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속 계수나무 골짜기 계곡마을
별·달 땅이름 행성·성산·사성동
하늘 나라를 지상에 펼쳐 놓은 듯
은하수가 강을 이뤄 ‘강의리’란다
[마을에서 인간과 삶을 읽다] 담양 대전면 대치마을
담양은 어디든 명소이다. 관방제와 메타세쿼이아길을 걸으며 인공미를, 죽녹원과 추월산은 자연미를, 소쇄원과 독수정에서는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진 정취에 흠뻑 빠질 수 있는 곳이다.
읍내에서 용산교차로 방향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담양습지다. 습지 곳곳에서 자연은 물론이고, 그 속에서 분주하게 고기를 잡는 새들을 볼 수 있다. 유년 시절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는 뿌리, 고향의 모습이다. 예전엔 물이 맑고 모래가 고와서 '모래내'라고 했단다. 고개를 잠깐 드니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웃독이 셧? 거시 秋月山(추월산) 머리 짓고 /
龍龜山(용귀산) 夢仙山(몽선산) 佛臺山(불대산)이 虛空(허공)에 버러거든 /
遠近(원근) 蒼崖(창애)의 머믄 것도 하도 할샤 <후략>
-송순, 면앙정가 중에서-
병풍산·불태산·몽성산 ·용구산이다. 그중 이집트 피라미드를 닮은 산이 금방 눈에 띈다. 사람인(人) 세 개가 겹쳤다는 삼인산, 태조 이성계가 제를 올리고 기도를 해서 왕위에 올랐다는 전설이 서린 몽성산이라고도 한다.
그 병풍산과 불태산 사이로 한재 골짜기가 흐르고, 그 아래 대치마을이 그리고 그 주변의 너른 품에 올망졸망 대전면 마을들이 형성되어 있다. 월인(月印) 마을이 달의 형국이고 뒷산에 토끼등이 있다. 아랫마을은 토끼가 칡을 좋아하기 때문에 갈전(葛田) 마을이고, 달에 있다는 계수나무가 있는 골짜기 마을이 계곡(桂谷)이다. 하늘에는 달과 함께 별도 있기에 옆 마을이 행성과 성산 그리고 사성동(四星洞)이다. 또 은하수가 강을 이루니 강의리란다. 마치 하늘나라를 지상에 펼쳐놓은 듯하다.
"쩌그 아랫마을 추어탕이 찐하제라. 대나무 삼겹살도 맛있제잉"
점심 때라 맛집을 알려준다. 대치에서는 어느 곳이나 맛집이다. 뒷산과 담양천에서 나오는 풍부한 재료 덕분인지 맛도 있고 양도 풍성하다.
◆문중행사에 후손들 구름같이 몰려와
한재골은 한양 가기 위해 넘어야 했고, 나뭇짐을 지고 내려와야 했던 가풀막이다. 투구봉 아래 장군대좌라는 큰 바위가 걸려 있는 통싯굴과 중간에 잿막이 있었던,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한재초교를 나온 졸업생들의 단골 소풍지였다.
물이 좋아 중간중간에 보가 잘 형성되었고, 이 물을 마을 식수로 사용도 했단다. 남자들은 한샘 보에서 여자들은 담태 보에서 멱을 감기도 했다. 70년대 군사 도로가 산 중턱을 통해 장성으로 뚫렸지만, 그전에는 이 골짜기를 중심으로 대치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재 계곡이 대치의 뿌리인 셈이다.
윗마을 평장리가 광산 김씨 뿌리라면 대치는 영천 이씨의 세거지이다. 두 성씨 모두 이곳을 중심으로 후손들이 번성해 그 후손이 100만명을 넘었을 정도이고, 몇 해 전만 해도 시제를 모시거나 문중 행사를 하는 날에는 전국 방방곡곡에 사는 후손들이 구름같이 몰려와서 대치가 떠들썩했다. 대치는 영천 이씨를 빼고 이야기할 수 없는 영천 이씨의 뿌리 깊은 마을이다.
◆늦게까지 여는 한재장, 경제적 뿌리
예전 대치는 온통 대나무밭이었다. 젓갈 장수가 한번 들어오면 나갈 길을 몰라서 울고 다닐 정도로 마을이 크고 길이 깊고 복잡했다.
척서정(滌暑亭)은 한양 과거 길에 나선 선비가 장성으로 가기 위해서 꼭 지나쳐야 하는 곳인 중부마을 중앙에 있는 정자이다. 대개 그곳에서 서로 시 한 수씩을 읊으며 마음을 다졌단다. 조선 시대에는 강학 장소로 쓰였으며, 6·25 때는 한재 초등학교가 소실되자, 학교에서 이곳에 칸막이를 치고 수업을 하기도 하였다.
