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후반에도 '삼' 이야기만 나오면 가슴이 뜁니다 

입력 2022.05.04. 20:27 김봉일 기자
[‘보성삼베랑’의 이찬식 대표]
서울 생활 접은 뒤 문중 땅 개간
전통기법으로 원단 제작 손가공
작품 변질 안타까워 ‘삼지’ 개발
항균·방추·방염 성분까지 갖춰
일본 화가 구매 등 고객 늘더니
日 외무성, 제작 과정 강연 요청
기술 대이을 사람 있기를 바라
보성 삼베랑의 이찬식 대표는 복내면 행정복지센터 앞 회전교차로에 설치된 '삼베 짜는 여인상 조형물'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이 보성삼베의 전통적 보전가치와 우수성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삼베가 태어나는 세상은 초고속과 최첨단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제아무리 최신 정보기술의 패러다임이 총동원된다 해도 삼베는 그냥 옛날 그대로의 세계가 가장 으뜸이다. 진녹색이던 삼(대마) 줄기가 십 수 차례의 손길을 거쳐 한줄기 베실로, 몸을 감싸는 삼베로 변하는 세상은 삼베 제조기법의 까다로움과 독특함 때문에 전통이 최고의 가치로 평가 받는다. 홍두깨에 올려 방망이로 가볍게 두드리면 놀라울 만큼 매끄러운 삼베가 되고 천연염료에 자수까지 곁들이면 은은한 예스러운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특산품으로 탄생하니 말이다.

보성삼베랑의 이찬식(78) 대표는 보성군 복내면 주암호 생태습지 인근 유정마을에서 전통방식으로 삼베를 만든다. 그는 45년이라는 기나긴 세월동안 오로지 삼과 함께 호흡했던 삼베 장인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대표를 ‘삼베박사’ ‘대마박사’라 부르고, 스스로의 아호도 ‘마광(삼베에 미친 사람)’으로 정했다. 


◆100% 1등급 천연 제품 '전삼베'

"지금도 삼 얘기만 나오면 가슴이 뛰고 벌렁벌렁해집니다. 대마농사를 짓고 동네 할머니들을 불러 모아 전통방식으로 삼베를 낳고, 온갖 가공품을 생산합니다. 어려서부터 동네 어른들이 삼 농사 짓고 삼 삼는 것 등을 보고 자랐으니 삼베에 대한 애정이 크지 않겠습니까. 대마가 농약이 필요 없는 친환경작물이라는 점도 삼베로 특산품을 제조하겠다는 제 마음을 이끈 것이겠지요."

전통 삼베 제조기법으로 원단을 만들고 모든 제품을 직접 손가공으로 생산한다는 그의 말속에는 '보성삼베랑'에 대한 자긍심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 대표의 부인 윤창숙씨의 섬세한 손끝에서 30여 가지 보성삼베랑 제품들이 태어나고 있다. 

삼베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대마에서 뽑은 실로만 베를 짠 '전삼베', 삼실에 면사와 화학사를 섞은 '마사베', 중국산 실로 짠 '기둥베'다.

보성삼베랑은 100% 1등급 천연 삼베로 만든 전삼베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 대표 소유의 4천500평 대마밭과 계약 재배한 9천평에서 직접 거둔 믿을 수 있는 순수 국내산이자 보성 특산품이다. 그 희귀성으로 수요에 비해 공급이 늘 모자라는 현상이 빚어진다.

지난 2008년 3월에는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에서 지리적표시 제45호로 등록증을 받았다. 자연섬유 그대로의 멋과 실용성은 물론 은은한 전통미가 돋보이는 30여 가지 보성삼베랑의 제품들은 바느질 솜씨 좋기로 유명한 부인 윤창숙(75)씨와 마을 주민들의 섬세한 손끝에서 한올 한올 만들어진다. 취재하던 그날도 윤씨는 응접실 건너편 작업실에서 홀로 누런 전삼베천을 이리저리 재보며 재단에 열중하고 있었다. 윤씨의 뒤편 수납장에 가지런하게 놓인 형형색색 실타래가 그간의 제품이 얼마만큼 많이 제작됐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방증 같았다. 손으로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면서 쪽이나 야생 꽃잎, 나무 열매 등의 천연염료로 채색된 단아하고 소박한 색감이었다.

