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석이 만난 사람

[조영석이 만난 사람⑤] 이강래 맥지청소년사회교육원 이사장

입력 2021.05.06. 15:15
어둠과 절망 속 부적응 청소년
치유·회복시켜 사회로 돌려보내
1986년 ‘최혜자 정신’으로 설립
순수 시민단체 이자 대안교육기관
정부·지자체 재정 도움 없이 운영
이강래 맥지청소년사회교육원 이사장이 지난달 21일 광주시 동구 맥지청소년 사무실에서 무등일보 시민기자와의 인터뷰를 갖고 있다. 임정옥기자 joi5605@srb.co.kr

"미래 동량들 올바로 키워내는 것, 내 길이라 생각"


(사)맥지청소년사회교육원(이사장 이강래)에서는 학교나 사회부적응 청소년과 비행청소년 등 어둠과 절망 속에서 살고 있는 청소년들을 데려와 치유하고 회복시켜 사회의 일원으로 내보내는 일을 하고 있다. 불순물이 약간 섞인 물들을 한데 모아 본래의 물로 정수한 뒤 수로를 통해 각 가정으로 보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물 대신 청소년 일 뿐이다.

1985년 '가장 많이 베푸는 사람이 가장 값진 것을 얻는다'는 '최혜자(最惠者)정신'으로 창립했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적 도움 없이 후원기업과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되는 순수 시민단체이자 대안교육 기관이다.

진학이 필요한 청소년에게는 진학교육을 하고, 취업이 필요한 청소년에게는 취업교육을 하는 등 본인의 적성과 희망을 최우선 존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2019년부터 시작한 '키퍼(Keeper)둥지 운동'은 광주에서 발아돼 서울, 전주, 김제, 군산 등 전국으로 확산 중이다.

한국청소년영화제도 지난 1999년 처음 시작해 올해까지 23회째 이어오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미혼모와 가출청소년, 청소년성매매, 게임중독 등을 소재로 한 영화를 제작해서 청소년 관련 기관과 학교 등에 무료로 배포해 오고 있다. 올해도 학교폭력을 주제로 한 '예쁜 상처'라는 영화를 제작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아직 상영하지 못하고 있다.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조선대학교 임시학생회장으로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원광대학교 이강래 명예교수가 이사장을 맡고 있다.

광주시 동구 무등중학교 인근에 위치한 5층 건물의 (사)맥지청소년사회교육원(이하 교육원)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대학 총학생회장으로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다. 대체로 정치권으로 진출하는 경향이 많은데 청소년 문제에 천착한 이유가 있는가.

"그 시절의 정치에서는 자기 명예나 욕심 이외에 어떤 가치를 찾을 수 없었다. 주변의 집요한 유혹이 있었으나 정치보다는 미래의 동량들을 올바로 키워내는 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정이 해체된 어린이들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구제하자'는 데서 출발했다. 대학시절 학내 동아리였던 맥지(麥志)회원들과 함께 뜻을 모아 1985년 처음 시작했던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교육원의 이념이 최혜자(最惠者) 양성이다. 최혜자가 무엇인가.

"베풂으로서 최고의 보람을 얻는다는 정신을 체득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이웃의 아픔이나 무지, 빈곤 등을 자기 것이라 여길 뿐만 아니라 사회병폐 또한 개인 차원이 아닌 구성원 모두의 잘못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그럴 때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시민민주주의와 인본주의를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원 이름의 '맥지(脈志)'도 보리처럼 밟힐수록 강해져서 어떤 어려움과 역경도 이겨내자는 의미다. 모두 우리가 만든 조어다. 현재는 국어사전에도 없지만 언젠가는 실리지 않겠는가(웃음)."


-실적을 정량화 할 수는 없겠지만 교육원을 다녀간 청소년은 몇 명이나 되는가.

"2001년에 교육원을 열었는데 지금껏 1만5천여 명의 청소년이 다녀갔다. 이중 800여 명가량이 졸업해서 취업하거나 상급학교에 진학했으니 연 평균 40명 정도 될까 싶다. 안타깝지만 나머지는 도중에 다시 뛰쳐나갔다. 졸업한 청소년보다 중도에 포기한 아이들이 아픈 손가락으로 남아 있다."

