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평] 세상이 아직도 살 만한 이유

@정지아 소설가 입력 2022.02.06. 13:26
정지아(소설가)

시간이 쏜살같이 흐른다고들 한다. 옳은 말이다. 태어난 순간 나의 시간은 내 손을 벗어나 쏜 화살같이 달려간다. 겨울이 시작되었나 싶더니 벌써 매화나무에 꽃망울이 맺히려 한다. 요즘 매화나무는 매실을 쉽게 따려고 전정을 하기 때문에 높이 자라지 않는다. 배나무나 사과나무처럼 옆으로 벌어져 있다. 겨울에 보면 배나무인지 매화나무인지 잘 구별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 매화는 여느 나무처럼 위로 자랐다. 매실의 효능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때라 매화나무 있는 집이 드물었다. 꽃의 정취를 즐기는 집에나 한 나무씩 있는 정도였다.

우리 동네 장씨 아저씨 집에 오래된 매화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장씨 아주머니는 간질을 앓았다. 산에 나물 뜯으러 간 아주머니는 발작을 일으켜 산 밑으로 굴렀는데, 하필 막 모 심어 물 찰박찰박한 논에 얼굴을 박고 세상을 떴다. 갓난아이까지 애가 줄줄이 일곱이었다. 아저씨는 죽은 아내를 추모할 짬도 없이 애들 키워줄 새 아내를 얻어야 했다. 가난한 살림에 애가 일곱이라 새 아내들은 일주일도 버티지 못한 채 밤봇짐을 쌌다. 장씨 아이들은 꼬질꼬질한 옷에 누런 콧물을 달고 다녔다. 아흔 가까운 할머니가 있었지만 아이 일곱을 살뜰하게 살피기에는 힘이 모자랐던 것이다.

그 무렵 이웃집 한씨 아저씨가 세상을 떴다. 천애고아로 우리집 종이었던 아저씨는 면천한 뒤에도 동네를 떠나지 않고 품을 팔며 겨우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며 살았다. 한씨 아저씨도 아주머니도 종이었던 시절의 예법이 몸에 익어 어린 우리에게조차 말을 놓지 못했다. 얼굴을 똑바로 보지도 못했다. 허리를 숙인 채 굽신굽신, 어린 나에게 존대하는 한씨 아저씨 내외를 볼 때마다 가슴이 저렸다.

한씨 아저씨 세상 떠난 일 년 뒤, 고향을 찾았다. 대학 졸업을 앞둔 겨울이었다. 장씨 아저씨 집에서 신식으로 파마한 여자가 불쑥 고개를 내밀더니 아는 체를 했다.

"지아 왔는가? 방학이라고 다니러 왔는갑네이."

낭자머리와 한복을 벗어던지고 신식 파마와 몸빼로 치장한 한씨 아주머니를 한참 만에야 알아봤다. 아주머니 뒤로 장씨네 아이들이 도레미파솔라시도 음계처럼 올망졸망한 머리를 드러냈다. 엄마 없다고 동네방네 티 내는 것 같던 누런 코가 쑥 들어가고 바리깡으로 야무지게 민 머리통에서 반짝반짝 윤이 났다.

2월 말, 찐밤을 한 소쿠리 들고 장씨 할머니 집에 갔다. 어머니가 나를 주려고 뒤안에 파묻어놓은 밤은 차디찬 겨울을 나며 조청처럼 달아졌다. 할머니가 변비로 고생한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가 밤을 먹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내 편에 보낸 것이다. 할머니는 대청마루에 엎드린 채 벌거벗은 엉덩이를 높이 치켜들고 있었다. 한씨, 아니 이제 장씨 아주머니가 된 양반은 거기 코를 박고 뭔가를 하는 중이었다. 잠시 뒤 아주머니 손이 할머니 항문에서 쑥 빠져나왔다. 손톱 끝에 밤톨만 한 똥덩어리가 달려 있었다.

아주머니는 그제야 나를 보고 겸연쩍게 웃더니 펌프가 있는 수돗가로 향했다. 손을 씻는 아주머니 머리 위로 긴 매화나무 가지가 뻗어 있었다. 오종종 매달린 꽃송이가 막 우윳빛으로 개화하는 참이었다. 따순 햇살이 그 순간 매화나무에 폭포처럼 쏟아지고, 매화꽃이 앞다투어 피어났다, 는 것은 아마 기억의 왜곡일 것이다. 다만 그 순간 내가 떠올린 한 단어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고결하다.

나의 봄은 아흔 넘은 시어머니의 똥을 파내는 장씨 아주머니와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매화로부터 시작된다. 내 몸을 더럽혀서라도 누군가의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글을 쓰고 싶다는 내 문학론도 한때는 종이었던 장씨 아주머니로부터 시작되었다. 세상에는 이름 없이 살다 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중에는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지만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들이 있어 세상은 아직도 살 만하다.정지아(소설가)

슬퍼요
0
후속기사 원해요
9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

댓글4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