. 1922년 5월 선생은 천도교단의 주선으로 송정리를 거쳐 이곳 고향 앵남마을로 돌아왔다. 들국화, 노을, 함박꽃 이미지가 죽은 누이의 모습과 겹치듯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살다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선생의 모습과 어렴풋이 겹쳤다.

다행히 마을 뒷산은 산벚이 환하다. 칠구재 주변으로 벚꽃이 만개해서 꽃 잔치 중이고, 세량지 길목엔 꽃눈개비가 흩날린다. 겨우내 엉킨 시련을 털어내고자 나선 이들의 나들잇길이 제법 길다.

군데군데 내려다보이는 마을들은 이름도 곱다. 원화리, 천암리, 백암리, 칠구재, 쌍옥리, 월곡리, 세량리, 꽃과 바위와 달과 계곡과 수양버들 그리고 새들이 어우러진 한 폭의 이상사회를 지상에 펼쳐놓은 듯하다.

어쩜 하늘이, 아니 그 누군가가 샹그릴라를 이곳에 실현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60호가 넘는 제법 큰 마을 앵남리. 지나는 나그네가 기웃거리다가 끝내 들어앉고 마는 곳, 그래서 토박이보다 외지인들이 더 많은 곳이란다.

마을 회관 앞에 들어서니 몇 분 할머니께서 점심 차 귀가 중이다.

봄철 들녘에 나가 묵은 땅에 거름도 주고 채소도 심느라 바쁘시다. 대부분 칠순을 훌쩍 넘긴 할머니들, 봄빛이 탄 얼굴이 봄꽃보다 곱다.

사람을 도통 만나기 어렵다는 말에 할머니 말씀, 예전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단다. 그래서 행여 아이들이 역병에 걸리지 않도록 마을 입구에 디딜방아를 거꾸로 세우고 고쟁이를 씌워 액막이했단다. 혹시 할머니 고쟁이 아니었냐는 농에 펄쩍 뛰신 당신은 그때 젊어서 예쁜 팬츠만 입었다며 낯을 붉히신다. 가뭄이 심한데 고생 많다는 말씀에 앞산을 가리키며 "쩌그 종괘산 무제등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금방 비가 왔는데, 시방은 어쩔랑가 모르겠네." 하신다.

"저 앞에 당산나무 있제! 지금은 다 죽어간디, 그 나무를 보고 봄에 한물에 잎이 나면 풍년, 나누어 피면 가뭄이 든다는 당산점도 쳤고, 정월 대보름에는 남녀가 나눠서 줄다리기했는데, 힘이 센 남정네들보다 단합력이 좋은 우리가 꼭 이겼다." 하시며 불과 한 세대 전 추억을 아련하게 떠올리신다.

화순 앵무동 정중앙에 양한묵 선생 묘가 있다.

그나마 이곳이 광주·화순·도곡온천·남평을 잇는 길목이라 다행이지, 당신들도 이렇게 노인들만 사는 세상이 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단다.

노인이 돌아가자 회관 앞은 다시 고요해졌다. 그 고요를 뚫고 가볍게 흔드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 너머 기차가 때마침 폐역된 앵남역으로 느릿느릿 들어선다.

아련히 TV에서 '마지막 앵남역 여성 역장 이야기'를 본 기억이 떠오른다. 간이역을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여성 역장은 지금쯤 무얼 할까.

그도 나처럼 자분치 휘날리진 않을까. 보성 여수를 거쳐 섬진강을 건널 전라선 기차, 몇 칸 되지 않는 헐겁고 가난한 무게가 씁쓸하기 그지없다. 앵남역은 1990년 폐역했고 칠구재는 1999년 개통됐다.

마을 뒤로 접어드니, 망치 소리가 들린다. 마을 주민 김용무(80) 어르신이 개인 쉼터를 보수 중이란다. 지강 양한묵 선생의 묘소를 묻자 어르신은 손수 길 안내를 해주신다. 말 그대로 앵무봉충(鸚鵡逢蟲) 형국. 뒤로 앵무산이 앞으로 봄꽃이 지천이다. 읍내로 땀재, 남평 가는 염재, 광주 가는 칠구재, 곳곳 만화방창이다.

"지강 선생님 같은 분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살지요, 고맙게 생각하고 살아야지요."

