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석이 만난 사람

[조영석이 만난 사람⑩] '대한민국명장 제586호(패션디자인)' 전병원양복점 전병원 사장

입력 2021.07.15. 14:38 김승용 기자
7전8기 끝 명장의 자리까지..."내 기술 사회에 돌려주는 일만 남았다"
‘밥은 안 굶는다’는 어머니 권유에
고교 진학 대신 재단사 길 걷게 돼
양복쟁이 된 이상 최고 되고 싶어
재단사 시작 42년 만에 인증 받아
패션디자인 부문 '대한민국명장' 전명원 양복점 전병원 사장이 무등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옷이 날개'라고 하듯이 편안하면서도 자신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옷이 좋은 옷이다"고 말한다. 오세옥기자 dkoso@mdilbo.com

중학교를 졸업하던 15살의 소년은 남들처럼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지, 결코 양복점에서 기술을 배우고 싶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에게 "기술자는 부자는 못돼도 밥은 안 굶는다."고 했다.

42년의 세월이 흘러 소년은 2014년 국가가 인정한 최고의 양복쟁이가 되었다. '대한민국명장 제586호'는 전병원양복점 전병원 사장의 이름을 대신한다. 말 그대로 7전8기(七顚八起)의 8번째 도전 끝에 이룬 영예다. 호남지역 최초이자 유일한 패션디자인 부문 명장(名匠)이다.

기술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인 명장은 하루아침에 탄생되지 않는다. 지난 12일 자신의 이름을 건 전병원양복점에서 그를 만나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 없는 명장의 시간은 어떻게 채워지는지 물었다.


-'배우고 싶지 않았던 양복기술'과 이 분야의 '대한민국명장'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길이지 않는가.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 시절에 누군들 양복점에서 실밥을 뜯고 다리미질을 하면서 기술을 배우려고 하겠는가. 처음 들어간 양복점에서 공부책을 끼고 돌다 핀잔도 많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텔레비전을 통해 세계 기능올림픽 입상자들이 꽃다발을 목에 걸고 서울 시내 카퍼레이드 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들 중에 양복기술자도 있더라. 그 순간 '바로 저것이다'라고 눈이 번쩍 뜨였다. 양복기술로 성공하겠다는 결심을 그때 했다."


-양복기술을 배우게 된 계기는.

"중학교 졸업 무렵 가세가 기울어 고등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못됐다. 어머니께서 '1년만 기술을 배우고 있으면 다시 공부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여 양복점에 들어가게 됐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머니께서는 사전에 철공소와 이발소, 자전거포 등 나름의 시장조사를 하셨더라. 당시에는 내가 왜소한 체격이어서 아들이 체력적으로 힘들지 않은 곳을 찾으셨던 것 같다. 그중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일하는 양복점이 적격이라 판단하신 거다. 중학교 졸업식도 참석 못하고 1972년 1월2일 양복점으로 출근하면서 여기까지 오게 됐다."


-오랫동안, 또는 평생 한우물을 판다고 해서 누구나 명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노력들이 명장의 기틀이 됐다고 보는가.

"주말이나 쉬는 날에는 서울에서 활동하는 업계 최고의 선배 기술자들에게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편지를 써서 보낸 뒤 찾아다녔다. 한참 어리고 실력이 모자란 젊은이의 혈기 하나로 부탁드린 것이다. 그럴 때 마다 그분들께서는 밥 사주고, 차 사주면서 '자식에게도 안 가르쳐 준다'는 자신만의 기술을 전수해주더라. 대통령들의 양복제작으로 유명한 '세기 양복점'의 윤인중 선생님께서 어린 나를 '영광촌놈'이라고 부르며 무척이나 귀여워하셨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또 광주 태화양복점 재단사였던 신영남 선생님께서는 군대 제대 후 재단을 배우기 위해 찾아갔더니 당신의 포토폴리오를 하나도 남김없이 내게 넘겨주시더라.

선생님이 장사꾼이면 제자도 장사꾼이 되고, 선생님이 기술자이면 제자도 기술자가 되지 않겠는가. 젊은 시절, 휴일까지 반납해가면서 모든 시간을 양복에 바친 나의 노력도 있었지만 그보다 큰 것은 좋은 스승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스승들이 없었으면 옷 지어 팔면서 돈 버는 재미에 만족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대한민국명장'이자 패션디자이너인 전병원양복점 전병원 사장이 무등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옷이 날개'라고 하듯이 편안하면서도 자신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옷이 좋은 옷이다"고 말한다. 오세옥기자 dkoso@mdilbo.com

-명장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왕 양복쟁이가 되었으니 양복대통령이 되고 싶었다. 양복대통령은 못돼도 '호남에서 양복하면 전병원'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는가. 내 기술이 최고임을 인증 받고 싶어 양복인생 28년째 되던 해에 첫 도전을 했으나 떨어졌다. 2년에 한 번씩 명장을 선정하기 때문에 한 번 떨어지면 2년을 또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떨어지기를 7번 하고 8번째 도전해서 명장이 됐다. 경력 42년째 되던 해다. 명장선정을 위해서는 신청하는 문서작성도 중요한데, 내가 언제 글을 써 보았겠나. 옷 만드는 것 보다 글 만드는 것이 훨씬 더 어렵더라(웃음)."