◆대마로 독특한 삼지 개발 성공

지난 2011년 이 대표는 삼베옷 이외에도 삼으로 만든 독특한 종이(삼지)를 개발했다. 문화재청은 그가 개발한 삼지에 대한 성분을 분석한 결과, 인장강도·인열강도·광택성·발묵성·항균성·방충성·방염성이 기존 한지에 비해 월등하게 우수하다는 평가를 내렸었다.

"삼은 면보다 내구성과 견고함이 훨씬 뛰어납니다. 자연섬유 가운데 조직이 가장 길어서 삼의 껍질과 줄기를 종이원료로 사용하기가 좋습니다. 삼지가 가장 긴 섬유로 만든 종이라고 한다면 한지보다 강도가 훨씬 높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대표는 개발 당시를 회고하는 듯 이미 만들어진 삼지꾸러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 대표는 전남대 농대를 졸업하고 서울 유명회사에 3년가량 다녔다. 그때 서예가와 화가 등 수많은 예술인과 교류를 가졌다.

그가 서울 생활을 접고 돌연 고향으로 내려와 보성군 겸백면의 문중 땅 14만평을 개간하고 있을 때 예술인들은 그들의 작품을 선물로 주고 가곤 했다. 표구할 여윳돈이 없어 빈 박스에 차곡차곡 작품들을 보관했다.

지난 2010년 서울 인사동에서 보성삼베 전시를 준비하면서 잊고 있었던 박스가 생각났다. 선물 받았던 예술작품의 접힌 부분이 샛노랗게 변질돼 있기도 했고, 어떤 건 못쓰게 아예 해어져 있었다. 그는 너무 안타까운 마음에 닥나무 종이에 소나무 펄프함량이 50%냐, 60%냐에 따라 수명이 20~30년, 40년 간다는 구전을 믿고 우선 폐마지(낡아서 버려진 삼베옷)로 삼지만들기 연구에 착수했다.

삼을 잔뜩 싣고 계속 안동과 의성, 전주 등 전통종이를 만드는 공장을 찾아다녔다. 종이공장에서는 2~3m 되는 삼을 보고 깜짝 놀라며 1~1.5㎝ 길이로 꼼꼼하게 잘라서 가져오라 했다.

이렇게 자른 삼을 싣고 가까운 전주 한지공장으로 향했다. 그것이 삼지가 세상 밖으로 선을 보이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다.


◆英 황실에 삼지 서예작품 선물

그는 이런 가운데서도 꼬박 10년간 초지조성을 하고, 논밭을 일구며 해보지 않은 농사일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농업이 살아야 지역경제를 살릴 수 있다며 농업벤처대학을 만들어 전국의 농민들을 대상으로 농업신기술을 전파했고, 전국특산물연합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종이에는 특유의 성질인 가로세로 질긴 정도, 광택, 먹물의 번짐 정도를 가늠하는 운묵성, 접었다가 퍼지는 정도의 굴절성이 있어요. 삼지는 여기에 항균, 방추, 방염성분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닥종이나 일본에서 만든 화지, 중국의 수묵자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직 대마지(삼지)에서만 발견되는 성분입니다."

그가 만든 삼지의 특성을 한눈에 알아본 일본 화가는 삼지를 구매했다. 처음엔 한 사람, 다음엔 세 사람 등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일본 외무성은 삼지 만드는 제작과정을 듣고 싶다며 초청강연을 해주라고 요청했다. 지난 1992년 영국 찰스 황태자가 경주 양동 민속마을을 찾았을 때는 삼지를 사용한 서예작품을 선물해 현재 영국 황실에 걸려있는 행운도 얻었다. 또 2019년 앤드루 왕자가 안동 봉정사에 왔을 때는 삼지에 글을 써 선물하기도 했다.

