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서 인간과 삶을 읽다

귀향의 갈증은 어머니 품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입력 2022.05.25. 19:01 이석희 기자
[마을에서 인간과 삶을 읽다] 광주시 서구 만귀정(晩歸亭)
벚꽃과 만귀정

[마을에서 인간과 삶을 읽다] 광주시 서구 만귀정(晩歸亭) 

고향은 어머니의 품과 같다. 그래서 누구나 때가 되면 돌아가야겠다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고향이다. 열심히 살다가 문득 삶의 무게가 느껴질 때 잠시 위안받을 안식처를 찾으면 그래도 그리운 사람들, 그리운 산천을 먼저 떠올린다. 누구나 젊어서는 청운의 꿈을 꾸지만, 마지막 꾸는 꿈은 귀향이다. 고향은 그래서 보통명사라기보다 고유명사다.


◆백마산과 난세 영웅 의병장

영산강과 황룡강과 만나는 합수머리, 백마산 앞 넓은 들판이 펼쳐진 곳에 세하(細荷)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만귀정 성석

산 능선이 말안장처럼 유연하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면 용맹스러운 장수가 나타났고, 때마침 건너편 산에서 백마가 나타나 출전하여, 그가 칠천 척의 검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백성을 괴롭히는 왜놈 모가지가 수천 명씩 떨어져 나갔다는 백마산이다. 한번 고삐를 당기면 백마는 당장이라도 박차고 올라 금성산을 돌아 무등산을 넘어갈 기세다. 왜적이 다 물러나고 난 후, 그 장수가 홀연히 다시 사라졌다는 곳이 백마산 아니던가.

동하마을에서 나고 자란 김세근 의병장(1550~1592)이 왜놈 침략에 대비하여 자신의 장병을 훈련시킨 곳이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 장병들을 이끌고 고경명 장군 휘하에 종군하여 수많은 왜군을 물리쳤고, 잠시 귀향(歸鄕)하여 요양 중에 또다시 금산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공을 세우는 등 난세의 영웅이다. 오늘도 그의 혼이 백마산에서 서창 들녘을 굽어보고 있는 것 같다.

만귀정 연못

◆고향 마을 작은 논에 있던 둠벙

서창 동하마을은 연꽃을 펼친 듯 동그랗고 앙증맞다. 하늘도 둥글고 땅도 둥글다. 이곳에서는 마을도 연못도 만귀정(晩歸亭)도 둥글다. 돌 하나를 던지면 풍덩 하고 여려 겹의 물 동그라미가 물둘레처럼 퍼져나갈 것 같은 그 원형의 정점에 만귀정이 있다.

그런데 못이라기보다 둠벙 운치가 난다. 전라도 어느 마을 들판에나 있었던 토박이말, 누구에게나 심장이 있듯 크든 작든 논에는 으레 둠벙이 있었다. 송사리나 물방개, 물뱀이 있었고, 삽을 씻고 목도 축였던 곳이다. 만귀정 지연은 원래 주변의 논에 물을 대어줄 목적으로 만든 인공 저수지에다 섬과 동산을 만들고 정자를 세운 데서 출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는 어느 교수의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마을에서 하우스 농사를 짓고 있는 주민들이 모여 어떤 종자를 파종할 것인지 예닐곱 명이 정자에 앉아 의견을 나누고 그 주변으로 행인들은 삼삼오오 산책을 하고 있다.

한가한 오후, 여행객이 이곳저곳을 서성이고 있다. 그들이 여기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목이 말랐을 것이다. 날씨가 무더워서라기보다 각자 몸 안에 둠벙, 귀향의 갈증이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들이 물을 찾아온 것은 어쩌면 우리 몸 어딘가에 고향에 대한 물줄기가 흐르고 있어서 그 물을 보충하고 싶거나 모천으로 가고 싶은 실핏줄 같은 본능이 발동해서 여기로 왔을 것이다. 이곳 주인 장창우(張昌羽) 선생처럼.


◆늦게나마 돌아왔으니 행복

만귀정에 있으면 시나브로 행복해진다. 크지도 넓지도 않고 한눈에 아담하게 들어오는 풍경, 줄지어 선 정자가 정겹고, 즐비한 편액의 난해한 한자들도 고풍스럽다. 그 글자들이 무리를 지어 금방이라도 날개를 펴고 호주 주변으로 맴돌 듯하다. 그 글자들이 나무마다 새처럼 매달려 잠시 쉬고 있는 것 같다. 늦게 돌아왔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서창 만드리 축제 츨처 서창 전통한옥문화체험관

주인장의 세세한 내력을 알 순 없다. 다만 늘그막에 누군가가 귀향하여 부모에게 효도하며 후학을 가르치고 동시에 자연 속에서 시를 읊조리고픈 소박한 꿈을 실현한 곳이라는 것쯤 몰라도 괜찮다. 그의 효심이 많은 세월이 지났어도 우리 몸에 물처럼 스며든다. 그러니 그는 나인 셈이고 나 또한 그가 된 셈이다. 눈을 지그시 감으니 '만귀 팔경' 시문이 여덟 폭으로 병풍처럼 눈에 그려진다. 내가 장창우가 된다.