어르신은 양한묵 선생님을 무척 자랑스럽게 가슴에 간직하고 계셨다. 능주에서 근무도 했고, 재정 분야에 밝았다며, 요즘도 가끔 십여 명 남짓 특정 단체나 학생들이 동아리로 오곤 한다며, 물론 그분들도 공부하고 오지만, 요즘 어느 관광지에나 있는 해설사처럼 지강 선생에 대해 야사나 알려지지 않는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방문객에게 잘 설명해 줄 수 있었으면 더욱 좋겠다고 하신다.

마을 사람들은 양한묵 후손들이 마을을 들러 음식도 나눠 먹고 정분을 나누던 지난 몇 해 전을 기억하고 그리워하신다. 동시에 마을 사람들 대다수는 한결같이 우리 모두가 양한묵이라는 마음 자세로, 한 사람 한 사람이 지강 양한묵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며 지강 선생의 애국심과 애민 정신에 자부심을 품고 자랑하신다.

화순 능주시장 3·1 만세 운동 터.

앵무 봉접, 어쩜 양한묵 선생이 이 마을로 들어온 일이야말로 마을 사람들과 앵무 봉접한 일이 아닐까. 또 욕심을 낸다면 마을 사람들은 제2의 제3의 양한묵 선생과 같은 사람이 이 마을 앵남리에 나타나길 고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한묵 선생에 대한 몇 가지 일화가 떠오른다. 1894년 현대 도곡인 능주목(綾州牧) 율치(栗峙)에 있을 때였다. 당시 김개남 휘하의 동학농민군이 장흥과 보성 등지에서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활동하다 상당수 체포돼 능주목으로 압송돼 왔다. 이때 선생은 능주 목사 조존두(趙存斗)를 설득해 사형당할 많은 동학농민군을 구출했다. 목사가 감동하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선생은 1895년부터 이듬해까지 7개월 남짓 기간 능주에서 세무관으로 근무했다. 그때 세무관은 산적한 문서가 엉망이어서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한 상태였다.

이를 본 선생은 불과 몇 개월 만에 일목요연하게 신속히 정리해 버려서 향리들이 깜짝 놀랐다고 한다. 어쩌면 능주시장 3·1운동 만세운동을 양회준이 주도한 것이나 선생이 독립선언서 33인 활동 중에도 재정을 맡아 일을 처리했던 것 모두 선생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그뿐 아니라 선생은 독립운동 및 천도교 관련된 다양한 분야의 자료를 명석하게 정리했다. 그분의 삶과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선생은 1909년 12월, 이완용을 저격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에 연루돼 전격 체포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고, 1919년 3·1 혁명으로 일경에 체포돼 심문 과정에도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한국인의 의무이다. 이후에도 기회만 있으면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자신의 주장을 펼쳤고 결국 일경의 가혹한 고문에 56세의 나이로 1919년 5월26일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일한 옥중순국이었다.

고향을 떠나 전국을 풍찬노숙하며 독립에 앞장섰던 선생, 안중근 열사나 김구 선생처럼은 아니었을지라도 평생을 민족과 국가를 위해 세상을 누비며 치열하게 싸우고도 기억되지 않는 드문 사람이 양한묵 선생이다.

그의 귀향은 너무도 당연한 것 같다. 그가 그토록 찾고자 한 조국은 결국 애향심이 시작 아니었을까. 당신의 뿌리, 이곳 앵무동에서 새소리 들으며 지금은 좀 편안할까. 대부분 산이 그렇듯 앵무산은 솔대봉, 매봉, 대봉에 둘러싸여 있고, 그 아래 앵남마을이 둥지처럼 안겨있다. 앵무동의 고요를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박용수 시민전문기자


쓸쓸함이 가부좌한/ 외딴집의 툇마루

한 줄기 여린 햇살이 무심히 들여다본다.

아무도 오지 않는 집/ 까치집만 덩그렇다.

모서리 둥글게 닳은/ 일기를 꺼내본다.

푸른 잎이 무성한 나무를 꿈꾸었던…

가없이 멀어진 날에게/ 젖은 손을 흔든다.

꽃 다 진 후 그것도/ 소한으로 가는 길목

저 홀로 붉은 남천, 뜨락이 다 환하다.

서러움이 차라리 깊어/ 득음에 이르렀나.

-정혜숙의 '앵남리 삽화'


박용수는 화순 운주사가 있는 곳에서 태어났다. 전남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줄곧 수필 쓰기만 고집해 왔다. ‘아버지의 배코’로 등단하여, 광주문학상, 화순문학상, 광주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하였다. 광주동신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며, 작품으로 꿈꾸는 와불, 사팔뜨기의 사랑, 나를 사랑할 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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