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물에 비친 달빛, 달인가? 물인가?"

입력 2021.08.19. 15:23
[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2부-빙월당]
너브실 월봉서원 빙월당


정조는 서원 안의 강당에 당호를

'빙심설월(氷心雪月)'이라고 내려

그것이 지금의 '빙월당'이다

망천사에 물이 있고, 월봉과 빙심설월에

달이 들어있으며, 빙과 설이 또한

물이기에 신기하다

빙심은 당나라 시인 왕창령의

'일편빙심재옥호(一片氷心在玉壺)'에

나오는 싯구로 단단하고 투명한 선비의 마음을,

설월은 눈 위에 비친 달빛이니 흰 것을

넘어 푸른 기운이 도는 고고한

학문의 경지를 뜻하는 듯하다



[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2부-빙월당]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은 '즈믄 가람 비추는 달의 노래'이다. 세종이 '월인석보'를 읽고 찬가 500여수를 지은 책이다. 하늘의 달(天上月)은 부처이고, 물속의 달(水中月)은 지혜를 뜻한다. 하늘의 달이 천개의 강에 비추는 은유가 뛰어나다.

고봉과 퇴계의 사단칠정논변에서도 달과 물로 성정(性情)과 이기(理氣)를 설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천지지성은 비유하면 천상월이요, 기질지성은 비유하면 수중월이다. 그 달은 비록 재천(在天)·재수(在水)의 부동(不同)이 있으나 그 달됨은 하나일 따름이다. 천상월을 달이라 하고 수중월을 물이라 하면 되겠는가?'

인간의 마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사칠논변의 요점이 그것이다. 주희는 "심(心)은 성(性)과 정(情)의 통섭"이라고 했다. 성은 존재 그 자체, 순수·무결하며 선악도 없는, 정이 발하기 이전의 상태이다. 하늘의 달이 성이다. 정은 인의예지의 사단(四端)과 희노애락애오욕의 칠정(七情)으로 표현되는 존재의 의지와 감정이다. 물속의 달이 정이다. 여기까지는 고봉과 퇴계의 생각이 비슷하다. 사단칠정은 '이(理)가 기(氣)에 떨어진 뒤의 일로서 마치 물속에 있는 달빛과 흡사한데…'라는 퇴계의 말처럼, 수중월의 영역이다. 물에 비친 달빛 속에서 사단칠정은 어떻게 설명될까? 여기서부터 둘의 견해가 다르다.

퇴계는 말한다. 사단칠정이 다 물에 비친 달이라 하더라도 '칠정은 그 빛에 밝고 어두움이 있으나 사단은 단지 밝은 것일 뿐입니다. 칠정에 밝고 어두움이 있는 것은 참으로 물의 청탁 때문이고, 절도에 맞지 않는 사단은 빛은 비록 밝지만 물결의 동요가 있음을 면하지 못한 것입니다.' 물에 비친 달빛은 다 하늘의 작용인데, 그 속에 사단의 빛과 칠정의 빛이 있다, 사단의 빛은 오직 밝기만 하고 칠정의 빛은 밝았다 어두웠다 한다. 사단의 빛이 간혹 흔들려 보이는 것은 외부요인인 바람 때문이며 칠정의 빛의 명암은 물 자체의 청탁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고봉이 답한다. '대개 수중월은 물이 고요하면 달도 고요하고 물이 일렁이면 달도 또한 일렁입니다. 그 일렁임에 있어, 물이 맑고 고요히 흘러 그림자가 밝게 비칠 경우에는 물과 달의 일렁임이 아무런 장애도 없지만, 물의 흐름이 점차 세차지고 바람이 불어 물결을 일으키며 돌에 부딪쳐 물이 튀어 오르게 되면, 달은 그로 인해 부서지고 언뜻언뜻 흔들거리며 침몰하다가 심하면 마침내 아주 없어지고 맙니다. 무릇 이와 같으니, 어찌 "물속의 달에 밝음과 흐림이 있는 것이 모두 달의 작용이며 물과는 관계없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달의 그림자가 고요하고 맑게 흐르는 물에 비친 경우에는 비록 달을 가리켜 그것의 일렁임을 말하더라도 물의 일렁임이 그 안에 있다. 만약 물이 바람에 출렁이고 돌이 부딪쳐 달을 가라앉게 하거나 없어지게 하는 경우에는 마땅히 물을 가리켜 그 일렁임을 말해야 하니, 달이 있고 없음과 밝고 흐림은 모두 물이 일렁거림의 크고 작음 여하에 달려 있다"라고 말하겠습니다.

너브실 월봉서원 빙월당

물의 달빛은 하늘에서 왔다. 그러나 물의 달빛 속에는 결이 다른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단의 빛이고, 하나는 칠정의 빛이다. 사단의 빛은 완전무결한 하늘빛을 그대로 간직하여 오직 선(善)만 있다. 칠정의 빛은 물의 환경에 따라 청탁과 동요가 있으니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다. 퇴계는 인간의 마음을 절대적 영역과 상대적 영역으로 나누어 보았다. 고봉은 "어찌 물속의 달에 밝음과 흐림이 있는 것이 모두 달의 작용이며 물과는 관계없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한다. 물의 달빛이 하늘에서 온 것이기는 하나 물 자체의 청탁, 돌과 바람에 따라 명암이 다르고 일렁이며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니, 물의 작용에 따른 것이다. 하물며 물의 달빛 속에 사단의 빛과 칠정의 빛이 따로 존재하겠느냐는 입장이다. 개념적으로는 이와 기가 구분될지 몰라도 실제의 사물과 현실 속에서는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 고봉의 문제의식이다.

