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광산구

신창동을 앞바퀴로 캐스퍼를 뒷바퀴로, 광주가 간다

입력 2023.05.09. 21:29 김양희 기자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광산구 프롤로그
신창동 마한유적지와 반월마을, 그리고 당시 생활의 원천이 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영산강을 그려보았다. 상당히 광활한 지역이지만 한 폭의 그림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많은 생략이 불가피 하였다. 바로 여기에 <신창동마한유적체험관>을 운영중에 있고, 유적발굴 당시 재현모습 등을 살펴 볼 수 있다. 그림=김집중 작가 

무등일보는 이번주 수요일자부터 ‘광주 1000년 마을 이야기, 광주시 광산편’(12회)과 ‘마을에서 인간을 읽다’(10회)를 각각 격주로 연재합니다. 

본보는 지난해 ‘광주 1000년 마을 이야기, 광주시 남구편’과 전남의 시·군 마을을 탐구하는 ‘마을에서 인간을 읽다’ 를 연재해 호평을 받은 바 있습니다. 이번에도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편집자주>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광산구 프롤로그

'옛날 옛적에 나무를 쪼개 배를 만들고, 나무를 깎아 노를 만들어 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고, 소를 길들이고 말을 부려 무거운 짐을 끌고 먼 곳까지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또 나무를 잘라 공이를 만들고, 땅을 파서 절구를 만들어 농사일이 수월해졌다. 나무를 휘어 활을 만들고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부족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들에 땅을 파서 나뭇가지로 덮은 움집이나 산야의 굴속에서 살다가 다락집을 만들었다. 죽은 사람을 섶으로 두껍게 싸서 들판에 버려두던 것을 관곽(棺槨)에 넣어 매장하고 봉분했다. 노끈을 맺어 만든 결승(結繩)문자를 이용하여 백성을 다스렸고 만민은 이로써 번거로운 일을 살폈다.'

선사시대의 인류가 사물의 이치를 터득해 문명의 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이다. <주역> 계사전에 나온 내용을 요령껏 옮겨 보았다. 광주 광산구 신창동 유적은 1세기경의 것으로 저런 진화과정을 거쳐 초기철기시대로 진입했을 때의 모습이다. BC4~3세기에 들어온 중국의 철기문화는 우리나라 북부, 중부를 거쳐 BC2세기 남쪽으로 내려온다. 신창동 유적은 1962년 옹관묘(독무덤)지군이 조사되면서 우리 고고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었다. 그러다가 30년이 지난 1992년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면서 최고·최초·최대 수식어가 붙는 엄청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2000년 전의 타임캡슐이 열리던 날, 옛적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가 마치 오늘 새벽에 뜬 태양처럼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가장 오래된 현악기 '슬', 최대 규모의 벼껍질 압착층, 최초의 직물 비단이 출토됐다.

수레바퀴 부속구(발굴당시 모습 재현)

직접 천을 생산했음을 알려주는 베틀 부속구, 바퀴통·바큇살·가로걸이대(車衡) 등의 수레바퀴 부속구, 불을 피우는 발화구, 신발을 만드는 신발틀, 칠기와 칠기를 만드는 도구 등은 이곳의 대표 생활유물들이다. 농사도구로는 괭이와 따비 같은 굴지구를 비롯하여 낫자루, 곡물의 껍질을 벗기거나 알곡을 부술 때 사용하는 절구 공이 등이 발굴되었다. '삼한은 방울과 북을 매달아 귀신을 섬기고 노래 부르고 춤출 때 사용하는 슬(瑟)이 있는데 그 모양이 중국의 현악기 축(筑)과 같다. 누에를 쳐서 비단을 짜 입고 베로 만든 도포를 입었다'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을 신창동 유물들은 여실히 입증했다.


◆고도 문화집단 신창동 '광주의 오리진'

국립광주박물관이 개관 30주년을 맞아 펴낸 <유구한 문화의 도시, 광주>(2008)를 보면 신창동을 '광주의 오리진'으로 꼽고 있다. '영산강변의 신창동은 아름다운 천으로 한껏 멋을 부리고, 고품격의 칠기를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풍요로운 삶을 기원하면서 악기를 연주하고 현의 음률을 즐겼던 고도의 문화집단이었다. 이 풍요로운 농경사회는 점진적인 도시화의 체제를 갖추는 원동력이었을 뿐만 아니라 광주천과 영간강변에 잘 정비된 대규모 촌락이 들어서는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이런 측면에서 신창동은 광주의 오리진이었던 것이다.' 2000년 전에 비단과 칠기와 악기와 바퀴를 사용하며 높은 수준의 문화를 누렸던 신창동의 한 부족이 지금 우리의 선조라는 통찰이다.

