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평]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의 구분

@공진성 조선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입력 2022.12.11. 15:36

요즘 뒤늦게 드라마 하나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2012년 방영을 시작한 이 드라마는 작년까지 무려 일곱 개의 시즌을 제작할 정도로 많은 인기를 일본에서 얻었다. 주인공은 천재적 수술 실력을 갖춘 외과 의사이다. 그는 대학병원에 정규직으로 채용된 의사가 아니라, 특별한 계약을 맺고 일시적으로 자신의 의료 기술을 제공하는 프리랜서 의사이다. 어려운 수술을 성공시키고 나면 매니저가 나타나 거액의 요금을 병원장에게 청구한다. 이 프리랜서 의사가 병원과 계약을 체결할 때마다 하는 말이 있다. "하지 않습니다!" 드라마 속 병원에서 의사들이 흔히 하는 온갖 잡일을 자신은 하지 않는다고 당당히 선언한다. 그렇게 분명히 선언했지만, 주위의 의사들은 그들이 하는 온갖 일을 주인공에게도 하라고 계속 요구한다. 그때마다 주인공은 말한다. "의사 면허가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의 이 말은 의사가 하는 일의 본질적인 부분과 비본질적인 부분을 구분하며,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의료 행위의 본질임을 지적한다. 본말이 뒤집혀 의사들이 치료와 무관한 일, 예컨대 다이묘의 행렬처럼 무리 지어 회진하거나, 교수의 논문 작성을 위해 대신 자료 조사를 하거나, 친목을 위해 밤마다 술자리를 가지거나, 상사의 불륜을 은폐하기 위해 거짓말하는 등의 일에 열과 성을 다하는 부조리한 현실을 드라마는 비판한다. 주인공의 태도가 당연히 모두에게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불필요해 보이는 그 많은 일에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주인공의 태도를 못마땅해한다. 그들에게는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이 그렇게 무 자르듯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685/86년 망명지 네덜란드에서 영국 철학자 존 로크는 '관용에 관한 편지'를 썼다.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가 낭트칙령을 폐지하고 가톨릭 절대주의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로크는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구분하고 비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서로 관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크의 생각에는 영혼의 구원에 필수적인 것만이 본질적인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비본질적인 것이다. 그런데 종교적 분쟁의 대부분이 한심하게도 이 비본질적인 것을 둘러싸고 벌어진다. 그래서 로크는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하루빨리 정신 차리고 본질에 집중해야 하며 비본질적 사안에 대해서는 설령 자기 맘에 들지 않더라도 참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크의 주장은 정교분리의 원칙으로 발전했고 100년 뒤 미국의 헌법에 반영됐다. 정치와 종교, 국가와 교회의 구분은 당연한 것 같지만, 사실 구분은 쉽지 않다. 두 영역의 경계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도 그렇고, 두 영역 모두 우리의 삶 전체를 포괄하려고 하기 때문에도 그렇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보이지도 않고 구분하기도 쉽지 않은 영역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구분하려고 한다. 그래야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본질이다. 비본질적인 것에 집착할 때 우리는 서로 싸우게 되고 상대의 자유를 억압하게 되지만, 본질적인 것에 집중할 때 종교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자유로울 수 있다. 서로 다른 종교를 믿으면서도 같은 국민일 수 있고, 서로 다른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서도 같은 교회에 속할 수 있다.

나도 이제 나이가 오십 줄에 접어들어서인지 학생의 복장이나 태도가 눈에 거슬릴 때가 있다. '모든 것이 교육의 일환'이라고 주장하며 잔소리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반대로 복장이나 태도가 맘에 드는 학생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요소를 성적 평가에 반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비본질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그저 교수인 나에게 잘 보여 좋은 성적을 얻으려고 하는 학생이 있다면 오히려 꾸짖어야 할 것이다.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대통령이 기자의 태도를 핑계로 취임 후 줄곧 해오던 출근길 약식 기자회견을 중지했다. 백번 양보해 그 전에 국익을 해하는 '오보'가 있었다고 치더라도, 그것이 기자 일의 본질에 충실하다가 일어났다면 결코 억압해서는 안 될 것이고, 나머지 비본질적 요소들은 참아 넘겨야 할 것이다. 자기가 맡은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비본질적 요소에 집중하며, 그래서 또한 남이 하는 일의 비본질적 요소에 집착해 시비를 건다. 공진성 조선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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