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평] 시시하고 사소한 소망

@정지아 소설가 입력 2023.05.07. 13:19

우리 어머니, 나 아주 어렸을 적에, "저 겁 없는 년, 세상에 무서울 것 없는 년.", 그렇게 나를 불렀다. 뱃가죽이 아프도록 뻥뻥 차대기에 아들인 줄 알았더니 고추도 달지 않은 채 세상으로 나온 나는 높은 나무만 보면 기어이 기어오르고, 높은 바위에 서면 기어이 뛰어 내렸다. 세상에 무서울 것 없던 내가 언젠가부터 무서운 게 생겼다. 아버지를 보내고도 울지 않았는데 어머니 가실 생각만 하면 벌써 아찔하다.

우리 어머니, 마흔에 나를 낳았다. 둘도 셋도 아닌, 늦둥이 외동딸이었다. 매 끼 따순 밥을 해먹였고, 겨울이면 꽁꽁 언 신발을 가슴에 품었다 내게 신겼다. 환갑 바라보는 오늘날까지 어머니에게 어디 계집애가, 이런 소리 한 번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한다면 어머니는 뭐든 온 마음으로 응원했고, 내가 하는 그 일이 곧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일이었다. 내가 곧은길만 걸어온 것은 결단코 아니다. 고등학교 등록금을 탈탈 털어 세계명작 한 질을 떡 하니 사기도 했고, 몸 약한 어머니가 겨우내 손이 부르트도록 말린 밤을 까서 마련한 등록금을 엄한 데 쓰고는 다시 손을 내밀기도 했다. 그렇게 철딱서니 없는 딸이었다. 여느 딸자식보다 말썽 많고 탈도 많았지만 어머니는 그게 다 크게 될 징조라고 오히려 대견스러워했다. 다른 부모 다 말린다는 문학을 하겠다 할 때도 어머니는 내 그럴 줄 알았다고, 어려서 그렇게 책을 좋아하더니 작가 되려고 그랬나보다고, 쌍수 들어 환영이었다.

어머니와 밖에 나가는 게 나는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젊어 별명이 꿀 먹은 벙어리였다던 어머니는 당신 딸이 어려서부터 얼마나 똑똑했는지, 얼마나 속이 깊었는지, 요즘엔 또 얼마나 잘 나가는지, 침이 마를 새라 자랑을 늘어놓았다. 남보다 잘난 적도 없었고, 지금 역시 잘난 것 하나 없는 나는 어머니의 칭찬이 늘어지는 동안 그저 쥐구멍에 숨고만 싶었고, 제발 그만하라고 무안을 주기 일쑤였다. 어머니의 딸 자랑은 세월과 함께 쑥쑥 자라 지금은 어머니 생활의 대부분이 딸 자랑이다. 어머니는 늙어가며 딸 자랑이 늘고 그만큼 딸 걱정도 늘고 잔소리도 는다. 무뚝뚝한 나는 어머니의 말을 냉정하게 끊기 일쑤다.

"다섯 번째 듣는 거야."

"너는 그걸 다 세고 있었냐?"

어머니는 그런 나를 늘 서운해한다. 언젠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으나 피 섞인 딸보다 백 배는 나은 아는 언니가 가만히 나를 나무랬다.

"자네, 어머니 가시고 나면 가슴을 칠 거네. 나는 안 그랬가니. 어머니 말끝마다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그렇게 하냐고 면박을 주었는데, 가시고 나니 그거이 젤 마음에 걸리대."

당신 딸이 남에게 조금이라도 안 좋은 소리 듣는 게 어머니는 또 싫었던 모양이다. 아니여, 쟈가 겉으로는 무뚝뚝한 것 같애도 월매나 정이 많은디, 또 딸자식을 두둔하고 나섰다. 그게 어머니다.

언젠가 이상한 느낌에 잠이 깼다. 어머니가 가만히 내 손을 만지고 있었다. 아버지 닮아 잔정이 없는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손 한 번 잡아본 적이 없고 조곤조곤 사소한 말 한 마디 나눠본 적이 없다. 가만 생각해보니 어머니 손도 잡아보지 않았다. 찬바람 씽씽 도는 딸이 어려워 나 맨정신일 때는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하다가 어머니는 내가 자는 새, 내 손을 무슨 보물단지나 된 양 한참이나 어루만지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 내 소망은 참으로 시시하고 사소하다. 맨 정신에 어머니 손 잡기, 똑같은 말이라도 열 번 백 번 처음 듣는 말인 듯 고개 주억거리며 들어주기, 어머니와 수다 떨기. 이 사소한 것들조차,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도 다 할 수 있는 별 것 아닌 이런 것들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는 걸 보니 나는 아직도 젊었거나 철이 덜 든 모양이다. 어머니의 마음 속, 모래 알갱이처럼 얽혀 있을 자잘한 아픈 기억들까지 다 세상 밖으로 꺼내게 하고, 한 치 아픔 없이 가시게 하는 것이 요즘의 내 소망이다. 소설의 출발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향한 연민이다. 어머니의 마음조차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내가 소설이라니. 쉰아홉, 나이가 무색하다. 정지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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