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평] 나는 과연 옳았을까?

@정지아 소설가 입력 2023.01.15. 13:27

일 년에 몇 번쯤 까맣게 잊었던 X가 생각난다. X는 고등학교 일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나는 문예반이었고 그 친구는 아니었다. 5월에 교내 백일장이 있었다. 1학년은 사생대회, 2학년은 백일장에 참여해야 하는데 문예반만 예외적으로 백일장에 참여해도 좋다고 했다. 한 번도 말을 나눠본 적 없는 X가 백일장 전날 내게 물었다. 자기도 백일장에 참여해도 되냐고. 문예반 담임교사가 흔쾌히 허락했다.

다음날, 같은 반 아이들은 야외 사생대회에 가느라 반이 텅 비었다. 우리는 글 제목이 발표된 뒤 빈 교실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갑자기 X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자기 집에 같이 가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생각이 잘 안 떠올라서. 집에 가면 내가 전에 쓴 글들이 있으니까 가져다 참고하려고."

별생각 없이 학교 근처의 X 집에 함께 갔다. 잠시 기다리라던 X는 몇 권의 교지를 들고나왔다. 경기고 교지는 아직도 기억이 난다. 지금은 잊어버린 어느 여고의 교지도 있었다. 그날 그 아이는 시 장원을 받았다.

X는 문예반에 들어오고 싶어 했다. 선배 언니들 앞에서 면접을 봤다. 나도 그런 과정을 거쳐 문예반원이 되었다. 웬일인지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는데도 그 아이는 문예반에 들어오지 못했다. 돌이켜보니 문예반 선배들의 권력이 막강했다.

얼마 뒤. 운동장에서 조회를 끝나고 들어가는 길이었다. 앞서 걷던 X가 문예반 흉보는 소리가 들렸다. 자기가 장원을 받았으니 문예반 별 볼 일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 말에 자존심이 상했다(그게 뭐라고! 그 시절에는 글 잘 쓰는 게 대단한 거였고, 특히 그 학교 문예반은 주변 학교들 사이에서 대단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열여섯의 나는 그 문예반 소속이라는 게 자랑스러웠던 모양이다).

기분이 상해서 그간의 사정을 문예반 선배들에게 일러바쳤다. 내 얘기를 듣던 한 선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학교 교지를 가져왔다고? 어느 학교인데?"

그때는 어느 학교 교지인지 선명하게 기억했고, 선배들은 기어이 그 교지를 찾아, X가 연세대학교 백일장에서 장원 받은 작품을 조사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베꼈다는 것을 밝혀냈다. 불행히도 장원을 받은 X의 시가 실린 우리 학교 교지는 이미 다른 학교에 우편으로 보내진 뒤였다. 학교의 명예를 추락시킨 죄로 X는 유기정학을 받았다. 나는 곧 시골 학교로 전학 갔다.

그 아이를 까맣게 잊었다. 새 학교에 적응하는 것만 해도 버거웠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아이 꿈을 꾸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매번 X는 너 때문에 인생을 망쳤노라고 나를 힐난한다. 아직도 비슷한 꿈을 꾼다.

얼마 전 우연히 그 학교 문예반 선배를 만났다. 조심스럽게 그 아이 소식을 물었다. 다른 일로 정학을 몇 번 더 받고 결국 학교를 떠났다고 한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선배들에게 문예반 별 볼 일 없다던 말만 옮기지 않았더라도 그 아이의 인생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물론 X의 행위는 옳지 않았다. 하지만 열일곱 살이었다. 문예반이랍시고 우쭐대는 우리들이 그 아이는 부러웠을 수도 있다.

실수나 잘못에 대한 적절한 대가는 어떤 것일까? 모르겠다. 어떨 때는 잘못을 했으니 마땅한 벌을 치른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어떨 때는 어린 날의 실수에 너무 가혹한 벌을 받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른 일로 정학을 또 받았다니 내가 아니었어도 그런 길을 걸었을 것도 같다. 그렇다 한들 내가 벌을 받게 한 장본인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나만 아니었다면 설령 노는 기질이 있었다 하더라도 다른 길을 갈 수 있지 않았을까?

나이 들고 보니 잘못을 했다 할지언정 누군가의 인생을 나락으로 끌어내리는 일에는 몇 번이고 심사숙고하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별 고민도 없이, 그저 자존심이 상한다는 이유로, 선배들에게 고자질했다. 그 아이는 그 일로 일생이 바뀌었는데 나는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열여섯의 일이 아직까지 악몽으로 남은 이유다. 정지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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