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광산구

어등산의 넋을 달래듯, 황룡강은 붉게 물들어

입력 2023.06.06. 18:39 박지경 기자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광산구]
③광산 어룡동(하) 한말의병
을미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의병 일으킨 기우만·기삼연 비롯
수십, 수백명의 의병 혼 깃들어
호남의병 활동 중심지자 격전지
<어등산 석봉(石峰)에서 무등산을 바라보다> 어등산은 해발 338m의 산으로 어룡동과 하남동,임곡동 사이에 걸쳐있는 광산의 진산이다. 정상부인 석봉에 오르면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유유히 흐르는 황룡강과 광산들녘은 물론 광주시내일원과 무등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지리적으로 장성,나주,함평을 잇는 어등산은 한말(韓末)의병의 주된 근거지이기도 하다.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광산구] ③광산 어룡동(하) 한말의병

위정척사(衛正斥邪)는 이분법이다. 세상을 정과 사로 나눈다. 정은 바른 것이니 지켜야 하고 사는 그른 것이니 물리쳐야 한다. 여진족의 침입을 받던 남송시대 주희가 뼈대를 세운 사상이다.

화이(華夷)의식이 그 뿌리다. 화(華)는 한족이고 이(夷)는 오랑캐다. 오직 성리학만이 정학이고 노장과 불교와 천주교 등 그 밖의 것들은 사문난적이다. '아(我)와 비아(非我)와의 투쟁'이 있을 뿐, 둘은 공존할 수 없다. 이렇듯 보수적이고 배타적이어서 평시에는 기득권 옹호논리로 잠재해 있을 뿐 철학사상으로 별 매력이 없다. 그러나 꼭 필요한 때가 있으니, 조국이 풍전등화로 흔들리는 비상시국, 즉 전시(戰時)다.

1908.4.25 김태원 의병장등 23명 의병들의 최후전적지 '어등산토굴'

◆애끓는 충심 불붙은 애국심

한말 노사 기정진(1798~1879)이 위정척사론을 들고나온 데는 그런 시대적 배경이 깔려있다. 그는 정조(22)~고종(16) 연간을 살았으니 망국이 머지않은 때다. 때는 바야흐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 서양의 열강들이 동양을 잠식해 나가던 시기다. 1866년 프랑스가 침략한 병인양요, 미국이 강화도를 점령한 신미양요, 임오군란으로 청의 내정간섭이 심화되던 무렵이다. 기정진은 병인양요 직후 올린 상소, '병인소(丙寅疏)'에서 양인과 서학(西學, 천주교)을 척사(斥邪)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외침의 방비책을 6개항으로 제시하며 민족의 주체성 확립을 설파했다.

고종이 그의 식견을 높이 평가해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벼슬을 사양하면서 두 번째 '병인소'를 올린다.

국정의 폐습과 삼정의 문란, 그리고 오염된 사대부의 정신에 대해 통렬히 비판했다. 안으로 닦고 밖으로 물리치는 이 내수외양(內修外攘)의 소가 뒤에 나오는 위정척사론의 뿌리이며, 한말 창의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

위정척사론을 받아 맨 처음 의병의 깃발을 올린 사람이 송사 기우만(1846~1916)이다.

전라도 의병은 타지역에 비해 조금 늦은 1895년 장성에서 시작된다. 기우만이 선봉에 서고 기삼연, 이승학, 기재, 박원영 등이 뒤를 따랐다. 당시 의병장은 대부분 기정진의 제자, 문인들이었다. 기우만은 그해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장성향교를 본거지 삼아 의병을 일으킨 뒤 광주로 이진한다.

'선생은 "광산이 호남의 중심지이니 처음 일하는 마당에 있어 지리적 조건이 진실로 마음에 맞다"하고 먼저 글월을 만들어 광산의 여러 의사에게 통고하였는데 이제 와서 이주하였다.'는 대목이 '독립운동사 자료집'에 나온다.

