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광산구

암울했던 시대 서민의 애환을 달랜 '삶의 소리'

입력 2023.07.04. 18:37 박지경 기자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광산구]
⑤도산동 임방울 생가
<국창 임방울선생 생가터>도산동 원도산마을에 가면 임방울선생의 발자취를 만나 볼 수 있다. 생가터 주변 마을안길은 말끔히 정비되어 있고 뒤로 아담한 대숲이 있어 정취를 더하지만 대문은 굳게 닫혀있다. 광산문화예술회관 앞에 있는 '국창 임방울 선생상'을 옮겨 그리고 능소화 한 가지를 그려넣어 아쉬움을 달래면서 절창(絶唱)을 기린다.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광산구]⑤도산동 임방울 생가

이 대회 마지막으로 출연할 명창은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리에서 온 임방울씨입니다! 불러줄 대목은 춘향가 중의 더늠 쑥대머리 입니다.'…그는 입술에 침을 바르고 심호흡을 했다. 고수가 거연하게 저리리 덩더둥 하고 마중 박을 울렸다. 그는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가 "쑥대머리 구신헨용~'하고 첫 소리를 뺐다. 웅혼한 남성적인 통성이 천구성으로 이어졌다. 고수는 제꺼덕 중모리 박으로 받쳐주었다. "적막 옥방의 찬 자리에 생각난 것이 임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낭군 보고지고 우리 정 정별 후에…" 먹구름 속에서 찬란하게 뻗어 나오는 햇빛 같은 소리였다.…슬픈 수리성은…하늘을 휘감는 알 수 없는 무지개 색깔의 신들린 신화 같은 광휘를 그려내고 있었다.

임방울의 한 생을 그린 한승원의 소설 '사랑아 피를 토하라'에 나오는 대목이다. 스물다섯(1929)에 조선명창연주회에서 '쑥대머리'를 불러 일약 명창의 반열에 오르는 장면이다.

"내가 만일, 님을 못 보고 옥중고혼이 되거드면 무덤 앞에 섰는 돌은 망부석이 될 것이요, 무덤 근처에 섰는 나무는 상사목이 될 것이라…", 소리를 끝냈을 때 관중은 박수를 치면서 발을 구르고 환호성을 질렀다. "네가 일등 먹어버렸다" "니가 장원이다!" "앙콜!" "한 번 더 해라" 관중의 환호성으로 극장 바닥이 꺼지고 천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생가터입구 안내 표지판

소설은 그가 명창대회 최초로 재청을 받아 호남가를 부르고, 삼청을 받아 수궁가 중 토끼 화상 그리는 대목을 부르는 것으로 이어진다.

임방울(林芳蔚 1904~1961)은 광산 송정읍(지금의 도산동)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을 살면서 한 시대를 풍미한 국창이다. 본명은 승근이고 목소리가 고와 예명이 방울이다. 아버지는 가객은 아니었지만 소리판에서 칭찬받을 정도는 됐다고 한다. 모계가 세습 무업(巫業)을 했던 단골(丹骨)로 알려져 있다. 농사를 짓는 틈틈이 어머니 나주댁은 굿을 하러 다니기도 했다. 태(胎)에 깃든 예인의 기질은 거기서 내려온다. 흔히 '당골네'라고 하는 단골은 제정일치 시대 단군(檀君)의 '단'이 말의 뿌리이다. 그것이 '단월(檀越)'이 됐다가 단골(丹骨)로 와전됐다고 해석들을 하지만, 그 '붉은 뼈'처럼 제사장이며 예인이라는 '초인(超人)'의 근본을 잘 설명하는 말이 어디 있을까 싶다.?

'근대 5명창' 김창환이 나주댁의 오라비이자 임방울의 외숙이다. 근대 5명창은 고종 후기~1930년대까지 김창환, 송만갑, 이동백 세 사람 외에 두 사람이 바뀌어 기록되기도 하는데 늘 김창환이 맨 앞자리에 있다. 서편제 명창 이날치와 동편제 명창 박기홍이 그의 이종형제들이다. 김창환의 두 아들, 봉이·봉학, 생질 임방울로 이어지고, 임방울 누이의 딸인 명창 박화선으로 내려온다. '이조 고순(高純) 양대 간에 재(在)하여 이날치 후로 서파(西派) 법통을 독봉하다시피 일세를 진동한 명창이다. 잘난 풍채로 우왕좌래(右往左來) 일거수 일투족이 모다 미묘치 아니한 것이 없다.

미인의 일빈일소(一嚬一笑)가 사람의 정신을 황홀케 함과 흡사해 창과 극이 마조떠러지는 데는 감탄을 발치 아니할 수 없다.' '조선창극사'에 나온 김창환에게 바치는 헌사다.

그는 어릴 적 이종형 이날치로부터 가문의 소리를 익힌 뒤에 1902년 고종 즉위(御極) 40주년 칭경예식을 위한 협률사(協律社)의 주석으로 발탁돼 당대 최고의 국창으로 인정받는다. 소리는 서편제이나 장중하고 폭이 넓은 계면조의 성음으로 지금의 창법과 달리 고졸한 멋을 풍겼다고 한다. 발림은 '많이 꾸미지 않아도 신명이 나며, 익살스러우면서도 되바라지지 않고, 가벼운 몸짓에도 무거운 맛이 있고, 손 하나를 들어도 깊은 멋이 있었다'는 평을 받았다.


