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장수역<중> 삼절(三絶)의 고장, 가야 문화로 꽃 피우다

[광주에서 대구까지 미리 달려본 달빛내륙철도] 18. 장수역<중> 삼절(三絶)의 고장, 가야 문화로 꽃 피우다
장수는 의절의 고향이다. 그래서 장수군은 장수의 대표적 절의 사상을 삼절(三絶)로 내세워 세 성인으로 기린다. 성을 초월하고 신분을 초월한 장수 삼절은 장수 정신을 빛낸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아울러 장수는 한국 고대사를 뒤흔드는 가야 문화 발굴로 새로운 달빛 내륙 철도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논개의 고장 장수
논개 (論介)그녀는 누구인가. 논개는 황진이와 더불어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기생중 한명으로만 알려져 있다. 공식 기록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철저히 가려진 인물이다. 어쩌면 여성을 영웅으로 만들고 싶지 않은 유교 사상에 찌들어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정도다.
임진왜란때 논개가 진주 촉석루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투신한 사실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논개가 주(朱)씨라는 것, 장수출신이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다. 논개의 이야기는 유몽인의 '어우 야담'에서 비로소 민낯을 보인다.

장수군 장계면 주촌 마을이 논개가 태어난 곳이다. 장수 사람들은 주 논개가 태어난 고장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장수읍 장수리에 논개 사당을 지어 국난의 시절 구국을 향한 한 여성의 일편단심을 전체 군민이 기린다. 논개 사당 사업은 1954년 장수 군민이 각계각층에서 성금을 모아 시작했다. 전쟁이 막 끝난 가난한 시절에도 장수 군민은 논개의 의절을 잊지 않았다. 1968년부터는 논개가 순절한 7월7일을 '장수군민의 날'로 지정하고 1981년 4월 논개 사당을 지어 성역화에 마침표를 찍었다.

◆논개의 흑역사 이제는 끝내야
논개는 임진왜란이 터지기전까지 장수에서 살았다. 논개의 생가터는 수몰돼 2000년 지금의 장수리 사당에 복원했다. 논개 사당에 들어서면 논개 청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얼굴부터 논개의 곧은 기개가 느껴진다.
논개상을 보면 특이하게 손가락마디 마디에 가락지가 끼워져 있다. 논개의 손가락지는 논개가 투신할 때 왜장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도구였다. 그렇다면 논개의 투신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에서 나온 준비된 거사였음을 짐작할수 있다.
기념관 논개 표준 영정에도 여전히 손가락마디 마디 파란 가락지가 끼워져 있다. 아무리 봐도 논개는 한갓 기생신분이 아니다. 왜군이 승전잔치를 벌일 때 논개가 기생으로 가장해서 잔치판에 뛰어들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기념관에는 '논개 생장향수명비'라는 탁본이 있어 논개가 장수 사람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순조때 정주식이라는 현감이 세운 비를 일제때 "논개비를 부수려 하자 장수 주민들이 기지를 발휘, 땅속에 묻었다가 해방되면서 다시 비를 세웠다"는 일화가 내려온다. 그럼에도 논개의 흑역사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필요할 때 마다 끄집어내 일개 기생 취급하다가도 의절의 표상으로 등극 시키는 일이 반복된다. 대표적으로 친일 모윤숙이 서사시 '논개'를 발표하면서 관기로 묘사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장수군민들은 "제발 초라한 구시대 인물들이 논개를 일개 관기 운운하지 말아 달라"고 사당을 지어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신분을 초월한 순의리 백씨 '타루비'
전라북도 장수군 천천면 장판리 46. 도로가에는 특별한 비석이 하나 서있다. 이름하여 타루비(墮淚碑)다. 문자 그대로 눈물 흘리는 비석이다. 조선 숙종 4년 (1678년) 순의리 백씨는 말을 끄는 마부였다. 이름도 변변히 알려지지 않은 그냥 순의리 백씨다. 백씨는 그날도 장수 현감 조정면의 말을 끌었다. 그날따라 일이 안되려고 꿩 한 마리가 사단을 일으켰다.

산비탈을 오르던 두사람 앞으로 말발굽 소리에 놀란 꿩이 후다닥 날아올랐다. 그 소리에 놀란 말이 발을 삐끗해 그만 낭떠러지로 떨어지면서 말과 함께 현감이 목숨을 잃고 만다. 현대인 눈으로 보면 불가항력이다. 마부이던 순의리 백씨가 책임질 일은 아니다. 하지만 말을 끌던 백씨는 현감이 죽은 것을 자기 탓으로 돌렸다. 소임을 다하지 못한 탓이라고 자책했다. 그러면서 '타루'라고 바위에 혈서를 쓰고 자기도 몸을 던졌다. 비록 신분은 미천했지만 상사를 모시는 책임, 즉 공인 의식 만큼은 너무나 투철했다.
백씨가 죽은 장소에는 '타루애'라는 한자 말이 적혀있다. 후에 장수 사람들이 백씨 사연을 전해 듣고 그의 충성스러운 의리를 알리고자 비를 세우니 그 이름이 '순의리 백씨 타루비'다. 장수 사람들은 논개와 함께 순의리 백씨를 '장수 삼절'로 추앙한다, 순조 2년(1802)년에 세워진 비를 1881년 장수민들이 뜻을 모아 '장수 순의리비'로 다시 세웠다.

