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지 호수로, 전답엔 아파트
유서깊은 마을 상전벽해 대변화
담벼락 길목 길목에 옛 각화 모습
예술공간 만들어 사람 냄새 풍겨
[마을에서 인간과 삶을 읽다] 광주 북구 각화마을
수색으로 가면서 수색을 찾지 못했다는 시인의 역설처럼 나도 그런 걸까. 각화마을로 가면서 나는 각화를 찾지 못했다. 가끔 소풍 가며 보았던 예쁜 마을은 어디로 갔을까. 각화, 어떤 암각화라도 있을까 하고 주변을 살펴보아도 그런 각화는 없다. 각화에서 각화를 찾는 일이란 도굴당한 돌방무덤의 원형을 찾는 것만큼이나 쉽지가 않다.
아니면 무등산의 그 어떤 신성한 영물의 뿔이 막 돋아나는 곳이 이곳 아닐까. 어떤 모퉁이 각진 곳에 있어서 각화일까. 여하간 각화(角化)마을은 없고 뜻밖의 곳에서 각화를 만났다. 각화는 고샅 골목골목에 그림으로 글로 있었다. 담벼락에 아파트 벽에 또는 길목에 널브러진 조각으로 그렇게 각화(刻畵)된 각화가 있었다.
각화는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졌다. 거대한 고가도로 주탑과 아파트가 뿔처럼 날카롭게 우뚝 섰다. 물은 아래로 흐른다는 말은 이곳에서 맞지 않는다. 오히려 아래에서 밀고 올라와 위를 변화시켜버린 곳, 상전벽해가 바로 각화다.
나는 매일 밤 수색으로 가는데 수색은 보이지 않는다./ 모래내를 지나 수색 표지판 밑으로 들어가지만/ 여기가 수색 같지는 않다./ 수색은 이곳이 아닐 것이다 수색이란 말만 있을 뿐이지 -수색으로 가며- 고형렬
◆상전벽해가 된 각화마을
여하간 각화(角化)마을은 없고 뜻밖의 곳에서 각화를 만났다. 각화는 고샅 골목골목에 그림으로 글로 있었다. 담벼락에 아파트 벽에 또는 길목에 널브러진 조각으로 그렇게 각화(刻畵)된 각화가 있었다. 각화는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졌다.
거대한 고가도로 주탑과 아파트가 뿔처럼 날카롭게 우뚝 섰다. 물은 아래로 흐른다는 말은 이곳에서 맞지 않는다. 오히려 아래에서 밀고 올라와 위를 변화시켜버린 곳, 상전벽해가 바로 각화다.
누구네 집에서나 비는 내린다./ 비에 젖는다./ 내 마음에도 비는 내린다./ 비에 젖는다./ 비오는 날은 / 쓸쓸한 날 아니고 / 사람이 그리운 날 / 무진장 사람이 그리운 날이다. 사람이 그리운 날-최봉희
◆호수로 변한 각화지
각화마을 어귀에 새겨진 시인의 시처럼 각화도 그립고 사람도 그리운 곳이 각화다. 늙숙한 노인이 마늘밭을 매고 있다. 불과 몇 년 만에 각화동이 눈 깜짝할 사이 변했단다. 마을에 들어선 아파트에 사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떠나고 없다며, '신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곳 없다'고 긴 한숨을 내쉰다.
"돈 아무 소양 없어, 지내놓고 봉게 맹갈맨치로 날가가븐 거시 돈이고 인생이등마…."
각화동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땅 부자들이 많이 생기지 않았느냐는 말에 노인은 한숨을 쉰다. 몇 걸음 올라가니 할아버지가 일을 하고 계신다. 따뜻해서 나왔단다. 올해 85살이라는 어르신 손에 시장에서 막 사왔다는 도라지 씨앗이 들려있다.