"기둥 밑동가리를 봐봐, 썩어서 새로 이었제, 글고 지둥 중간에 구녁이 있어 겨울에 공부할 때 어찌나 춥던지 천막을 쳤지, 그 구녁이 바로 천막을 쳤던 흔적이여."
어렸을 때, 형 공부하는 모습을 기억하신 이장호(78세) 할아버지의 이야기다. 대치는 온통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당연히 대치 장이 번창했고, 장날이면 얼마나 사람들이 많던지 척서정까지 와서 밤에까지 윷판을 벌였단다.
척서정 위로 간촌 입구 입석이자 한양 길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고 아래로는 쌍계정(雙溪亭)이 있다. 봄인지라 할머니 한 분이 빨래하고 계신다. 예전엔 한 겨울에도 마을 아낙네들이 소설 '천변 풍경'처럼 손이 빨갛게 되도록 빨래를 했단다. 그 여인네들의 애환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랑물은 느티나무 뿌리를 적시며 무심하게 흐르고 있다.
대치 마을의 담들은 모두 높지 않다. 고개를 내밀면 집 안이 훤히 보인다. 씨족 사회의 단단한 결속력을 읽을 수 있다. 척서정에서 몇 걸음 내려가면 장터다. 지금 요양원 근처가 쇠전이었고, 죽물 시장도 컸단다. 장성 남면이나 진원 쪽 장이 신거무 전설로 일찍 장이 끝났지만, 한재 장은 늦게까지 설 정도로 번성했다니 대치의 튼튼한 경제적 삶의 뿌리를 어림짐작할 수 있다.
◆우람한 보호수와 우표박물관
고샅 곳곳에 우람한 보호수가 많은 곳도 대치마을이다. 그 나무들은 수만 개의 나뭇잎을 입처럼 흔들어 왕건과 견훤이라는 백제의 뿌리를 살랑살랑 들려준다. 대표적인 나무는 한재 초등학교에 느티나무로 천연기념물 284호이다. 태조 이성계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공을 들일 때 심은 나무로, 그 생명의 뿌리가 무려 600년이 넘었단다. 원래 세 나무였는데, 한 뿌리가 되었단다. 다만 그 뿌리를 확인할 길이 없어 아쉽다.
뿌리 하니까,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쇠 곧도코 여름하나니, 훈민정음 제 1장이 떠오른다.
이곳 대치 영천 이씨 집안에서 이돈주, 이기갑 교수처럼 국문학 분야에 관심이 있는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들노래와 남도 민요에 대해 조예가 깊은 목포대 이경엽 교수는 중산층 사람들이 소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고향 대치에 귀향해서 고향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단다. 남도 문학의 한 뿌리가 대치일 성도 싶다.
대치에는 전국 최초이자 전국에 유일한 우표박물관이 있다. 2015년부터 박물관을 운영해 온 이진하 관장님은 어린 학생들에게 작은 우표를 통해 넓은 세상을 읽는 통찰력을 키워주고 싶다고 한다. 우체통 만들기나 정리하기 등을 통해 우표라는 세계에 담겨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관계의 뿌리를 잇고 관계를 찾는 의미 있는 체험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대치는 8개 행정리로 이루어진 큰 마을이다. 창평이 고택 냄새가 난다면 한재는 꼭 외가댁을 온 것처럼 평온하다. 그건 순전히 모계 사회의 전통, 뿌리 때문일 것이다. 삶이 허전해서 삶의 근원인 뿌리를 찾고 싶다면 대치가 맞춤이다. 자연의 뿌리가 그립거든 한재골로, 사람의 근본이 궁금하면 대치로 가는 것도 좋겠다. 박용수 시민전문기자 toamm@hanmail.net
박용수는 화순 운주사가 있는 곳에서 태어났다. 전남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줄곧 수필 쓰기만 고집해 왔다. ‘아버지의 배코’로 등단하여, 광주문학상, 화순문학상, 광주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하였다. 광주동신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며, 작품으로 꿈꾸는 와불, 사팔뜨기의 사랑, 나를 사랑할 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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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인돌 닮은 천불천탑 타고 들불처럼 퍼진 민중의 불씨 운주사 석불[마을에서 인간과 삶을 읽다] 화순 운주사와 고인돌◆같은 산을 등지고 살아가는 한 마을화순 운주사와 화순 고인돌은 시오리 떨어진 산기슭에 어우러져 있다. 