㉔거창역<중>민간인 학살 현장을 가다

[광주에서 대구까지 미리 달려본 달빛내륙철도]㉔거창역<중>민간인 학살 현장을 가다
오늘날 거창은 활기가 넘쳐흐르는 풍요의 땅이다. 그러나 불과 70여년 전 돌이키기에도 버거운 참혹한 비극의 땅이 거창이었다. 애써 잊는다고 잊힐 수 없는 거창 민간인 학살 현장은 거창 사건 순례지라는 이름으로 닦여 있다. 719명의 생때같은 목숨이 꽃잎처럼 휘날린 현장은 순례지가 돼 사람들을 맞고 있다. 부끄럽다고 역사를 덮어둘 수는 없다. 동서 화합과 민족 화해를 위해 기획된 달빛 내륙 철도 시리즈는 분단 역사 최대 비극 중 하나인 거창 민간인 학살 현장에서 국가란 무엇인가를 되묻는다.
◆비극의 시작 지리산 빨치산 부대
1951년 2월9일 한반도 남쪽 거창군 신원면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 거창군 신원면은 전쟁이 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순박한 농민들이 모여 사는 한적한 곳이었다.
역사의 비극은 빨치산 부대의 출현으로부터 시작된다. 6·25전쟁 이듬해인 1951년 인민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그러자 진주·마산·창원 방면 인민군 잔존 병력들은 지리산 산악지대로 몸을 피해 유격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남쪽 좌익 인사들까지 가세해 그 세력은 날로 커졌다. 그렇게 탄생한 부대가 빨치산부대다. 좌익인사 하면 왠지 거물급 인사들만 떠오르지만 당시 헐벗은 농민들도 빨치산으로 다수 가세했다. 빨치산들은 지리산 주변마을에서 식량 등 부대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수탈로 조달했다. 이에 생존하려는 빨치산과 퇴치하려는 국군은 뺏고 뺏기는 치열한 공방전을 주고받는다.
◆"모든 것을 없애라" 견벽청야
결국 국방부는 치안 유지를 빌미로 빨치산 토벌 작전 즉 '견벽 청야' 작전을 꺼내든다. 견벽청야(堅壁 淸野) 작전은 빨치산 부대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마을 주변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작전이었다. 문제는 애먼 주민의 생명까지도 견벽청야의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국군은 험준한 산악에 은거해 게릴라식으로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빨치산의 게릴라전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산골마을은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인민군이 점령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외딴 거창군 신원면도 예외는 아니었다.
1950년 12월5일 500여명의 빨치산이 신원면 경찰서를 습격해 경찰서를 뺏는데 성공한다. 경찰들은 도주했고 신원면은 빨치산의 수중으로 떨어진다. 그들 말로 하면 해방구였다.
국군은 1951년 2월 빨치산을 소탕하기 위해 준비한 견벽청야 작전을 시행한다. 국군 최덕신 11사단장은 경남 거창군을 견벽청야 작전지역에 포함시켜 작전명령을 하달한다. 최덕신은 누구인가. 그는 중국 황포군관 후신인 중앙육군군관학교 출신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거두 최동오의 아들이었다. 1986년 월북해서 김일성의 보살핌을 받은 인물이다. 작전명령을 수행한 부대는 육군 11사단 9연대 3대대로 지휘관은 한동석 소령이었다.