각화저수지에 산책 나온 사람이 많다. 정월 대보름에는 아랫마을 평교나 문산 마을 사람들과 자주 불놀이를 했다는 정종호(77) 할아버지는 주로 여름철 서방을 비롯한 시내 사람들이 이곳 저수지로 자주 물놀이를 왔단다. 이제 농업용수로 사용하지는 못하지만 물은 여전히 사람을 순하게 만든다며 각화제에 대한 자랑이 대단하시다. 많은 주민들이 호젓한 호수를 오가며 여러 가지 상념을 씻고 가는 곳이란다.
◆문화가 있는 문화 마을로
각화마을은 구한말 광주군 두방면 각화리였다. 마을에 흑석점이라는 주막이 있었으며, 마을 앞 조횟들을 따라 장수논 정가배미 등 기름진 옥토가 펼쳐졌다. 마을 뒤로 큰골, 꼬시랑굴, 들싸릿재가 있고, 소까끔, 소웃등 고개가 있는 것으로 봐서 소가 물을 마시기 위해 고개를 숙인 형국, 그 소의 뿔 부분이 각화(角化)마을임을 짐작할 수 있다. 바탈봉 산자락 모서리 부분, 각(角)진 모퉁이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그렇게 조용하던 마을이 1991년 2월 각화동도매시장이 개장하면서 급변하기 시작했다.
농사를 짓던 이들이 농산물 시장으로 대거 들어갔다. 물건을 실어 나르거나 파를 다듬고 그렇게 반농반상이 됐다. 거기다 2007년 5월 제2순환도로가 뚫리면서 각화동은 변방에서 중심으로 급변하게 됐다. 외지인이 땅을 보러 들어왔고, 마을 사람들도 시내로 빠져나갔다.
그 변화의 와중에 긍정적인 측면도 없지 않다. 지금은 각화동 주변을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화는 물론 조각 작품이 감성을 자극한다. 비록 마을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사람 냄새가 풍긴 것은 구청과 지역자치위원회의 노력 덕분이다.
그분들이 장기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시민들을 참여시켜 민관이 함께 하는 예술 공간을 만든 것, 곧 각화마을을 중심으로 문화동을 시와 그림으로 채워 넣는 작업은 기발한 한 수였다. 고가 주변으로 시화가 속속 자리를 잡으면서 문화가 있는 문화동, 사람 살기 좋은 동으로 발전해 가고 있다. 각화동에서 40년간 작품 활동을 해온 정태헌 수필가의 작품 대부분이 각화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각화동 사람들의 다양한 온정과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지금 각화동엔 광주 문인들의 꿈인 광주문학관이 완공 단계에 이르렀다.
◆그리운 각화마을 사람들
마갈재골 입구에는 호남전기 창설자 심만택 선생와 그의 아들이자 2대 회장 심상하 선생의 묘비가 있다. 애절하게 쓴 후손의 사부곡이 가는 길을 붙잡는다. 차남 심상우씨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는 중, 아웅산 사태로 짧은 생애를 마친 각화동 사람이다. 심 의원은 특히 재담이 뛰어났는데, 동료 남재희 의원이 남긴 회고담 하나를 소개한다.
내가 만난 최고의 재담꾼은 단연 심 의원이다. 함께 있으면 몇 시간이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웃기고, 돌발적인 상황에도 재치 있는 유머로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내장산에서 세미나를 할 때 무등산수박을 차로 실어 왔다. 쪼개 보니 설익은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실망한 표정이었는데 그때 심 의원이 마이크를 잡고 "사무국장에게 수박을 보내라고 말했더니 잘못 듣고 호박을 보냈네요." 해서 순간을 재치 있게 웃으며 넘어갔단다. 그의 아들 심현섭 군도 아버지를 닮아 개그맨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각화동 북쪽 자락에는 함평 이씨 제각과 함께 세종의 사랑을 받은 이긍(1389~1433)의 묘와 제각이 있다. 1405년(태종 5)과 1427년(세종 9) 두 번이나 문과에 급제한 뒤 중앙 관직을 두루 거친 그는 1433년(세종 15) 당시 명나라 사은부사로 북경에 가던 도중 병을 얻어 압록강에서 생을 마감한 선비다. 각화마을은 군왕봉의 기운을 받은 곳으로 삼국시대 돌방무덤이 두 군데나 발견된 곳일 정도로 유서 깊은 마을이다. 그럼에도 이제 흔적이 없는 마을이 되고 말았다.