모산마을과 중장터는 같은 산을 등지고 살아가는 한 마을이나 마찬가지여서 고인돌을 만들었던 이나 그 후손들이 천불천탑을 쌓았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효산리에서 용강리까지 고인돌이 노둣돌처럼 놓여 있고, 운주사의 구층석탑을 포함한 많은 탑은 실제 고인돌 형태를 띠고 있다.달 바위 고인돌천 개의 탑과 부처 그리고 천여 기의 고인돌, 같이 바위와 돌을 자르고 쌓고 세운 그들의 꿈은 대저 무엇이었을까.50여 년 전에 운주사를 찾는 이가 참 많았다. 황석영 작가의 장길산 배경이 되어서인지 80년대 많은 사람이 운주사 미륵불을 통해 답답한 세상의 탈출구를 찾고 그 의미를 해석하고자 했다. 85년 전남 도청 앞에서 독재 타도를 외치며 분신한 홍기일, 87년 미 제국주의를 비판하며 최후를 선택한 박선영 열사 모두 망월묘지에 잠든 이곳 태생이다. 이들 모두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부처 같은 이들이었다.초파일이면 면민 모두가 모여 고단한 노동을 잠시 쉬고 용화 세상을 이룬 것처럼 운주사 설화는 이들의 입과 귀를 통해 들불처럼 퍼지고 옮겨져서 개인의 소망에서 나아가 지역의 꿈, 나라의 꿈으로 승화되어 민중들의 가슴에 불씨로 자라났다.◆평온이 깃들길 기원하며 하나하나 조성볍씨 하나조차 애지중지하는 사람들이 바위를 찍고 다듬어 천개의 탑과 천개의 부처를 만들려고 했을 때는 분명 어떤 목적이나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천 개의 탑과 천 사람의 부처, 그들이 모여 산 중장터는 옛날의 화려함은 오간 데 없고, 여기저기 흩어진 천불처럼 그 많던 사람들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들이 거닐던 거리엔 고양이 몇 마리만 어슬렁거린다. 용강 마을 노인정 기둥은 운주사 탑신을 주춧돌로 해서 아직도 여전하건마는 젊었을 적 힘깨나 썼던 청년들은 어느새 노인이 되어 낡아 있다. 고양이나 노인들이나 중장터에서는 모두 석탑이고 부처다. 운주사 석불을 영락없이 닮아, 말도 없고 조용하다.운주사 석탑용강에서 백사장터 고개를 넘으면 천태이고 등광이다. 박춘기 님은 운월리의 운월(雲月)을 운주사의 달로 해석한다. 운월 마을에 달이 뜨고, 그 달이 못에 비추니 지월(池月) 마을이란다. 천태(天台) 마을의 별이 빛나면 사람들은 천태산에 오르기 위해 등불을 들고 등광(燈光) 마을에 오른다는 것이다. 결국 원천(源泉) 마을에서 솟아난 샘물이 깨끗하게 정화된 정천(淨川) 마을을 흘러 푸른 못의 벽지(碧池) 마을에 담기는 용화세계인 곧 도량인 도장(道場) 마을을 앞에 펼쳐진다는 것이다.운주사 석두정말 도암 마을들은 운주사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다. 운주사가 법화경 중에 견보탑품 중 한 장면이 석가모니불이 설법하고 있는 장면을 재현했든 그렇지 않았든지 그들이 사는 세상에 평화가 그리고 그들의 마음에 평온이 깃들길 기원하며 하나하나 조성했던 것만은 분명하다.원천리 마을 앞 입석처럼 도암 어느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은 신앙이나 이념에 상관없이 돌을 세워 마을의 안녕과 자신들의 소망을 기원했다. 그런 돌들이 도암 곳곳에서 그 옛날 그들의 말을 전해주려는 듯 서 있다. 바람이 불 때면 돌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곳, 그곳이 도암이다.◆세계 어디보다 숫자·규모에서 단연 으뜸화순 고인돌군은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를 잇는 계곡 일대에 분포하고 있다. 그곳을 걷노라면 마치 오래된 과거 속으로 들어간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의 고인돌 군에 빠져든다. 언덕에 숲속에 바위를 뿌려놓은 듯 산재한 고인돌, 이쯤 되면 나도 손에 돌도끼를 들고 우왕 우왕 외치는 절로 선사시대 사람이 된다.거지탑과 석불들화순 고인돌군의 대표적인 특징은 엄청난 양과 어마어마한 크기이다. 