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들 직접 만나 교육지표 설득
후세 알리는 비석 세우는 것, 내 몫"
"교육지표 사건은 유신 체제에서의 국민교육헌장에 반발하는 광주지역 교수들의 마지막 양심이었습니다. 당시 수창자로써 10명의 전남대 교수들을 설득하고, 행동했던 송기숙 선생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홀로 지난 6일 밤부터 고 송기숙(86) 교수의 시민분향소가 위치한 광주 YMCA 무진관을 지키고 있는 전남대 교육지표 사건 마지막 생존자인 이홍길(79) 교수는 시대에 맞선 깨어있는 지식인의 표본이었던 그를 회상했다.
1987년 당시 송 교수는 연세대 해직교수였던 성내운 교수, 서울대 백낙청 교수 등과 깊게 교류하던 중 유신 체제의 교육에 대해 반대하는 그들의 의견에 동조했다.
송 교수는 이들로부터 '민주적인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정부와 국민들에게 알리자'는 취지의 이야기를 접하고, 전남대로 돌아와 이 교수를 포함해 10여명과 뜻을 함께 했고, 1978년 6월27일, 박정희 정권의 국민교육헌장을 정면으로 비판한 '교육지표 선언'을 아사이 신문에 실었다.
선언문 발표 이후 11인의 전남대 교수들은 정부의 정책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나란히 중앙정보부에 끌려갔고, 갖은 고초를 겪었다. 이 교수는 '모욕스럽고 치욕스러웠다'는 말로 당시를 회상했다. 이들 교수는 곧바로 교단에서 퇴출당했다.
2년여 만인 1980년 3월, 11인의 교수는 다행히 복직할 수 있었지만 송 교수를 비롯 6명의 교수들은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5·18민주화운동을 뒤에서 조종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전국수배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6월 상무대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한 뒤 또 다시 해직됐다.
송 교수는 교단의 꿈을 접고 연곡사와 선암사 등지를 돌며 글을 쓰기 시작했고, 1984년부터 이 교수는 연곡사 인근에 주거지를 마련해 매일같이 송 교수를 보살폈다.
이 교수는 "1970년대 박정희 시대의 유신체제를 함께 비판했고, 1980년 5월 함께 도망을 다니면서도 한국의 민주주의를 걱정했던 송 교수는 이 시대의 깨어있는 지식인의 표본이었다"며 "교수들을 직접 만나 설득한 그는 진정한 '교육지표 선언'의 수창자였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교단에 서지 못하게 되자 송 교수는 곧바로 책을 쓰기 시작했다. 나 같으면 교단에 서지 못하는 억울함 때문이라도 더 이상 펜을 들지 않았을 것"이라며 "송 교수는 그만큼 강직했다. 그는 자신의 삶과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맞바꾼 것"이라고 밝혔다.
교육지표 선언에 동참했던 11인의 교수 중 혼자 남은 이 교수는 "죽기 전 송 교수의 뒤를 따라 대한민국의 사회적 가치와 윤리를 바로 세울 수 있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면서 "송 교수가 책을 쓰며 기거했던 연곡사 인근에 기림비석을 세워 '교육지표 선언'의 정신을 후대에 전하는 사업도 내가 해야 할 몫"이라고 담담히 말했다.
김종찬기자 jck41511@mdilbo.com
- 행복사, 군왕로경로당 방문 어르신 위로 격려 광주 북구지역 자원봉사단체인 '행복을 주는 사람들(이하 행복사, 회장 박경화)'은 29일 정기 봉사의 날을 맞아 북구 두암3동 군왕로경로당을 방문해 어르신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행복사 회원들은 이날 오전 10시 회원들이 십시일반으로 기부해 준 과일, 치킨, 떡과 음료수 등을 가지고 경로당을 찾았다. 이들은 경로당에서 다과회를 갖고 레크레이션 시간과 장기자랑을 선보이는 등 어르신들을 위로 격려하는 시간을 가졌다.양기생기자
- · 광주 서부경찰, 공중화장실 비상벨 합동점검
- · 광주은행, 광주·전남 노후화 공부방 새단장 지원
- · 바르게살기광주협의회장에 이석우 회장 선출
- · 권신오, 광주CBS 새 대표 오늘 취임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