꽃은/ 피는 게 아냐/ 그리움이/ 터진 거지/ 내 온몸의/ 피가/ 열꽃되어/ 터진 게야/ 꽃비로/ 당신 적시려/ 혼을 활활/ 태운 게야. 꽃은 피는 게 아냐-이구학
◆각화마을에서 변화를 읽다
각화저수지도 호수로, 전답은 농산물시장과 아파트가 들어섰다. 각화동은 변화의 중심이다. 주택 대신 고층 아파트가, 나무꾼 대신 고속도로에 차들이 씽씽 지나가고 있다. 각화에서 변화를 읽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각화마을 사람들이 남긴 사람의 향기가 이구학 시인의 시처럼 그윽하다. 또한 인근 시민들과 각화초 학생들의 삶의 향기가 시와 그림으로 잔잔하게 풍겨온다. 저수지 둑 위의 바람개비가 세차게 돌아간다. 바람개비를 돌리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시간이나 변화인지 모른다. 각화동은 오늘도 아파트가 쑥쑥 올라가고 있다. 농산물시장도 교도소처럼 이전하려는지 이전 이야기가 슬슬 나온다. 각화는 지금 여전히 변신 중이다. 박용수 시민전문기자 toamm@hanmail.net
박용수는 화순 운주사가 있는 곳에서 태어났다. 전남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줄곧 수필 쓰기만 고집해 왔다. ‘아버지의 배코’로 등단하여, 광주문학상, 화순문학상, 광주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하였다. 광주동신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며, 작품으로 꿈꾸는 와불, 사팔뜨기의 사랑, 나를 사랑할 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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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인돌 닮은 천불천탑 타고 들불처럼 퍼진 민중의 불씨 운주사 석불[마을에서 인간과 삶을 읽다] 화순 운주사와 고인돌◆같은 산을 등지고 살아가는 한 마을화순 운주사와 화순 고인돌은 시오리 떨어진 산기슭에 어우러져 있다. 모산마을과 중장터는 같은 산을 등지고 살아가는 한 마을이나 마찬가지여서 고인돌을 만들었던 이나 그 후손들이 천불천탑을 쌓았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효산리에서 용강리까지 고인돌이 노둣돌처럼 놓여 있고, 운주사의 구층석탑을 포함한 많은 탑은 실제 고인돌 형태를 띠고 있다.달 바위 고인돌천 개의 탑과 부처 그리고 천여 기의 고인돌, 같이 바위와 돌을 자르고 쌓고 세운 그들의 꿈은 대저 무엇이었을까.50여 년 전에 운주사를 찾는 이가 참 많았다. 황석영 작가의 장길산 배경이 되어서인지 80년대 많은 사람이 운주사 미륵불을 통해 답답한 세상의 탈출구를 찾고 그 의미를 해석하고자 했다. 85년 전남 도청 앞에서 독재 타도를 외치며 분신한 홍기일, 87년 미 제국주의를 비판하며 최후를 선택한 박선영 열사 모두 망월묘지에 잠든 이곳 태생이다. 이들 모두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부처 같은 이들이었다.초파일이면 면민 모두가 모여 고단한 노동을 잠시 쉬고 용화 세상을 이룬 것처럼 운주사 설화는 이들의 입과 귀를 통해 들불처럼 퍼지고 옮겨져서 개인의 소망에서 나아가 지역의 꿈, 나라의 꿈으로 승화되어 민중들의 가슴에 불씨로 자라났다.