삼은 보통 2월말에서 3월중순, 계절의 시작에 파종하고 보통 6월말부터 7월하순에 걸쳐 수확한다. 수확한 삼을 한꺼번에 찌고 삼의 인피와 거릅대를 분리한 다음, 마을 어귀에 대나무 삼발을 세워 삼을 널고 말린다. 건조시켰다가 다시 적시고 말리는 과정을 여러 번 거쳐야 비로소 삼을 얻을 수 있다.

한때 국내 삼베 유통량의 50% 이상을 차지하던 보성이지만 재배와 수확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수작업으로 섬유를 추출해 삼베를 만드는 과정을 견디는 사람은 많지 않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고 반복해서 작업하는 과정 역시 무척이나 힘들어서다.

삼을 만드는 시기가 되면 유정마을은 다듬이질 소리로 가득 찬다. 삼 머리를 풀어 삼을 도프고 째는 일, 홍두깨에 올려 다듬이질하는 작업은 혼자 할 수가 없고 둘씩 짝을 지어 작업해야 한다. 어쩌다 생산량이 많을 땐 한꺼번에 진행할 수 없어 집집마다 나눠서 품앗이로 삼베를 만드는 작업을 계속한다.

◆예술품 80여점 군에 기증… 행복

사실 이 대표가 고향에 내려와 삼베를 지극 정성으로 키우고 사랑하게 된 이유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컸다. 고향땅 어딘가에서 구천을 떠돌고 계실 아버지가 멍에처럼 가슴을 옥죌 뿐 아니라 아버지의 한 많은 사연이 항상 애달픔으로 다가와서였다. 그건 바로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 여순사건에 연루됐다는 주홍글씨였다.

연좌제의 덫에 걸려 그렇게 꿈꾸던 공무원도 산산조각이 났다. 지난 1955년에서야 비로소 아버지 유골만 찾아와 장례를 치렀을 정도였다.

그때까지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함구령만 내렸었다. 광주 북중학교를 나온 그가 광주농고로 진학하고 농대로 진로를 택한 까닭이다.

그는 몇 해 전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아버지와 함께 학살당한 뒤 뿔뿔이 흩어진 유족들을 수소문, 전국을 돌면서 8명의 무고한 희생자들을 찾아냈다. 그리고서 여순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운동에 진력했다. 지난 2019년에는 순천대 여순연구소가 펴낸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이름 그리운 아버지'라는 '여순 10·19 증언록'에 그의 증언을 올렸다. 국회의원 70명에게 손 편지로 여순사건의 반론을 구구절절이 제기했다.

급기야 지난해 10월말 여순사건 특별법이 제정됐다. 특별법이 통과되는 날, 그는 밤새 눈물이 마르도록 목 놓아 울었다. 73년의 한(恨), 아버지의 한을 이제야 풀게 됐다며….

천연미와 전통미가 살아 숨 쉬고 품질이 인정된 특산품 보성삼베랑, 삼베에 미친 농민 이찬식 대표가 집념과 열정으로 일군 보배로운 성과물이다. 인생의 절반 이상 삼에 매달렸고, 혼심을 다해 삼베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는 그가 하는 말 "이제 이걸 하면 얼마나 하겠소. 이 일을 물려받을 누군가가 빨리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대를 이을 사람만 있으면 날밤을 새워서라도 삼베의 모든 걸 가르쳐주고 싶다는 삼베 장인 이찬식씨. 그는 자신이 소장한 서예작품과 미술작품을 복내면 행정복지센터와 보성군에 아낌없이 기증해 보람되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현재 그가 도네이션한 예술품 80여점은 복내면 행정복지센터와 율포해수녹차센터에 전시돼 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묻는 질문에 "첫째는 여순사건 특별법이 제정됐지만 아직 산적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둘째는 삼으로 국부를 일으켜 산업발전에 이바지하고, 셋째는 바른 생각과 바른 행동을 하는 큰 어른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봉일기자 amazingreporter@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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