이강래 맥지청소년사회교육원 이사장이 지난달 21일 광주시 동구 맥지청소년 사무실에서 무등일보 시민기자와의 인터뷰를 갖고 있다. 임정옥기자 joi5605@srb.co.kr

-청소년 문제에 평생의 열정을 쏟게 된 데는 혹시 청소년 시절에 겪은 자신의 경험 때문인가.

"글쎄다. 고등학교 시절 1학년만 다니고 2~3학년은 결석한 날이 출석한 날 보다 많았다. 사자체험을 위해 교통사고 사망 현장에 거적을 깔고 누워 자기도 여러 번 했고, 한 밤중에 공동묘지를 드나들었는가 하면, 나를 찾기 위해 무전걸식체험선을 많이 했었다. 또 사찰 인근의 기운이 좋다는 바위에 가부좌를 틀고 기도 하다 다리가 마비돼 쓰러진 적도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선암사 암자에서 3년간 나를 찾고, 신을 찾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으나 신은 얼굴을 내밀지 않더라. 결국 신과의 독대보다는 신의 뜻을 헤아리기로 했다. 어찌 보면 위기 청소년을 돌보며 평생을 보낸 것도 그런 차원이 아닌가 한다."


-그 정도면 문제아가 아니라 기인이라는 표현이 더 적확하겠다.

"간혹 그런 얘기를 듣지만 기인은 아니다. 어떤 분명한 목표를 갖고 그걸 이루기 위한 행동이었지 괘도 없는 무한 이탈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문제아는 아니었다고 생각하는데 주변에서는 그렇게 볼 수 있었겠다."


-교육원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만만치 않는 비용이 들 텐데.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등을 바라보지 말고 우리의 호주머니를 털어서라도 하자'고 회원들의 뜻을 모아 시작했다. 관의 지원은 시민들의 세금이고 이는 자칫 관변활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원칙은 지금도 변함없다. 대담 내용에 다른 것은 빠지더라도 그들이 엄청 고맙다는 말을 꼭 써 달라. 현재의 교육원 건물도 아마 10억 원 정도는 될 텐데 600여 회원과 후원 기업들의 기금으로 구입했다.

회원들 가운데는 아이들 키우다 한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 사랑의 마음이 자신의 자식에서 청소년으로 넓혀진 사람들이다. 언 땅을 뚫고 나오는 보리 싹처럼 아픈 경험이 희망으로 피어나고 있다고 본다."


-'호주머니를 털어서'하면, 가정 살림은 어떻게.

"다행히 아내 서경란(65)이 약국을 운영한다. 민망하지만 평생을 아내에게 빚진 사람이다. 아내가 그런 나를 20년간 버렸다. 한 번도 남편으로서 물질적 역할을 한 적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설거지를 하면서 노래를 흥얼거리더라. 물었더니 '우리 남편이 참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당신이 월급봉투 한 번 갖다 주지 않는다고 흉봤는데 오히려 내가 잘 못했더라. 이제는 당신이 자랑스럽다'라고 하더라. 각시가 철이 든거지(웃음). 그날 아내에게 '정년하고 연금이 나오면 첫 달부터 한 푼도 쓰지 않고 모두 당신에게 주마'라고 약속했다."

그는 '원광대학교 교수로 퇴임한 2년 전부터는 남편 역할도 잘 하고 있다'고 큰소리 쳤다.


-5·18민주화운동 보상금도 전액을 교육원을 위해 사용했다고 들었다.

"자랑 같고, 다른 분들에게 괜한 누가 될 수 있어서 조심스러운 부분이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의 예비검속에 걸려 상무대 영창에 끌려가 45일을 살았다. 그 보상금은 광주시민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고, 마침 위기청소년 돕기 운동을 하고 있어서 모두 그곳에 쓰기로 했다. 보리를 파종하는 마음으로 민주화운동을 했던 22명의 동지들과 함께 5·18 보상금을 모아 무등산 자락에 땅을 사두었다. 당시 3억 원 정도 주고 샀는데 지금은 많이 올랐다고 하더라. 그 땅은 최혜자의 뜻을 이은 후배들이 기개를 떨치는데 기댈 언덕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 아내와 사전에 상의한 일인가.

