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평] 토닥토닥, 올해도 우리 참 잘 살았다

@정지아 소설가 입력 2022.12.18. 13:06

나는 초등학교 오학년 때까지 구례서 살았다. 어린 나는 구례가 싫었다. 대대손손 농사만 짓고 사는 사람들도 답답했고, 어제 본 사람들을 오늘도 보고 살아야 하는 것도 짜증 났고, 걸을 만하면 끝이 나오는 좁디좁은 동네도 싫었다. 사방이 높은 산으로 꽉 막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 시절의 나는 "집 없는 소년"의 주인공 레미처럼 세상을 떠돌며 살고 싶었다. 한뎃잠을 잘지언정 세상의 모든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연좌제라는 것 때문에 빨갱이의 딸인 나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 나는 공자가 제일 싫었다. 공자를 제대로 안 것은 물론 아니고 어디선가 주워들은, '君君臣臣父父子子'라는 논어의 한 구절 때문이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니! 신하로 태어나고 싶어서 신하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왜 주어진 대로 살아야 하는지 어린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빨치산의 딸로 태어났으니 아무것도 되지 말고 납작 엎드려 있으라는 가혹한 세상에 대한 불만이었을 것이다. 연좌제가 폐지되고, 세상을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한 나이가 되고 나서도 나는 저 구절만 생각하면 괜스레 감정이 북받쳤다.

마흔 중반, 구례 내려와 살면서 세상 보는 눈이 변한 모양이다. 어느 날 문득 君君臣臣父父子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임금다워야 한다는 것, 신하다워야 한다는 것은 어린 내가 생각했듯 선을 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임금답다는 게 어떤 건지 이해하는 데만도 누군가는 한평생이 걸릴지 모른다. 겨우 그 의미를 깨우쳐 비로소 임금다워진다 치자. 만 백성을 거느리는 임금이란 자리의 무게는 겨우 내 한 몸, 혹은 내 가족 책임지기도 버거운 범인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지 않을까? 저 논어의 구절은 주제 파악 잘하고 분수껏 살라는 의미가 아니라 각자 제 몫을 제대로 해내야 한다는 의미였던 모양이다. 그리 생각하니 산다는 게 아득해졌다. 환갑이 코앞인데도 내 몫을 제대로 하고 사는 것 같지가 않아서다.

일단 나는 늙은 엄마의 딸이요, 이십 대 아들의 엄마이며, 간혹 책을 내는 소설가이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딸 노릇은 겨우겨우 하고 있는데 암만 생각해도 자식다운 게 뭔지 잘 모르겠다. 늙은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 하루에도 몇 번씩 서운하게 만드니 딸 노릇을 잘하고 있는 성싶지 않다. 엄마 노릇이라고 다르겠는가. 군대 간 녀석에게 얼마 전, 세월 참 빠르네, 제대까지 넉달밖에 안 남았네, 했다가 엄마는 군 인지감수성이 없다는 말까지 들었다. 소설이야 말 해 무엇하랴. 소설 쓴 지 사십 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소설이 뭔지 잘 모르겠다. 소설이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선생 노릇인들 제대로 하겠는가. 君君臣臣父父子子의 경지를 죽기 전에 깨우치기나 하면 다행이지 싶다.

그러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공자의 경지에 오르지 못하면 또 어떤가. 사람으로 태어나 제 한 몸 먹여 살리는 것만 해도 기특하다. 세상에는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며 먹고 사는 인간도 숱하고, 평생 부모 등 처먹고 사는 자식도 숱하니까. 남을 해하지 않는 오롯한 노동으로 남에게 신세 지지 않고 살면 그것으로 족하다. 내 한 몸에 그치지 않고 자식이나 부모, 내 핏줄까지 먹여 살리고 있다면 참으로 훌륭한 인생이다. 더 나아가 내 가족이 아닌 타인을 먹여 살리거나, 사소한 도움이라도 주고 있다면 훌륭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성인(聖人)이 별 거랴. 제 한 몸 먹고 살기도 바쁜 세상에 남까지 두루 살피는 자가 곧 성인이다.

마음 고쳐먹고 보니 딸 노릇도 엄마 노릇도, 무엇 하나 변변치 않은 내가 곧잘 살았다. 최소한 나와 엄마와 아들, 고양이 네 마리와 개 두 마리까지 먹여 살렸다. 이순이 낼모레인데 소설이 뭔지도 모른다고 울적해할 게 아니다. 우리는 늘 자신을 왜 더하지 못 했냐고, 왜 이 정도밖에 못 했냐고 끊임없이 다그친다. 특히 연말연초에는 더욱더.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서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번 연말에는 자신을 다그치는 대신 기특하다고, 나 먹여 살리고 가족 먹여 살리느라 수고했다고, 맛있는 삼겹살이나 한 근 사줄 일이다. 정지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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