㉙고령역<상> 살아있는 역사관 고령

[광주에서 대구까지 미리 달려본 달빛내륙철도] ㉙고령역<상> 살아있는 역사관 고령
달빛내륙 철도는 1천600년 전 찬란한 대가야의 땅 경북 고령군에 도착했다. 고대 도시 대가야의 도읍지 고령 땅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백두대간의 동쪽과 낙동강 서쪽을 선점한 대가야는 일찍이 농경문화가 발달 한 곳이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종자 한 말을 뿌리면 열두 말의 생산이 가능한 곳이다"고 고령의 생산성을 주목했다. 오늘날 고령은 대가야 흔적을 찾아 그들의 삶과 궤적을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대가야 도읍인으로서 고령군민의 자부심은 크고도 깊다. 달빛 내륙 철도는 잊힌 왕국 대가야를 찾아 역사 여행을 떠난다.
◆ 잊힌 왕국 대가야의 땅 고령군
고령은 대가야국의 도읍지다. 대가야는 후기 가야 연맹의 맹주로 고령지방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한 전기 가야 연맹이 해체된 후 이들 세력이 고령지방을 중심으로 대가야를 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때 대가야는 고구려·신라·백제 삼국 관계에 영향을 줄 정도로 강성했으나 562년(진흥왕 23) 신라에 복속되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
한때 가야는 잊힌 왕국이었다. 고령은 잊힌 왕국 가야를 복원하는 데 온 힘을 다했다.
그 결과 오늘날 고령하면 가야왕국의 중심지이자 경북 문화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고령은 조선 태종 13년 현으로 승격됐고 1895년 고령현이 고령군으로 개칭돼 오늘에 이른다.
현재 1읍 7면으로 광주~대구간 고속도로가 군의 동서간을 관통하고 있어 경북 내륙 교통 중심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 대가야는 어떤 나라인가
고구려·백제·신라가 한반도를 지배하던 삼국시대. 대가야는 삼국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든 생존해야 했다. 삼국의 틈바구니에서 가야는 고립되는 운명을 면치 못했다. 4~5세기 전성기를 넘기면서 점차 삼국과의 경쟁력에 밀려난 것이다. 하지만 높은 문화 수준과 제철 기술의 발달로 생활 수준만큼은 삼국에 뒤지지 않았다.
최근 발굴 성과를 보면 화려한 문명국의 위치를 여실히 보여준다.최근발굴된 대가야 유적과 유물로 미뤄 볼 때 대가야는 교과서 한쪽을 차지하는 은둔의 왕국이 아니다. 그들이 남긴 왕관과 건축 기술, 귀족과 서민들의 생활상은 고도 문명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가야인들은 벽돌과 기와를 사용했으며 서민들은 마을을 이뤄 농사를 지었고 오곡을 주식으로 비단옷을 입고 살았다. 물고기를 잡고 산짐승을 사냥하고 목축도 성행했다. 대가야 무덤에서 출토된 곡식과 뼈 등을 통해 보면 삶의 질도 상당하다. 1천600년 전 문명국 조건을 대부분 충족한다.
가야는 건국 신화도 존재한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건국 신화를 보면 "가야 산신과 하늘신 사이에 태어난 두 형제 가운데 형은 대가야 시조인 이진아시왕이고 동생은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이다"고 전한다. 신중동국여지승람(1530년)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여섯 개의 황금알이 깨어 여섯 명의 동자가 됐는데 가장 먼저 깬 동자가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됐고 나머지 다섯 동자가 다섯 가야의 왕이 되었다"는 설을 전파한다. 어찌됐든 초기 육가야의 맹주였던 금관가야의 대를 이어 가야가 신라에 복속될 때까지 대가야가 고령 땅을 중심으로 크게 번성한 신화 속 왕국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대가야 최고·최대 위용 '지산동 고분군'
고령 대가야의 지산리 고분군은 가야 최고·최대 고분군이다. 대가야의 강대함을 보여주는 가야의 위대한 유산으로 사적 79호로 지정됐다.
대가야읍 뒤편 주산 능선을 따라 700여기 고분군이 옛 모습 그대로 펼쳐진다. 2.5㎞ 능선에는 지름 20m가 넘는 5기의 대형고분부터 중소형 고분(10~15m), 5m 이하 소형고분에 이르기까지 산 위에서 아래로 고루 분포됐다. 일반 백성들의 무덤까지 합치면 수만기에 달할 것이라고 하니 가히 '대가야 최고·최대 고분군'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능선 아래쪽 고분은 대가야 초기 왕과 귀족들이 자리한다. 위쪽으로 갈수록 대가야 세력이 번창했던 5~6세기 왕과 귀족들이 차지한다. 멀리서 보면 둥근 봉우리들이 점점이 박힌 무슨 물방울 같아 보인다. 고령군은 외형이 확실하고 비교적 규모가 큰 고분에 번호를 붙여 관리하고 있다. 지산리 고분군은 세계 문화유산 등재를 눈앞에 두고 있다. 가야의 고고학적 가치가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날이 가까워오고 있다.