"상의했으면 아내가 나를 20년 동안 버렸겠는가(웃음). 쉽게 동의하지 않을 것 같아 먼저 일을 저질러 놓고 얘기 했다. 상의하고 반대하더라도 어떻게든 설득했어야 했는데 그때만 해도 젊은 혈기 때문이었는지는 그러지 못했다.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 '성공사례'라는 표현이 상투적이기는 하다. 특별히 기억나는 일 하나만 들려 달라.

"현재 충무로에서 영화조연출자로 활동하고 있는 연재(가명)라는 아이가 있었다. 다섯 살 나던 해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어머니의 지극정성으로 아버지의 부재를 느끼지 못했던 아이였다.

중학교 2학년 시절의 어느 날 학교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왔는데 집에 엄마 신발 옆에 낯선 남자 구두가 한 켤레 더 있더란다. 어머니가 '학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느냐'며 물은 뒤 '우리 연재, 잘 했네~'라고 칭찬해 주실 것을 생각하면서 콧노래를 부르고 왔는데 말이다.

연재는 그날 이후 다시는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학교대신 소년원을 오갔는데 어떻게 하여 교육원에 와서 1년여 넘게 공부한 끝에 고입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그런 연재가 교육원이 운영하는 영상치유 프로그램에 따라 '그날'을 배경으로 자신이 감독과 주연을 맡아 6분 분량의 단편 영화를 찍었다. 제목이 '창살 없는 방에 달이 뜨다'라는 영화였는데 광주 무등극장에서 상영됐고, 한국청소년영화제의 효시가 됐다.

연재가 영화를 계기로 수소문 끝에 어머니를 만나 화해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젊은 시절의 희망을 이제는 많이 이룬 것 같다. 더 있는가.

"위기청소년을 구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80년 동토의 땅에 뿌린 씨앗이 이제 발아하고 있다. 2년 전 새롭게 시작한 청소년 키퍼둥지 운동이 그것이다. 30년 동안 위기 청소년들을 돕기 위한 시민운동을 한다고 하면서도 양말도 벗지 않고 물가에서 쳐다보기만 하는 운동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 반성에서 출발했다.

갈수록 청소년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만큼 전화 상담이나 교육, 검정고시 준비 등에서 벗어나 이제는 직접 물속에 뛰어 들어가 그들을 끌고 헤엄쳐 뭍으로 나와야 할 때란 의미다.

우리가 거점을 이뤘으니 이제는 젊은 후배들이 최혜자 정신을 이어받아 키퍼둥지 운동을 전국화 시키고 활성화 했으면 좋겠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는 '저어된다' 했지만 '5.18광주민주화운동 보상금 전액을 최혜자 정신을 이어갈 후배들을 위해 사용했다'는 말이 인터뷰의 많은 말을 대신했다. 금액이 얼마였는지는 묻지 않았다. 다만 아내와 상의하지 않는 것은 요즘 같으면 이혼사유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은 했다. 인터뷰는 막걸리 잔을 기울이듯 취중진담으로 진행됐지만 그가 정치권으로 진출하지 않은 것이 잘 한 일이라는데 의견이 일치된 것은 '정치하지 그랬느냐'는 우문현답의 결과다. 그의 더 남은 희망인 최혜자의 전국적 확산이 이뤄져 청소년들 앞에 떳떳한 어른이 많아지길 기대했다. 조영석kanjoys@hanmail.net 시민기자

조영석

한때는 '변화된 일상의 기쁨'을 찾았으나 이제는 변함없는 일상이 기적임을 믿는다. '코로나19' 탓일 수도 있으나 정신적 청소년기를 지났다는 말일게다. 격정이 사라진 열정이 편안하고, 인위가 아니어도 아름다움은 볼 수 있음이다. 다만 수렁이 변함없는 일상이 될 수도 있고, 그런 이웃도 있다는 것은 기억하고자 한다. 하지만 깨달은 자의 더딘 실천은 더 슬프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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