서창만드리 축제

瑞石明月(무등산 달빛 은은하고)/ 龍江漁火(황룡강 고기 잡는 어부들의 불빛 빛나는구나)/ 馬山淸風(백마산 청량한 실바람)/樂浦農船 (극락강 포구에는 농부 실은 배가 오가는구려)/ 漁燈暮雲(어등산 너머 붉은 노을이 지고)/松汀夜雪(송정마을 흰 눈이 밤새 내리누나)/錦城落照(금성산 저녁노을이 짙게 깔리고)/野外長江(서창들 너머 강물이 유장하게 흐르는구려) -장창우 선생의 詩 팔경(八景)

이후에도 원근의 시인묵객들은 이곳에서 시사를 결성하여 정기적으로 시를 짓곤 하였다. 이곳에는 총 29편의 시가 걸려있는데, 대부분의 주제는 자연과 효도이다.


◆ 어등산의 전설이 된 잉어 승천

만귀정은 그냥 땅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서 봐야 제멋이다. 수면에 반사된 풍경, 몸을 낮추면 만귀정과 습향각, 묵암정사가 마치 섬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수면 위로 소금쟁이들이 동그라미를 그리며 노닐고 있다. '용이 된 잉어 할머니'의 전설이 수면 속에서 들려올 것 같고, 한겨울 부모 병구완에 쓰려고 낚은 잉어를 살려주었더니, 자신이 용왕의 아들이라며 효자에게 부모의 병을 낫는 보약을 주고 승천하는 중에 그대로 산이 되었다는 '어등산 전설'의 그 잉어도 어쩌면 여기에서 자랐을 것 같다.

성석과 벽

연못 사이를 장창우가 되어 걷는다. 취석과 상석, 선계에서 인간계에 들렀다가 다시 선계로 나온다. 수면에 담긴 풍경이 더 멋스럽다. 단아하게 출렁이는 정자, 아담해서 예쁘고 작아서 더 아름다운 용궁이다.

예비 신랑신부들이 결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만귀정의 아담한 풍광과 사시사철 피는 꽃들이 청춘남녀를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봄이면 수려한 벚꽃이, 여름과 가을 사이 연분홍 백일홍과 연꽃이 만발한다. 한겨울 설경은 눈부시단다. 작지만 없는 풍경이 없는 만귀정. 그래서 신성일 윤정희 주연의 영화 '꽃상여'와 '탈선 춘향전'을 이곳에서 찍기도 하였다.


◆도시화 옥죄어도 꽃은 핀다

서창하면 20여 년 넘게 '서창 만드리 풍년제'가 열리는 곳이다. 마지막 잡초를 없애는 김매기를 할 때 불렀던 전통적 남도 농요 '만드리'는 삶의 애환을 담고 있으면서도 노동의 피로를 덜 수 있게 구성진 멋이 있다. 그리고 마을 입구 서창 향토문화마을에서는 매일 전통 놀이를 포함한 각종 체험 활동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어린 자녀와 함께 참여하면 좋다.

홍성 장씨 자작일촌 세하동은 최근 마을 뒤로 완도 고속도로가 나면서 땅값도 오르고 외지인들도 많이 들어왔다. 지금도 도시는 만귀정을 옥죄듯 좁혀온다. 그런데도 만귀정에서는 오늘도 꽃이 피고 새소리가 들려온다.

만귀정은 조용히 속삭인다. 고향에 가고 싶거들랑 어머니가 보고 싶거들랑 내게로 오라고. 내 품에서 한 나절 쯤 거닐면 좀 마음에 위안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고향과 부모에 대한 원형적인 심상이 형상으로 남아 있는 곳, 이래저래 만귀정은 과거보다 오늘날 도시인들에게 더 눈부신 이름이고 더 빛나는 장소다.

습향각 가는길

만귀정은 조용히 살랑댄다. 하루만이라도 고향으로, 부모 곁으로 돌아가라고. 그곳에서 오늘 하루만이라도 평온하게 살라고 말이다. 박용수 시민전문기자 toamm@hanmail.net

박용수는 화순 운주사가 있는 곳에서 태어났다. 전남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줄곧 수필 쓰기만 고집해 왔다. ‘아버지의 배코’로 등단하여, 광주문학상, 화순문학상, 광주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하였다. 광주동신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며, 작품으로 꿈꾸는 와불, 사팔뜨기의 사랑, 나를 사랑할 시간이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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