◆지산리 고분군이 보여주는 대가야의 국력
지산리 고분들은 갖가지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그중 32호는 금동관출토관으로 유명하다. 남쪽 제일 큰 규모 44호분은 우리나라 최초 순장묘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44호분은 높이 6m에 봉분 지름만 27m에 달한다. 지산리 나머지 대형 고분들도 대부분 왕릉과 귀족급 무덤으로 추정된다.
1977년부터 경북대와 계명대 발굴팀이 발굴하면서 지산리 고분에서는 금동관을 비롯 금·은·옥 장신구, 갑옷과 마구류 등 수많은 유물이 발굴돼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규모와 질은 고고학적 가치를 보더라도 금세기 최고 성과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1천600년 전 사라진 대가야 왕국의 면모가 속속 모습을 드러내 우리에게 민족적 자부심을 주었고 고령 국민에게는 잊힌 왕국의 도읍지로 새삼 주인 의식을 갖게 했다.
발굴된 유적의 품격도 한 차원 달랐다. 유기류는 특유의 부드러움과 곡선미를 뽐냈고 장신구의 화려함은 대가야 왕국의 국력을 가늠케 했다. 왕권의 상징 금동관은 가야 국력의 상징물로 떠올랐고 철로 만든 무기와 말갖춤 또한 가야 국력의 상징이 되기에 충분했다. 대가야는 한반도 남쪽 땅을 지배한 왕권의 나라였음을 지산리 고분군이 실제로 웅변하고 있다.

◆섬진강 대가야 영호남을 아우른다
최근 대가야 연구는 호남에서도 뜨겁다. 특히 순천·여수·광양 등 전남 동부권에서도 의미 있는 가야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전남 동부지역 묘제와 토기류는 대가야가 섬진강 일대 세력권 형성을 강력히 뒷받침한다. 고령군 대가야읍을 도읍지로 한 5세기경 절정의 국력이 속속 발견되는 유물로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다.
5세기경 대가야는 합천을 지나 거창·함양·산청·남원(운봉)을 중심으로 한 남강 유역, 남원·곡성·구례·하동을 중심으로 한 섬진강 유역, 광양·여수·순천등 남해안 유역, 장수·진안을 중심으로 한 금강 상류까지 세력을 확장시켰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적과 유물이 보여주는 대가야의 국력은 영호남을 아우른 제국의 면모다.
특히 전남 동부권의 대가야는 고대 일본 한반도 진출설의 허구성을 깨부수는 연구로 주목받고 있다. 아직도 가야는 갈 길이 먼 영역이다. 가야 연구는 젊은이들이 도전할 미래의 장으로 남아 있다. 오는 2030년 달빛 내륙철도가 연결되면 가야 연구는 더욱 활발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은둔의 왕국 가야는 달빛 내륙 철도를 통해 대제국으로 부활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나윤수 객원기자 nys2510857@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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