무엇보다 좁은 지역 안에 596여 기가 밀집된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으며, 대신리에 있는 지석묘는 무게가 280여 톤, 효산리 고인돌은 100여 톤 이상으로 추정될 만큼 엄청나다.운주사의 천불천탑이나 이곳 고인돌은 대한민국, 세계 어디보다 숫자와 규모 면에서 단연 으뜸이다. 그런데도 아이러니하게도 마을 뒤에 인적이 끊긴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이어서 지금까지 잘 보전되었다.'모아이 석상'이라고 불릴 만한 화순 고인돌을 보고 있노라면 혹여 그들이 제단으로 만들었든 당대 사람들의 무덤으로 또는 그 어떤 천상의 별자리로 만들었든 옛날 사람들은 돌로 이렇게 우리에게 유언 같은 말을 남기려 했던 것은 분명하다. 이 많은 바윗돌의 양이나 배치를 통해 전하려고 한 말은 무엇일까.고인돌이 있는 곳과 운주사는 사실 하나의 산이다. 운월과 도장 마을 앞과 논밭에는 고인돌이 많다. 과거의 역사와 삶을 오늘날 사용하는 도곡, 도암이라는 행정구역명으로 나눈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두 곳의 돌도 사람도 같은 것이다. 실상 석질도 같고 산세도 비슷하며 심지어 두 곳 모두 채석장도 유사하기보다 같다.감태바위 채석장화가는 붓으로, 가수는 목소리로 연기자는 몸으로 자신의 세계를 표현한다는데, 어쩌면 이들은 돌로 자신의 무엇을 표현하지 않았을까.마침 모산마을 입구에 최근 80년대 독재 정권에 대항하여 외롭고 의롭게 민주주의를 변론했던 홍남순 변호사의 생가를 복원하였다. 당신이야말로 바위보다 더 단단한 독재에 맞서 싸운 진짜 바위 같은 사람, 바위 같은 고인돌이다. "못 살더라도 항상 깨끗하게 살아야 죽음에 이를 때에는 아무런 부끄럼 없이 역사 앞에 발을 뻗을 수 있다."라는 평소의 말씀처럼 당신은 지금 당신 마을 앞에 놓인 수많은 고인돌 중 하나로 두 발을 뻗고 있을 성싶다.불회사 입구에 석장승을 볼 때마다 홍남순 변호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석장승은 무섭기보다 정겹다. 참 재밌다. 주름 가득한 얼굴에서 미소를 읽는다. 이렇게 늙고 싶다. 이 장승이야말로 이곳 사람들의 내면을 가장 잘 표현한 것 아니겠는가.◆바위 깎고 세우는 의지를 누가 말리겠는가운주사의 석불과 석탑, 그리고 효산리 고인돌이 바위에서 떼어내 돌이 되었듯이 또 그렇게 세월이 흐른 뒤, 모래처럼 부서질 것이다. 오랜 세월이 또 흐른 뒤, 누군가 그 조각들로 이루어진 사막을 걷게 될지도 모른다.홍남순 변호사 생가사막을 걸어본 적이 있다. 수많은 모래를 밟으며 걸었다. 그건 모래라고 하지만 수많은 돌조각, 아니 돌의 뼈를 밟고 지나갔다. 풍화되고 또 풍화된, 흘러내리고 또 흘러내려 흙이 빠진 바위의 조각들, 파편들만 남은 모래밭에 앉아서 이렇게 중얼거릴지 모른다. '바위에 세긴들, 또 단단한 돌에 새긴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물에 씻기고 바람에 씻겨 기어이 이렇게 부서지고 없어져 버릴 것을.'결국 삶이란 또 그렇게 돌처럼 바위처럼 묵묵히 꿈꾸듯 살다 부서지는구나. 그런데도 또 바위를 깎고 세우려는 의지를 누가 말리겠는가. 바위가 돌로 그리고 돌이 모래가 된 영겁을 읽고 해독한 일은 가능이나 할까. 박용수 시민전문기자 toamm@hanmail.net박용수는 화순 운주사가 있는 곳에서 태어났다. 전남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줄곧 수필 쓰기만 고집해 왔다. ‘아버지의 배코’로 등단하여, 광주문학상, 화순문학상, 광주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하였다. 광주동신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며, 작품으로 꿈꾸는 와불, 사팔뜨기의 사랑, 나를 사랑할 시간이 있다.
- · 나는 시방 '텅 빈 정자' 몇 개를 연거푸 지나고 있다
- · 헤아릴 수 없는 이야기가 낙지처럼 줄줄 끌려 나온다
- · 좋은 환경에서 훌륭한 인물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 귀향의 갈증은 어머니 품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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