◆목숨을 걸어 향교를 지켜낸 '충복 정경손'
장수읍 장수 향교(태종 7년·1407년)는 보물 제272호로 지정돼 있다. 조선 향교로서 잘 보존된 원형을 높이 산 것이다. 장수 향교가 조선시대 향교 원형을 그대로 보전한데는 장수가 낳은 삼절 '충복 정경손'의 목숨을 건 의로운 투쟁이 있어 가능했다.
장수 삼절 충복 정경손은 선조 30년 (1597) 조선 중기 인물이다. 호남은 그야말로 정유재란으로 쑥대밭이 됐다. 인근 남원성이 무너지면서 1만 여명이 희생자가 모래 알처럼 흩어지고 그 난리를 장수도 피해가지 못했다.
당시 왜장 고바야가와의 부장 안코쿠시가 장수에 침입했다. 전란으로 유서 싶은 전라도 향교가 하나 둘 불타 사라졌고 장수 향교도 풍전등화였다. 내 한 몸도 건사하기 힘든 그때 정경손은 왜군이 들이 닥치자 전복을 입고 문묘 앞에 꿇어앉았다. 그리고는 경서를 외우며 말했다. "이곳은 조상들의 위패를 모신 신성한 곳이니 들어가려면 내 목을 베고 들어가라"고 맞섰다. 정경손의 목숨을 건 사투로 우리나라 향교 중 600년을 견뎌낸 장수 향교가 살아남은 극적인 순간이었다.

장수 향교에는 '정충복 비각'이 서있다. 그의 절개 있는 행동에 감복한 왜장이 방을 하나 붙였다. '본성 역물범 (本聖 域勿氾)', "이곳은 성스러운 곳이니 침범하지 말라!"
일본 장수 치고는 꽤 괜찮은 인물이었다. 사람을 볼 줄 아는 인물이기에 그런 방도 써붙였다, 이런 기개로 장수 향교를 지킨 충복 정경손이 장수 삼절로 이름을 올린 것은 당연하다. 장수 유림은 매년 음력 3월 15일에 제례를 봉헌해 그를 기리고 있다.

◆고대사를 새롭게 쓰는 장수 가야 유적
최근 장수의 가야 유적지가 한국 고대사를 흔들고 있다. 가야문화는 원래 영남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장수에서 발굴되는 가야 유적은 가야사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고 있다. 백두대간 육십령 고개를 넘어 화려한 가야 문화사가 장수에서 펼쳐지면서 장수가 한국 고대사의 새로운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것이다.

장수군에는 등촌리 고분군을 비롯해 9개의 무덤떼 240기가 발굴됐다. 주목되는 것은 장수의 독특한 무덤 축조 방식이다. 봉분의 경계를 두르지 않고 생토를 다듬은 후 되파는 양식을 택하고 있어 이전 가야 무덤과는 형식이 다른 장수만의 차별화된 축조 방식이다.

특히 최근 발굴된 봉화터의 최종 집결지가 장수군 장계면으로로 확인되면서 장수가 가야 정치 세력의 중심지였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철 생산지 유적 60개소가 장수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면서 향후 장수의 학술 연구가 주목받고 있다. 여기에 가야사 정비 복원이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되면서 장수 가야문화 발굴에 힘을 받쳤다. 장수 등촌리 가야고분은 가야 지배층의 무덤으로 장수가 가야의 활발한 무대였음을 증명하는 유적이다. 이는 호영남간 교류사에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 되고 있다. 나윤수 객원기자 nys2510857@mdilbo.com
"달빛내륙철도가 개통되면 장수가 동서화합 상징될 것"
이현석 장수군청 학예연구사

"장수 가야 유적은 백두대간 서쪽에 가아계 정치체제가 존재함을 입증하는 것으로 고대 역사를 재편할 가치 있는 고고학적 성과입니다."
장수군 가야고분에 대한 발굴과 연구를 시행중인 이현석 장수군청 학예연구사의 장수군 가야 유적에 대한 평가다.
그러면서 이 학예연구사는 "장수가 고대 가야의 정치 체제 중심지로 영호남의 교류 중심지로 부상중이다"고 발굴 성과를 말한다.
그는 "장수군은 백주대간 8대종산 중 하나인 장안산이 자리하고 있어 예로부터 호남과 영남을 잇는 육십령고개를 통해 교류한 지정학적 가치가 높다"면서 "앞으로 가야역사 문화 발굴을 통해 전북의 주요한 역사문화 관광 자원으로 개발 될 수 있을 것이다 "는 기대 섞인 반응도 내놓았다.
이 학예연구사는 앞으로 연구 방향에 대해서 "기원전후 초기 철기 시대부터 고려시대 이전까지 연구를 통해 문화재 지정등 보존·진흥 방안도 마련될 예정이다"고 계획도 밝혔다.
또 "달빛내륙철도가 개통되면 고대 사회 동서연결 통로였던 장수가 동서화합의 새로운 상징적 장소로 떠오를 것이다"는 기대감도 숨기지 않았다.
장수군 전북 동부 지역 110개소 봉화터와 60개소 철생산 유적 등은 한국 고대가야사의 새로운 연구 중심지로 급부상하는 현장이었고 발굴현장 젊은 학예사들의 역할은 발군이었다.
나윤수 객원기자 nys2510857@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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