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평] 고려인 마을을 다녀와서

@김승휘 변호사 입력 2024.03.17. 17:09


고려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의 붕괴 이후 구소련 연방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는 한민족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약 5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 고려인들은 대부분 사할린 및 러시아의 극동지방, 중앙아시아, 발트3국 등에 거주하고 있다.

한민족인 고려인은 어떻게 사할린, 러시아의 극동지방뿐만 아니라 머나먼 중앙아시아, 심지어는 발트 3국까지 가서 살게 되었을까? 그곳에는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가 들어 있다.

19세기말 조선은 세도정치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지역사회의 적극적인 후원 하에 이루어진 홍경래의 난을 필두로 한 수많은 민란이 당시의 상황을 웅변한다.

학정과 수탈에 자연재해까지 더해지자 연해주에 접한 국경지역에 거주하던 조선인 중 일부가 살기 위해 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이주했고, 1869년부터 1874년까지 조선의 북부에서 대흉년이 발생하자 이 같은 상황은 더욱 가속화된다. 1897년의 러시아의 센서스에는 당시 러시아 내에서 우리말을 사용하는 사람의 숫자가 26,000명을 넘는 것으로 나타난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연해주의 조선인 사회는 한국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안중근은 연해주에 본거지를 두고 국경을 넘어 한반도로 들어와 일제 군대와 싸우는 방식으로 무장 독립항쟁을 벌이기도 했고, 연해주에서 사업가로 큰 성공을 거둔 조선인 최재형의 도움을 받아 이토오 히로부미를 사살했으며, 홍범도 역시 연해주를 기반으로 일제를 상대로 무장 독립항쟁을 벌였다.

3.1 운동 후에는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연해주에 대한 국민의회라는 임시정부가 수립되기도 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대첩에서 패배한 일제는 무장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없애겠다는 목적으로 정규군을 투입하여 간도 지역의 수많은 조선인을 학살하고 민가와 학교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간도참변 또는 경신참변이라 불리는 이 만행을 견디지 못한 독립군은 연해주로 이동한다. 그리고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 무장세력인 적군의 일원이 되어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을 돕기 위해 참전한 일본군과 싸우는 방식으로 무장 독립항쟁을 이어간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의 영웅 홍범도 장군 역시 적군의 일원이 되어 일본군과 싸운다.

얼마 전 위와 같은 홍범도 장군의 행적을 두고 홍범도 장군이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공산당인 북한정권과 싸우는 국군 장교를 육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육군사관학교에서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철 지난 주장을 하는 분들에게 진정으로 홍범도 장군이 독립항쟁을 벌이기 위해 가입한 공산당이 왕정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현재의 북한정권과 같은 이념의 정당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일제에 맞선 무장 독립항쟁의 중심 역할을 했던 연해주의 한인들은 1937년 소비에트 연방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중앙아시아 등으로 이주하게 된다. 위 결정의 서두에는 '원동지방에 일본 첩자들이 침투하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 연해주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는 목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침략하자 일본과 소련 간에 전면전이 일어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자 소련은 일제에 대항하여 무장 독립항쟁을 전개해 온 연해주의 한인들을 일제의 첩자로 보거나 그들에게 협력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으로 의심하고 이들을 일본과의 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있는 지역인 연해주에서 머나먼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시켰던 것이다. 강제이주 과정에서 연해주 지역의 대표적 무장 독립운동가인 '백마 탄 장군 김경천' 등이 일제의 간첩이라는 이유로 희생당하기도 하는 등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고려인들의 중앙아시아 이주 후 약 10년간 소련은 고려인들이 우리말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으나, 그 후에는 금지가 풀려 우리말 사용이 가능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어 교육을 통해 소수민족을 동화시키려고 하는 소련의 정책, 자녀 세대의 출세를 원하는 부모 세대의 러시아어 교육 장려 등의 영향으로 3세대 이후의 고려인은 우리말을 거의 사용하지 못한다.

현재 연해주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들은 모두 모두 중앙아시아로 갔다가 소련이 해체되면서 이주제한이 풀리자 다시 돌아온 사람들이다. 그들이 소련 해체 후 돌아갈 장소를 한반도가 아니라 연해주로 택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자신들이나 조상들의 고향을 한반도가 아니라 연해주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던 중 고려인들 중 일부가 1998년경부터 광주 광산구 월곡2동에 자리를 잡았고, 현재는 그 숫자가 4,500여명에 이르게 되었다. 그 후 월곡2동은 고려인마을로 불리게 되었다. 지난 1월 26일 광산구 월곡2동에 위치한 고려인 마을에서 노인돌봄센터 개소식이 있었다. 그 곳에 서 1998년부터 고려인들을 위한 사목을 해 오신 이천영 목사님과 함께 점심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이목사님에 따르면 대부분의 고려인들이 우리말이 서툴러서 한국으로 귀화를 하고 싶어도 한국어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정해진 기간 동안 한국에 머물렀다가 다시 출국을 했다가 다시 고려인 마을로 돌아오는 과정을 반복해야만 한다고 한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풍요로움은 풍찬노숙하는 간난신고를 견디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민족의 운명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고려인들의 조상들로부터 발원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고려인들은 우리 민족의 일원이다. 고려인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무엇인지 돌아보아야 한다. 마을을 벗어나면서 근처 공원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에 들렀다. 일제와의 무장 투쟁에서 누구보다도 당당했을 장군의 흉상마저도 그 날은 쓸쓸해 보였다. 을씨년스러운 날씨 탓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김승휘 변호사

슬퍼요
0
후속기사 원해요
1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

댓글0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