수레바퀴 복원 모형(지름 165cm, 바퀴살 22개)

"고대 마한은 지금의 광주를 만든 씨앗이지요. 오래된 반쪽의 현악기는 아시아문화 중심도시로, 수레바퀴는 첨단 자동차 산업도시로, 화살촉은 광주를 양궁의 메카로 만들지 않았겠어요?" 박병규 광산구청장이 강기정 광주시장과 나눈 대화라면서 들려준 말이다. 상상이 도약을 넘어 새처럼 날아다니는 비약이 되었지만 딱히 억지라고 꼬집을 수도 없는 말이다. 10현으로 추정되는 현악기 슬의 반쪽을 보면 해마다 5월 파종을 마치고 함께 노래 부르고 춤을 추던 옛사람들이 떠오르고, 그것이 판소리와 임방울과 예향(藝鄕)으로 이어지며, 광주가 아시아문화중심도시로 자리매김하는 오늘과 어찌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바퀴통과 바큇살과 바퀴축이 남아있는 수레바퀴의 조각들을 보면 마차를 타고 수레를 끄는 옛사람들이 떠오르고, 그것이 울산보다 먼저 우리나라 최초로 이곳에 자동차공장이 들어서고 타이어공장으로 이어지며, 광주형 일자리의 산물인 광주글로벌모터스와 어찌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제의 내일이 오늘인 것처럼, 광주의 길은 신창동을 앞바퀴로, 전국을 누비는 캐스퍼(Casper)를 뒷바퀴로 굴러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고기가 승천하여 용이 되다

황룡강은 광산의 젖줄이다. 입암산성에서 발원하여 장성에서 17개 물줄기가 들어오고, 광산에서 사호천 왕동천 평림천 송산천 운수천 평동천 등 12개 하천이 합류한다. 영산강과 합쳐지기까지 52㎞를 흐른다. 물고기가 승천하여 용이 되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황룡강(黃龍江)은 용진산(聳珍山)과 어등산(魚登山) 복룡산(伏龍山) 등 3개의 산을 휘감아 흐른다. 누런 용의 황룡과 물고기가 날아오르는 어등, 용이 엎드리는 복룡, 산하의 이름이 '용'으로 어울렸다. 그래서 그런지 광산에는 큰 인물이 많이 나왔다. 맨 북쪽에 월봉서원, 퇴계와 사단칠정을 논하며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으로 보다 깊은 사유를 보여주며 조선 철학사상사의 한 획을 그은 고봉 기대승이 있다. 그 아래로 용진산 마애불 동쪽에 윤상원이 있다. 1980년 5월26일 그 절체절명의 저녁에, '우리는 오늘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도청으로 들어가는 5.18의 마지막 순교자, 피리 부는 윤상원이 있다. 더 남으로 내려가면 장록습지 동편에 용아 생가.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두야 간다」"로 시작되는 「떠나가는 배」의 시인, 강진의 영랑과 옥천의 지용과 더불어 1930년대 순수시운동을 주도하며 한국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던 시문학파의 시인, 시를 '피의 매침'이라고 했던 용아 박용철이 있다. 더 남으로 내려가면 황룡강이 영산강을 만나는 두물머리 못 미쳐 임방울 생가가 있다. 천성적으로 아름다운 목을 타고나 고음과 저음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호남가'와 '쑥대머리'로 천하에 이름을 떨친 국보급 명창, 암울했던 시대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과 서민들의 애환을 대변했던 가인, 판소리 다섯마당에 두루 정통했던 '서편제 최후의 보루' 임방울이 있다.


◆21개 행정동… 광주 면적 절반 차지

광주 면적의 약 절반을 차지하는 광산구는 21개의 행정동으로 나뉘어져 있다. '솔이 우거진 물가'로 이름 붙여진 광산의 1번지 송정동(松汀). 그곳에는 일제강점기 곡물수탈의 거점이 되어 쌀을 일본과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송출했던 시절, 미 공군이 주둔했던 반세기, 서울의 명동에 버금갈 만큼 은성(殷盛)했던 지난 100년의 이야기가 있다. 어등산과 황룡강을 합친 이름의 어룡(魚龍)동. 충민공 양산숙 일가의 충효열행을 기린 '양씨삼강문'이 있고, 1908년 의병장 김태원 등 23명, 이듬해 1월 20명, 9월 의병 10명이 격전 끝에 장렬히 순국한 그들의 넋이 산과 골에 어린 어등산이 있다. 광주 최초의 교회가 자리했던 잉계마을의 우산동, 배꽃 날리던 마을이 첨단산업의 전진기지가 된 첨단동, 광주권 최대 주거지역으로 평균연령이 32.3세인 젊고 역동적인 거리의 수완동이 있다. 1863년 기근과 학정을 피해 연해주로 떠났던 사람들,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으로 춥고 먼 땅 중앙아시아 우쉬또베에서 망국의 한을 안고 살다가 150여년이 흘러 돌아온 동포 고려인들을 품은 월곡동도 있다. 농지에서 산단으로 상전벽해를 이룬 평동, 동학농민운동의 격전지였던 침산마을의 동곡동, 태조 왕건과 빨래하던 처녀 오씨의 사랑 이야기가 전하는 삼도동, 그 옆으로 너른 들의 본량동이 있다.

광주 신창동 마한유적체험관

광산의 이야기는 두 갈래다. 하나는 황룡강 물길을 따라 오르내리면서 너른 들과 비산비야의 구릉들, 높은 산과 습지들, 그 사이사이에 깃든 마을의 유래와 전설과 흥미로운 이야기들이다. 또 하나는 사람들의 깊으면서 뾰족한 정신에 관한 이야기다. 신창동의 현악기 반쪽이 예향으로 이어지며, 수레바퀴의 축이 자동차공장으로 연결되는 역사의 갈피 속에 고귀한 것과 천한 것이 다르지 않음을 설파한 고봉의 정신이 의병과 동학과 도청으로 복귀하는 윤상원의 뒷모습, 의향(義鄕)과 무관하다고 어찌 말할 수 있을까? 광주의 기원인 광산에 누대로 살아온 사람들의 아름답고 반짝거리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이광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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