그는 광산을 거점으로 대규모 의병연대를 통해 북상할 계획이었으나 고종의 조칙에 따라 의병을 해산하고 만다. 근왕적(勤王的) 유생집단의 한계를 보여주는 부분인데 오직 한사람, 기삼연 만이 해산에 반대했다. 기우만이 1906년 체포돼 광주부에 나갔을 때 일본 순검과의 문답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

'한 번도 적을 토벌하고 복수하는 일을 생각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손에는 촌철(寸鐵)도 없지만 가슴 속에는 항시 일만의 갑병(甲兵)이 있어 강물소리를 들으면 철갑옷을 입고 동쪽 오랑캐를 정벌하려 생각하였고 산에 나무를 보면 의병(疑兵)을 만들어 오랑캐를 쫓아내기 원하였으니…' (호남의병열전)

여기까지가 전기 의병이다. 이어 1905년 을사늑약을 전후해 재차 의병이 일어나니 중기 의병이다. 최익현, 백낙구, 양한규, 양회일 등이 주도했다. 최익현은 호남의 의병기운을 일깨우면서 항쟁을 고조시키는 기폭제가 됐다. 이때 광산출신 의병으로 박현동과 최기룡 등이 활약했다. 그리고 고종이 강제퇴위 당하고 군대가 해산하던 1907년 의병항쟁은 다시 들불처럼 일어난다.

어등산 석봉

◆들불처럼 일어선 후기 의병항쟁

후기 의병의 핵심인물이 성재 기삼연(1851~1908)이다. 전기의병을 주도한 기우만은 기정진의 손자였고, 후기의병을 주도한 기삼연은 기정진의 재종질이다. 기삼연은 1907년 '호남창의회맹소'라는 의병부대를 조직했다. 당시 의기가 있는 젊은이라면 누구나 참여하고픈 의진이었다. 호남창의회맹소는 일진회와 자위단을 비롯한 친일파 제거, 조세불납 투쟁, 수입품 불매운동 등을 전개했다. 대원들의 목에 현상금이 걸릴 만큼 적극적인 반일투쟁을 벌였다. 의병이 맹위를 떨치자 일제는 군경을 총동원하여 1907년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펼친다. 이때 기삼연은 순창군 복흥면 동산리에서 체포돼 이듬해 2월 광주군 부동방 서외리 서천교(西川橋) 밑 백사장에서 총살형으로 순절했다. 그는 "군대를 내어 이기지 못하고 이 몸이 먼저 죽으니, 일찍이 해를 삼킨 꿈은 헛것이었던가."라는 시 한 수를 남겼다.

한말 호남의병전적지 표지석

◆전라도, 호남 의병의 중심지

1908년 이후 전라도는 의병항쟁의 중심지가 됐다. 기삼연의 정신을 잇는 의병장들이 여러 계층에서 배출됐다. 일제경찰은 1906~1907년 전라도 대표 의병장으로 최익현 고광순 기삼연을, 1908년은 김준(김태원) 김율 형제를, 1908~1909년은 전해산, 안규홍, 심남일 등을 꼽고 있다. 김준은 의병을 이끌고 호남창의회맹소 본진이 주둔하고 있던 고창 문수사로 갔다.

그날 밤 회맹소는 기습을 당했는데 김준이 앞장서서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군사적 지식과 대담성을 높이 산 기삼연은 그를 선봉장으로 삼았다.

형제는 회맹소 정예부대를 이끌며 전남 서부지역 전투에서 잇달아 승리를 거둔다.

그 와중에 동생 김율이 광주 소지방(지금의 송정읍)에서 체포되고 만다. 김준이 동생 구출계획을 세우던 중 요통이 심해져 박산마을 뒤 어등산에 들어갔다.