-능력 있는 재단사란 어떤 사람인가.

"기능적인 면만 놓고 본다면 2개월이면 재단을 배울 수 있다. 하지면 훌륭한 일류 재단사가 되기 위해서는 신체 치수와 체형은 물론이고, 고객의 직업적 특성이나 얼굴색, 원단 재질 등 다양한 요소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재단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업계에서는 최소한 양복 500벌 정도는 납품해 봐야 나름의 재단사 대열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맞춤양복이 대세이던 시절에는 돈도 많이 벌었겠다.

"1987년 양복점을 개업하고 나서 하루에 34벌을 주문받은 적도 있다. 주문이 밀리다 보니 양복을 맞추기 위해 치수를 잰 뒤 두 달 정도 지나야 완성할 수 있었다. 잘 나가던 시절에는 한 해에 2억 원 가량도 벌었던 것 같다. 1년에 집 한 채씩 생기더라. 하지만 돈 보다는 최고의 기술자가 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는 '잠깐 기다려 달라'더니 1989년도 탁상달력 한 권을 가져와 펼쳐보였다. 누렇게 빛바랜 달력에는 날짜마다 양복을 주문한 고객 명단으로 가득했다. 어떤 날은 세 명, 어떤 날은 다섯 명의 이름들이 날짜들을 채웠다.

-기억에 남는 고객은.

"1982년 초보 재단사로 근무할 때였다. 역삼각형에 근육질의 한 보디빌더가 찾아와 양복을 맞췄는데 그때의 내 기술로는 쉽지 않았다. 옷을 만들었지만 맞지 않아서 '고객님의 체격이 양복을 재단하기에는 까다롭다'고 변명을 했더니 그분께서 '내가 평범한 체격이면 기성복을 사 입지 왜 여기 왔겠느냐?' 라고 반문하더라. 그 말을 듣는 순간, 죽비에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더라. 그분 덕에 나를 되돌아보게 됐고 재단 기술을 처음부터 다시 배운다는 자세로 익혀 나갈 수 있었다. 지나고 보니 그분도 내게는 훌륭한 스승이었다."


-지금은 기성복 시대다. 맞춤양복은 이미 사양길로 접어들었지 않은가.

"사양길로 접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없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시대흐름에 따른 구조조정이 필요했을 뿐이다. 오히려 지금의 시대에 가장 적합한 직업중의 하나가 바로 맞춤양복이다.

기계에서 찍어 낸 옷 보다는 자신만의 멋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고, 경제성장에 따라 비싸더라도 최고의 품질을 소비하려는 계층도 예전보다 두터워 졌다. 여기에 기성복이 몸에 맞지 않는 특이체형의 사람들은 맞춤양복을 찾게 될 것이다.

지금은 장인이 대접받는 시대다. 맞춤양복은 도전해볼 만 한 블루오션의 직업이다."


-좋은 옷은 어떤 옷인가.

"편안하면서도 자신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옷이 좋은 옷이다. 비싼 옷이 아니라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말한다. '옷이 날개'라고 하지 않은가. 잘 날 수 있으려면 자신에게 맞아야 한다. 성능이 좋다고 해서 병아리가 독수리 날개로 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옷을 잘 입는 팁을 가르쳐 달라.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자주 서는 습관을 기르면 도움이 된다. 거울 앞에 서서 연출도 하고 포즈도 취하다 보면 자신의 옷매무새에 대한 흠결도 보이고 반대로 장점도 발견할 수 있다. 흠결을 줄여나가고 장점을 취해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옷 잘 입는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직업인으로서 희망이 있다면.

"개인적으로는 우여곡절이 많은 삶이었지만 국가가 인정한 명장까지 됐으니 인생의 꿈을 다 이뤘다고 본다. 이제는 내가 갖고 있는 기술을 사회에 돌려주는 일 만 남았다. 내가 죽게 되더라도 기술까지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아 맞춤양복의 종합기술서적을 내려고 준비하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며 - 쓰잘때기 없는 가정을 해 보았다. '어린 전병원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남들처럼 고등학교에 진학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무엇'인가는 됐겠지만 그 무엇이더라도 오늘의 그 보다는 못 하겠다는 것이 결론이다. 당신의 생각은. 조영석 시민기자·kanjoys@hanmail.net

조영석

이곳에 '나이 들어가면서 나잇값 하는 일이 참 어렵다.'며 '아직도 성깔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더니 아는 후배가 문자를 보내왔다. 문자인즉슨, '나이만 늘어날 뿐 청년이다. 급하지 않고 빠르다. 거칠지 않고 강하다. 방법과 방향을 찾을 때면 나는 가끔씩 청년꼰대를 소환한다.' 고 나를 치켜세웠다. 누군가를 칭찬할 나이임에도 칭찬 듣고 기분이 좋아지는 걸 보면 '나잇값 하는 일이 참 어려운 인간'이라는 게 맞는가 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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