◆국군 총에 쓰러진 주민들
빨치산 치하에 있던 신원면 주민들은 처음에는 국군을 반갑게 맞이했다. 빨치산 치하에서 벗어나게 해 준 국군은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웬걸 국군의 행동이 이상했다. 닥치는 대로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에게 총질을 해대는 것이 아닌가. 순간 신원면 사람들은 절망했다. 자신들을 지켜줄 것으로 굳게 믿었던 국군이 되려 총질을 해대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이유도 없이 말이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1950년 2월9일부터 12일까지 3일간 펼쳐진 청야작전은 청연마을 주민 84명을 시작으로 박산골 517명 등 적과 내통한 통비분자라 해서 주민 719명을 총살하는 끔찍한 살육극이었다. 그중 364명은 15세 이하 어린이었다. 학살 현장에 통비는 있고 이유는 없었다. 11사단 9연대 3대대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학살의 절정은 3일째 되던 날 신원면 박산골에서 이뤄진다. 대대장 한동석은 주민 1천여명을 신원초등학교 교실에 모이게 했다. 주민들은 밤새 배고픔과 추위,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해가 뜨기 시작하자 작전이 개시됐다. 군인과 경찰, 공무원 가족은 돌려보내고 남은 517명을 박산골로 끌고 갔다. 죽음을 직감한 갓난애와 어린이, 노인 등 517명의 죽음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곧이어 '탕! 탕! 탕'. 이때 유일한 생존자가 스물네살 여성 한 사람이었다. 그 이름 임모(24)씨다. 유일한 생존자였다.
◆집요한 사건 은폐와 방해공작
사건 이후 국가가 보인 행태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였다. 1951년 3월29일 거창 출신의 신중목 의원이 사건을 폭로하면서 거창사건은 세상에 첫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정부는 실체 파악은커녕 은폐에 급급했다.
국회의원이던 신중목 의원은 육군특무대로부터 살해 협박을 받는다. 정부가 합동조사단을 꾸려 조사에 나섰지만 군은 훼방 놓기에 바빴다.
군은 사건 현장을 훼손하는가 하면 심지어 군을 무장공비로 둔갑시켜 진상조사단에 총격을 가하기까지 했다. 이후에도 한동안 거창 사건은 금기어로 입에 올리면 안 되는 사건이었다. 1998년에 이르러서야 의원 20여명이 발의해 '거창 사건 관련자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을 통과시킨다.
그러나 숨죽이고 살아온 유족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1998년 이래 27년간의 노력에도 유가족들에 대한 배상은커녕 땡전 한 푼 위로도 없었다.
지금껏 '거창 사건 관련자 배상'은 법제사법위를 통과하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매년 추모제에 울리는 공허한 배상
누군가는 용서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화해와 용서를 말하기에 국가 폭력에 대한 단죄는 너무나 더디기만 하다. 아니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최소한의 염치나 유가족에 대한 배려도 없다. 이제 유가족도 나이가 들면서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그들은 필설로 감히 표현할 길 없는 인고의 세월을 견뎌야 했던 사람들이다.
"도대체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지금도 70년 전 국가 폭력의 희생자 유가족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긴 세월 그들의 아픔을 경제적 배상으로 치유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최소한의 국가 배상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것이 염치 아닌가.
10월27일은 거창 양민 학살사건 71주기였다. 올해도 신원면 거창사건 추모공원에서는 추모제가 열렸다. 제34회 합동 위령제다. 그러나 올해 추모제에서도 "21대 국회에서 배상법이 통과돼 남은 유가족을 조금이나마 위로했으면 한다"는 공허한 메아리가 울려 퍼질 뿐이었다. 나윤수 객원기자 nys2510857@mdilbo.com
"국민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지 않은 국가가 필요한가요"
이성열 거창사건 희생자 유족회장

"거창사건 최대 교훈은 역사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국가가 죄 없는 민간인을 집단 학살해 놓고 아무런 배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1951년 신원면에서 조부와 조모, 삼촌, 고모 등 다섯 명의 일가친척을 잃은 이성열(69) 회장은 무책임한 국가폭력 행태를 강하게 성토했다.
이 회장은 사건이 발생한 지 70년이 넘는 세월을 상기시키면서 "유가족들이 나이가 들면서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희생자 유족회 이성열 회장은 조부와 조모를 비롯해 당시 세 살배기 삼촌과 네 살 고모가 희생됐다고 한다. 그러면서 국가 배상을 위해서 외로운 투쟁을 벌이고 있다. 그의 고향은 거창 양민 학살의 현장 중 하나인 신원면 중유리다. 이 회장은 "거창 양민 학살은 국가가 양민 719명을 학살한 희대의 사건으로 지금까지 배상 한 푼 주지 않는 것은 국가 존재 자체를 의심케 하는 것이다"고 분노를 가감 없이 표출한다.
국가가 저지른 명백한 폭력에도 여태껏 배상이 이뤄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은 김영삼 정부 들어 겨우 입법화하기 시작했다"면서 "정치인들이 기념일 때만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 아닌지부터 반성해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현재도 거창 양민학살 사건 배상에 대한 특별법안은 국회에서 3건이나 계류 중이다.
이성열 회장은 "거창사건이 일어난 지 70년 세월이 지나고 있지만 유가족들의 아픔은 여전하다"면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지 않은 국가가 필요한가"라고 회한 섞인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는 "거창 사건의 비극을 모른척한다면 역사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고 "특히 젊은이들이 역사를 보고 배울 수 있도록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을 비롯한 5·18광주항쟁 등 국가가 저지른 폭력범죄를 제대로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올 71주년 기념사를 통해 "유가족들의 아픔은 지속되고 있다"면서 "국민 모두가 함께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는 간절한 소망도 피력했다.
나윤수 객원기자 nys2510857@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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