◆평온이 깃들길 기원하며 하나하나 조성볍씨 하나조차 애지중지하는 사람들이 바위를 찍고 다듬어 천개의 탑과 천개의 부처를 만들려고 했을 때는 분명 어떤 목적이나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천 개의 탑과 천 사람의 부처, 그들이 모여 산 중장터는 옛날의 화려함은 오간 데 없고, 여기저기 흩어진 천불처럼 그 많던 사람들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들이 거닐던 거리엔 고양이 몇 마리만 어슬렁거린다. 용강 마을 노인정 기둥은 운주사 탑신을 주춧돌로 해서 아직도 여전하건마는 젊었을 적 힘깨나 썼던 청년들은 어느새 노인이 되어 낡아 있다. 고양이나 노인들이나 중장터에서는 모두 석탑이고 부처다. 운주사 석불을 영락없이 닮아, 말도 없고 조용하다.운주사 석탑용강에서 백사장터 고개를 넘으면 천태이고 등광이다. 박춘기 님은 운월리의 운월(雲月)을 운주사의 달로 해석한다. 운월 마을에 달이 뜨고, 그 달이 못에 비추니 지월(池月) 마을이란다. 천태(天台) 마을의 별이 빛나면 사람들은 천태산에 오르기 위해 등불을 들고 등광(燈光) 마을에 오른다는 것이다. 결국 원천(源泉) 마을에서 솟아난 샘물이 깨끗하게 정화된 정천(淨川) 마을을 흘러 푸른 못의 벽지(碧池) 마을에 담기는 용화세계인 곧 도량인 도장(道場) 마을을 앞에 펼쳐진다는 것이다.운주사 석두정말 도암 마을들은 운주사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다. 운주사가 법화경 중에 견보탑품 중 한 장면이 석가모니불이 설법하고 있는 장면을 재현했든 그렇지 않았든지 그들이 사는 세상에 평화가 그리고 그들의 마음에 평온이 깃들길 기원하며 하나하나 조성했던 것만은 분명하다.원천리 마을 앞 입석처럼 도암 어느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은 신앙이나 이념에 상관없이 돌을 세워 마을의 안녕과 자신들의 소망을 기원했다. 그런 돌들이 도암 곳곳에서 그 옛날 그들의 말을 전해주려는 듯 서 있다. 바람이 불 때면 돌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곳, 그곳이 도암이다.◆세계 어디보다 숫자·규모에서 단연 으뜸화순 고인돌군은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를 잇는 계곡 일대에 분포하고 있다. 그곳을 걷노라면 마치 오래된 과거 속으로 들어간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의 고인돌 군에 빠져든다. 언덕에 숲속에 바위를 뿌려놓은 듯 산재한 고인돌, 이쯤 되면 나도 손에 돌도끼를 들고 우왕 우왕 외치는 절로 선사시대 사람이 된다.거지탑과 석불들화순 고인돌군의 대표적인 특징은 엄청난 양과 어마어마한 크기이다. 무엇보다 좁은 지역 안에 596여 기가 밀집된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으며, 대신리에 있는 지석묘는 무게가 280여 톤, 효산리 고인돌은 100여 톤 이상으로 추정될 만큼 엄청나다.운주사의 천불천탑이나 이곳 고인돌은 대한민국, 세계 어디보다 숫자와 규모 면에서 단연 으뜸이다. 그런데도 아이러니하게도 마을 뒤에 인적이 끊긴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이어서 지금까지 잘 보전되었다.'모아이 석상'이라고 불릴 만한 화순 고인돌을 보고 있노라면 혹여 그들이 제단으로 만들었든 당대 사람들의 무덤으로 또는 그 어떤 천상의 별자리로 만들었든 옛날 사람들은 돌로 이렇게 우리에게 유언 같은 말을 남기려 했던 것은 분명하다. 