'그런데 적의 보병 및 기병과 순사대 등 수백 명이 불의에 뒤를 밟아왔다. 의병들이 모두 겁내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즉시 들어와 고하기를 "주장의 병세가 이러하고 적의 기세가 심히 성하니 장차 어찌합니까?"하였다. 준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죽을 것은 의병을 일으키는 날에 이미 결심하였다. 다만 적을 멸하지 못하고 장차 왜놈의 칼날에 피를 흘리게 되었으니 이것이 한이로다."하였다. 이날 누런 안개가 사방을 가득 메워 지척을 분간할 수 없어 의병들이 함께 부축하며 드디어 산에 올랐다. 준은 스스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의병들에게 "그대들은 급히 달아나 화를 면하라. 나는 한걸음도 옮길 수 없으니 반드시 여기에서 죽겠노라."하였다. 의병들이 서로 쳐다보며 차마 버리고 가지 못하자 손을 저어 물리치면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함이 없다. 힘써서 뒷일을 도모함이 옳다."하니, 여러 의병들이 모두 눈물을 뿌리며 갔다.… 조금 뒤에 적이 사방을 포위하였다. 준은 안색을 변치 않고 돌 위에 단정히 앉아서 적의 총탄을 맞고 절명하였다.'

기우만과 노사학파가 쓴 '호남의병열전'에 나오는 대목으로, 절체절명의 순간이 마치 영상처럼 지나간다.

1908.4.25 김태원 의병장등 23명 의병들의 최후전적지 '어등산토굴'

◆일제의 의병 학살 종결지

1908년 4월25일 어등산에서 김준과 의병 23명이 3시간여 격전을 치르다 순절했다.

이어 1909년 1월10일 김준 부대에서 독립한 조경환 의병장이 어등산 자락 운수동에서 의병 50여명과 밥을 먹다가 일본 헌병대의 기습을 받는다. 2시간여의 전투 끝에 조경환을 비롯한 20명이 전사하고, 10명이 체포되는 참변을 당했다. 그해 9월26일 이기손 부대 중군장이던 양동환 의병장 역시 80여명의 부하들과 어등산에서 일본군경과 싸우다 10명이 전사했다.

김원국, 김원범 형제는 의병부대 도포장으로 전투에 나섰다. 동생 김원범이 그해 정월 어등산에서 체포돼 자결했고, 형 김원국은 임곡에서 부상을 입어 체포된 뒤 이듬해 대구감옥에서 순국했다. 이어 광주 출신 의병장으로 오성술, 조경환, 양진여 양상기 부자, 김동수, 이기손 등을 꼽을 수 있다.

일제는 1908년 2~3월 대대적인 진압작전에 나섰다. 이때 기삼연과 김준, 김율 형제를 포함한 광주지역 의병 200여명이 순절했다.

이어 1909년 9~10월 '남한폭도 대토벌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전남지역을 포위하는 작전을 벌이는데 이때 의병 500여명이 전사하고, 체포된 사람이 1천500여명에 달했다.

순천대 홍영기 교수는 '어등산은 최소한 50여명이 순국한 한말 의병의 격전지'라며 '광주~나주~함평~장성을 축으로 의병활동이 전개된 점을 고려하면, 여러 지역의 경계에 위치한 어등산은 일본 군경의 추적을 따돌리기가 용이했을 것이며, 또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지세여서 이동과 은폐와 연락이 유리한 지형적 측면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라고 '광산구사'에 실린 논문 '일본제국주의 침략과 민족운동의 발전'에서 쓰고 있다.

광주의 해는 무등산에서 떠서 어등산으로 진다. 해가 어등산을 넘어갈 때, 서편으로 길게 뻗은 황룡강이 붉게 물든다.

강은 장성에서 발원해 광산을 거쳐 영산강으로 바뀌어 나주로 내려가는데 그 물길이, 한말 목숨을 걸고 창의해 일제와 전투를 벌이던 그들의 이동경로와 같다. 그들의 넋을 달래는 것처럼, 해질 무렵 황룡강은 붉게 물들어 흘러간다. 이광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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