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평] 좋은 시간, 나쁜 시간

@정지아 소설가 입력 2023.09.17. 18:52


한 독자가 물었다. 슬럼프가 있었느냐고. 슬럼프를 어떻게 극복했냐고. 슬럼프를 겪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으랴. 당연히 여러 번 있었다. 슬럼프가 하도 길어 내 인생 자체가 슬럼프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글로만 국한하자면 "빨치산의 딸"을 쓰고 난 뒤 오래도록 글을 쓰지 못했다. 성장기 내내 나를 짓눌렀던 이야기를 글로 토해놓고 나니 이제 무엇을 써야 할지 막막했다. 무엇보다 뜻하지 않은 세간의 관심이 문제였다. "빨치산의 딸"은 말 그대로 실록이다. 부모님과 주변 동료 몇 분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적었을 뿐이다. 내 상상력이나 문학적 재능이라곤 담길 여지가 없었다. 담겼다면 묘사 정도?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내 재주라 착각했다. 그게 제일 두려웠다. 이제 진짜 내 소설을 써야 할 텐데 기대에 못 미치면 어떡하나, 제대로 못 쓰면 어떡하나 중압감이 짓눌렀다. 중압감 때문인지 글이 써지지 않았다. 몇 년 동안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사 년인가 오 년 만에 처음으로 중편소설을 썼다. 그 사이의 내 삶이 고스란히 반영된 소설이었다. 어느 출판사의 올해의 소설인가로 선정되기도 했지만 스스로 생각건대 좋은 소설이 아니었다(훗날 첫 소설집을 낼 때 당연히 이 작품은 싣지 않았다). 또 오래도록 쓰지 못했다.

지금껏 애들을 가르치며 밥벌이를 하지만 내가 대학원에 진학한 것은 교수가 될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 다시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막막해서 대학원에라도 가면 뭔가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다시 무엇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뒤늦게 대학원에 다니며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방송일도 해봤고, 출판일도 해봤다. 고등학교 교사도 되어봤다. 어디서도 나는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방송일이나 출판일을 하기에는 대중적 감각이나 협동심이 부족했고, 교사가 되기에는 조직생활을 견뎌낼 인내심이 부족했다. 번번이 나는 소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소설에 대한 열망이 남달라서가 아니었다. 그나마 소설밖에는 재주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찌어찌 등단을 했다. 많은 작가가 등단만 하면 인생이 달라질 거라 착각한다. 나 또한 그랬다. 등단을 했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청탁은 쉬 들어오지 않았고, 내 작품이 좋다는 확신도 들지 않았다. 다른 일에는 재능이 없음을 확인했던 터라 꾸역꾸역 썼다. 꾸역꾸역, 이라는 말 외에 어떤 말로 계속해서 쓸 수밖에 없던 그 시절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 꾸역꾸역, 이십여 년의 세월이 지났다. 쓰는 것밖에 할 수 없어서 계속해서 썼고, 계속해서 팔리지 않았고, 늘 그 자리가 그 자리 같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더 나은 소설을 쓰고 싶어서 발버둥치기도 했다. 그러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썼다. 어떤 기대도 없었다. 내 이전 소설에서 획기적으로 달라진 것도 아니었다. 늘 쓰던 소재, 늘 천착했던 주제였다. 진지했던 톤이 다소 가벼워졌다는 게 달라졌다면 달라진 점이었다. 그런데 팔리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도 이 책이 왜 팔리는지 정확하게 모르겠다. 어쩌면 누구에게나 인생은 이러하지 않을까? 뜰만 한 명확한 무엇이 있어서 뜨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개는 하던 대로 했는데 느닷없이 뜬다. 내가 그랬다. 뜬 이유를 생각하다 포기하고 나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의 겨울은 길었을 뿐이라고. 그 겨울이 지나 이제 봄이 온 거라고. 겨울은 슬럼프인가? 혹독한 추위가 있어야 병균이 죽고 이듬해 새로운 생명들이 싱싱하게 소생한다. 사람의 시간도 그러하다. 누구에게나 좋은 시간이 있고 나쁜 시간이 있다. 사람을 키우는 것은 좋은 시간이 아니다. 좋은 시간은 나쁜 시간에 얻어진 결과물을 즐기는 시간일 뿐이다. 그래서 좋은 시간들은 뜻밖에 기억에 잘 남지 않는다. 즐거운 시간은 순식간에 즐겁게 지나간다. 나쁜 시간은 좀처럼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영원할 것 같고 죽을 것 같지만, 그 시간들이 나를 키운다. 내가 구례에서 견뎌낸 시간들이 나를 키웠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그 결과물일 뿐이다. 고통의 시간을 지내고 있다면 그 시간이 지금 당신을 키우고 있음을 기억하라. 그러면 견디기 한결 수월할 테니. 정지아(소설가)

슬퍼요
0
후속기사 원해요
0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

댓글0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