이 많은 바윗돌의 양이나 배치를 통해 전하려고 한 말은 무엇일까.고인돌이 있는 곳과 운주사는 사실 하나의 산이다. 운월과 도장 마을 앞과 논밭에는 고인돌이 많다. 과거의 역사와 삶을 오늘날 사용하는 도곡, 도암이라는 행정구역명으로 나눈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두 곳의 돌도 사람도 같은 것이다. 실상 석질도 같고 산세도 비슷하며 심지어 두 곳 모두 채석장도 유사하기보다 같다.감태바위 채석장화가는 붓으로, 가수는 목소리로 연기자는 몸으로 자신의 세계를 표현한다는데, 어쩌면 이들은 돌로 자신의 무엇을 표현하지 않았을까.마침 모산마을 입구에 최근 80년대 독재 정권에 대항하여 외롭고 의롭게 민주주의를 변론했던 홍남순 변호사의 생가를 복원하였다. 당신이야말로 바위보다 더 단단한 독재에 맞서 싸운 진짜 바위 같은 사람, 바위 같은 고인돌이다. "못 살더라도 항상 깨끗하게 살아야 죽음에 이를 때에는 아무런 부끄럼 없이 역사 앞에 발을 뻗을 수 있다."라는 평소의 말씀처럼 당신은 지금 당신 마을 앞에 놓인 수많은 고인돌 중 하나로 두 발을 뻗고 있을 성싶다.불회사 입구에 석장승을 볼 때마다 홍남순 변호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석장승은 무섭기보다 정겹다. 참 재밌다. 주름 가득한 얼굴에서 미소를 읽는다. 이렇게 늙고 싶다. 이 장승이야말로 이곳 사람들의 내면을 가장 잘 표현한 것 아니겠는가.◆바위 깎고 세우는 의지를 누가 말리겠는가운주사의 석불과 석탑, 그리고 효산리 고인돌이 바위에서 떼어내 돌이 되었듯이 또 그렇게 세월이 흐른 뒤, 모래처럼 부서질 것이다. 오랜 세월이 또 흐른 뒤, 누군가 그 조각들로 이루어진 사막을 걷게 될지도 모른다.홍남순 변호사 생가사막을 걸어본 적이 있다. 수많은 모래를 밟으며 걸었다. 그건 모래라고 하지만 수많은 돌조각, 아니 돌의 뼈를 밟고 지나갔다. 풍화되고 또 풍화된, 흘러내리고 또 흘러내려 흙이 빠진 바위의 조각들, 파편들만 남은 모래밭에 앉아서 이렇게 중얼거릴지 모른다. '바위에 세긴들, 또 단단한 돌에 새긴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물에 씻기고 바람에 씻겨 기어이 이렇게 부서지고 없어져 버릴 것을.'결국 삶이란 또 그렇게 돌처럼 바위처럼 묵묵히 꿈꾸듯 살다 부서지는구나. 그런데도 또 바위를 깎고 세우려는 의지를 누가 말리겠는가. 바위가 돌로 그리고 돌이 모래가 된 영겁을 읽고 해독한 일은 가능이나 할까. 박용수 시민전문기자 toamm@hanmail.net박용수는 화순 운주사가 있는 곳에서 태어났다. 전남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줄곧 수필 쓰기만 고집해 왔다. ‘아버지의 배코’로 등단하여, 광주문학상, 화순문학상, 광주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하였다. 광주동신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며, 작품으로 꿈꾸는 와불, 사팔뜨기의 사랑, 나를 사랑할 시간이 있다.
- · 나는 시방 '텅 빈 정자' 몇 개를 연거푸 지나고 있다
- · 헤아릴 수 없는 이야기가 낙지처럼 줄줄 끌려 나온다
- · 좋은 환경에서 훌륭한 인물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 귀향의 갈증은 어머니 품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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