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평]신뢰의 힘, 사랑의 힘

@정지아 소설가 입력 2021.07.11. 15:31

사촌동생 택이, 어려서부터 머리 나쁘기로 동네방네 소문이 자자했다. 마루 끝이 어디쯤인지 가늠도 없이 내처 걷다가 마당으로 굴러 떨어지기를 하루에도 몇 차례, 나비 한 마리 팔랑거리면 하늘만 보고 달리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 또한 수 차례, 이마며 무릎이며 성한 날이 없었다. 게다가 힘은 얼마나 세고 먹는 것 또한 얼마나 밝히는지 일곱 살 무렵부터 고봉으로 담은 어른 밥 한 사발을 뚝딱 해치웠다.

택이가 중학생이 되던 겨울, 영어를 가르쳤다. 하루에 삼십 번씩 써오라는 숙제를 충실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택이는 끝내 알파벳 스물여섯 자를 깨치지 못했다. 시골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택이는 이런저런 공장들을 거치며 연애를 하고 장가를 가고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노동자'라는 말 한마디에 숙연해지던 시절, 내가 만난 택이는 계급의식이라는 건 눈곱만큼도 없는, 노동조합보다 데이트에 관심이 더 많은 철없는 청년이었다. 실망했고 그 후 택이를 거의 잊고 살았다.

간혹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부모님으로부터 택이 소식을 전해 들었다. 명절 날 선물이라고 해준 것이 부모님은 먹지도 않는 쌍화차나 식용유였다던가, 자식 둘 데리고 아직도 전세방을 면치 못하는 녀석이 올 때마다 큰아버지 용돈 하시라고 꼬깃꼬깃한 삼만 원을 주머니에 찔러주었다던가. 어머니는 머리는 나빠도 마음 하나는 고운 녀석이라며, 사람들이 죄 택이를 이용만 하려는 것 같다고 속상해했다. 누가 무슨 일을 부탁하면 이용하려는 줄도 모르고 제 몸 부서져라 일만 한다고.

어느 여름 고향에서 택이를 만났다. 토종닭을 고추장 양념에 재웠다가 개울가에서 같이 구워 먹었는데, 맛있다는 내 말 한마디에 택이는 땀 뻘뻘 흘리며 굽는 족족 내 앞으로 고기를 밀어놓았다. 술안주가 떨어지고 한여름 집에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어 다들 아쉽게 입맛만 다시는 참에 말도 없이 조용히 사라진 택이가 잡어들을 양재기 가득 잡아왔다. 집에 가서 양념거리를 가져오는 귀찮음도 마다 않고, 불을 피우는 번거로움도 마다 않고, 택이는 순식간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매운탕을 끓여냈다.

시골 개울가에서 택이는 한여름 햇살처럼 반짝였다. 알파벳 스물여섯 자를 두 달 넘도록 외우지 못했던 택이가 시골의 산과 들, 계곡에서는 가장 빛나는 존재였다는 걸, 나는 그제야 기억해냈다.

택이를 그렇게 순수하고 맑은 사람으로 키운 건 우리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두 달 동안 알파벳도 외우지 못하는 손자를, 천하장사처럼 먹을 것만 밝히는 손자를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으로 대했다. 멍청하다고 늘 욕만 먹던 택이는 읍내 중학교로 진학하면서 어둠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 많이 먹는 만큼 덩치 크고 힘이 좋았던 탓이다. 힘 좋다는 칭찬이 택이에게는 난생 처음 듣는 칭찬이었고, 그 칭찬에 들떠 비행청소년이 되었다.

어느 겨울날, 버스도 다니지 않던 고향집 사립문을 한밤중 누군가 급히 두드렸다. 택이였다. 덩치가 산만 했던 택이는 무슨 일인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짝은 아배. 나 잠 살레주씨요."

졸업을 앞두고 택이는 깡패조직으로부터 임무를 받았다. 누군가를 칼로 찌르라는 거였다. 한밤중 담을 넘어 그 누군가의 배에 칼을 찔러넣었는데, 칼이 살에 닿는 순간 택이는 할머니가 떠올랐다고 했다.

"할매가 환허게 웃고 있드랑게요. 나가 사램을 죽일라는디..."

그 길로 택이는 어둠의 세계를 떠났다. 택이를 환한 빛으로 인도한 것은 계산 빠르고 냉정한 내가 아니었다. 나만큼 합리적이었던 아버지도 아니었다. 택이 무슨 짓을 하든 그저 손자라서 믿고 사랑한 할머니가 택이를 빛의 세계로 인도했다. 할머니의 가없는 신뢰와 믿음은 나 또한 변화시켰다. 참으로 냉정했던 나는 이제 신뢰의 힘, 사랑의 힘을 믿는다. 세상에 나쁜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은 그들이 태초부터 나빠서가 아니다. 누구도 그들을 믿고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좋은 소설가가 되기보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라도 사람을 믿고 사랑하고 그들이 평안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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