임방울은 외숙의 도움으로 서울 명창대회에서 '춘향가' 옥중가의 한 대목 '쑥대머리'를 부르면서 강렬한 데뷔를 하고는 탄탄대로를 걷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비로소 그날부터 출세가 되어 박람회를 마친 뒤 콜롬비아 레코드에 1년간을 취입하고, 다음에 '삑터'에 2년을 종사하고, 그 다음 'OK 레코드'의 전속으로 8·15 해방의 날까지 계속하였다. 그 삼 회사에서 '쑥대머리' '호남가'를 120만장 이상을 각시 회사에서 팔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외사촌형 김봉이, 김봉학 씨는 조선명창이었는데, 나는 그 유전성으로 흘러내려 자연히 창계에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임방울, 나와 창극, '조선일보' 1956.5.28)

그의 사랑은 짧고 쓸쓸했다. 동갑내기 김산호주, 소년이 머슴 살던 주인집 딸이었다. 그녀는 부잣집에 시집갔다가 홀로 되어 광주에 요릿집을 차렸다. 어른이 되어 둘은 그 집, 송학원에서 다시 만났다. 둘은 이태 동안 동백꽃처럼 붉게 타올랐으되, 사랑하는 동안 명창의 목은 시나브로 사그라들고 말았으니. 임방울은 정신을 차리고 홀로 떠나 지리산 쌍계사 토굴로 들어간다. 독공(獨功)과 득음(得音)을 위해. 독공은 살불살조(殺佛殺祖) 같은 것이다. 스승에게 소리를 배운 뒤에 독창적인 자기 소리를 찾아 산중에서 홀로 공부하는 것,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 스스로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는 과정이다. 그렇게 얻는 것이 득음이다. 그가 백척간두에 홀로 서서 절절하게 소리치며 진정한 자기를 찾아갈 때, 여인은 그를 찾아 온 지리산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다가 어느 날, 쌀랑쌀랑 싸락눈이 내리던 겨울날에 그녀는 동백꽃 모가지 떨어지듯 저 세상으로 갔다. 그때 임방울이 자작해 즉흥적으로 부른 것이 그 유명한 '추억'이다.

앞산도 첩첩허고 뒷산도 첩첩헌디 혼은 어디로 향하신가/ 황천이 어디라고 그리 쉽게 가럈던가/… 무정허고 야속헌 사람아/ 어데를 가고서 못 오는가/ 보고지고 보고지고 임의 얼굴을 보고지고.

진양조의 마디마디마다, 계면조의 굽이굽이마다, 가슴 저미는 통한으로 가득한 단가. 뒤에 '망처(亡妻)를 생각함'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단가는 1930년 음반회사에서 발매돼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일세를 풍미한 가락이다.

국창 임방울선생상(광산문화예술회관)

식민과 해방, 그리고 전쟁, 임방울이 가객으로 이름을 날리던 때는 민족사적으로, 판소리사적으로 어둡고 쓰라린 시기였다.

그는 그 힘든 세월을 살아온 민족의 한과 정서를 온몸으로 토해냈고, 핍박 받는 민중과 함께했다. 애절함을 자아내는 그의 창법은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서민들의 슬픈 정서를 어루만져 주었다. 춘향가, 수궁가, 적벽가를 장기로 삼았으며, 춘향가의 '쑥대머리', 수궁가의 '토끼와 자라' 대목은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1956년 '수궁가' 완창에 이어 이듬해 '적벽가'를 완창했다. 1960년 봄, 부산공연. 더늠 '쑥대머리'를 부르다가 심청가 중 '심청이 선인들에게 팔려가던 대목'으로 바꾸어 부르다가, 이번에는 춘향가 한 대목을 뽑아내더니, 다시 수궁가로 옮겨가 이것저것이 뒤섞여 버렸다. 누가 말릴 틈도 없었다. 갑자기 얼굴에 핏기가 가시면서 그는 무대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목구멍에서는 피가 흘렀다. 그해 가을,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기어이 김제공연에 나섰다. 그는 입버릇처럼 소리 하다가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김제 장터에서 소리를 하다가 다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이듬해 3월 그는 영면에 들었다. 향년 57세. 임금 앞에서 소리를 하여 벼슬을 받은 적도 없고,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보유자의 예우를 받지도 못했으니, 엄밀한 의미에서 국창이라는 칭호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들어보자.

가난이야, 가난이야, 원수년의 가난이야. 복이라 허는 것이 어이하면 잘 타는고. …(세상에 나서) 불의행사 헌 일 없이 밤낮으로 벌었어도… 삼순구식(三旬九食)을 헐 수 없고, 일년 사절 헌 옷이라, 가장은 부황나고, 자식들은 아사지경이 되니, 내가 차라리 재결(自決)허여 이런 꼴을 안 보고자, 초매끈을 부여잡고 목을 매어 죽기를 작정하니….

나라는 망하고 천지가 암울했던 시대, 30일 동안 아홉 끼를 먹지 못하여 백성들이 넋을 잃고 하루를 연명하던 시절, 이 소리 흥보가 '가난타령', 박타기 직전에 흥보가 부르기도 하고 흥보 마누라가 부르기도 하는, 이 소리의 끝 대목 자결하려는 장면에서, 역설적으로 청자는 다시 생의 끈을 부여잡고 살아가는 삶의 소리이기도 했던 것이니, 국창은 나라가 칭한 것이 아니라 민중의 탄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1986년 송정공원에 '국창 임방울 선생 기념비'가 세워졌고, 광산문예회관에 그의 북치는 상이 건립됐다. 지하철 송정역사에 그의 기념관이 들어섰고, 생가 주변으로 거리정비 사업이 한창이다. 매년 가을 임방울 국악제가 열려 그 뒤를 따르려는 후학들의 등용문이 되고 있다. 이광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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