퇴계는 이기(理氣)는 각각 발하여(理氣互發說), 둘은 섞일 수 없다(理氣不相雜)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다. 고봉은 이기가 함께 발하여(理氣共發說), 둘은 떼어낼 수 없다(理氣不相離)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이다. 명종·선조 대를 대표하는 사상계의 큰 별 퇴계와 26세 연하인 젊은 철학자 고봉 사이에서 장장 8년에 걸친 논쟁, 조선 철학사상사의 백미를 장식한 '퇴고논쟁(退高論爭)'이다. 두 사람의 편지 글은 빛나는 은유와 간결함, 깊은 철학적 사유, 논리적 명료함, 노년의 경륜과 젊음의 열정 등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명문이다. 퇴고논쟁은 퇴계를 이은 우계 성혼, 고봉을 이은 율곡 이이의 '율우논쟁(栗牛論爭)'으로 심화 발전한다. 전자는 주리론으로 영남학파, 후자는 주기론으로 기호학파를 형성한다. 이기론은 조선의 학자치고 여기에 붓을 들지 않은 학자가 없을 만큼 조선 철학사의 양대 산맥이며 최대 쟁점이었다. 이 논쟁은 조선후기 들어 더욱 극단화하는 유리론(唯理論)과 유기론(唯氣論)으로 나뉜다.

기대승(高峰 奇大升, 1527~1572)은 조선의 4대 사화 중 기묘사화(1519)와 을사사화(1545)의 중간에 태어났다. 기묘사화에 화를 입은 기묘명현 기준(奇遵)의 조카로, 일족이 화를 피해 전라도에 은거하던 중 광주 송현동에서 출생했다. 사림정신이 태생적 뿌리라 할 수 있다. 어려서 책읽기를 즐겨하여 독학으로 고금의 책을 두루 섭렵했으며, 전고(典故)에 밝고 언론이 준엄했다고 한다. 1549년 진사를 거쳐 1558년 문과에 급제, 사관이 되었다. 신진사림의 영수로 지목되어 권신 이량(李樑)에 의해 한 때 삭직되기도 했다. 1567년 복직되어 원접사의 종사관이 되었다. 선조가 즉위하자 조광조·이언적의 추증(追贈)을 건의했다. 직제학·대사성·대사간 등을 지냈다. 병으로 벼슬을 그만 두고 낙향하던 중 고부에 이르러 객사했다. 향년 46세. 제자로 정운룡·고경명·최경회 등이 있다. 저서는 '논사록'·'왕복서'·'주자문록'·'고봉집' 등이 있다.

'논사록'은 고봉이 명종 때에 한 차례, 선조 때에 18회를 강의하고 토론한 기록이다. 고봉 사후 선조가 그의 강설내용을 가려 뽑아 책으로 엮게 함으로써 지금까지 전해오는 경세사상서의 명저다. 그는 조광조의 정치철학을 이어 맹자의 왕도정치와 민본사상을 역설했다. 왕의 독점적 통치권한의 분산과 민심을 통치에 반영하기 위한 언로와 삼사의 공론을 중시했다. 유교적 대동 세상을 설파한 이 책은 이이의 '동호문답(東湖問答)'과 더불어 조선 500년의 대표적인 왕도교본으로 평가된다. 정조가 밤이 이슥하도록 '논사록'을 읽으면서 무릎을 치며 탄상했다 하며, 효종도 '논사록'을 늘 곁에 두고 읽었다고 치제문(致祭文)에서 밝히고 있다. 효종은 1654년 고봉을 기려 그를 배향한 사당 '망천사(望川祠)'에 '월봉(月峰)'이라 사액했다. 그것이 광주 광산동의 '월봉서원'이다. 정조는 서원 안의 강당에 당호를 '빙심설월(氷心雪月)'이라고 내려 그것이 지금의 '빙월당'이다. 망천사에 물이 있고, 월봉과 빙심설월에 달이 들어있으며, 빙과 설이 또한 물이기에 신기하다. 빙심은 당나라 시인 왕창령의 '일편빙심재옥호(一片氷心在玉壺)'에 나오는 싯구로 단단하고 투명한 선비의 마음을, 설월은 눈 위에 비친 달빛이니 흰 것을 넘어 푸른 기운이 도는 고고한 학문의 경지를 뜻하는 듯하다.

퇴계와 고봉은 고봉이 문과에 급제하던 1558년 서울에서 처음 만났다. 성균관 대사성 퇴계 58세, 초급 관료 고봉 32세, 둘은 부자간의 나이차이지만, 사제인 동시에 도반(道伴)이었다. 8년간의 사칠논변이 오가고, 다시 3년이 흘러 퇴계가 은퇴하던 날, 둘은 한강변에서 석별의 정을 나눈다. 그때 매화를 사랑했던 퇴계가 고봉에게 '매화시' 8편을 건네면서 답시를 요청하니, 고봉도 '매화시' 8편을 써서 짝을 맞추었다.

「듣자하니 호숫가에 매화 피었다는데/ 흰 안장 호방한 객 아직 오지 않았네/ 초라한 이 몸 홀로 남행하는 길에/ 해 저무는 지도 모르게 취하고 싶어라」(퇴계)

「개인 창가에 핀 매화 한그루/ 벌이 날아와 노는 것을 허락치 않네/ 오늘 석별의 회한 부질없이 괴로워/ 술 백 잔을 마시고 쓰러지게 내버려 두네」(고봉)

이듬해 5월 고봉이 고향에 '낙암(樂庵)'을 짓자 퇴계가 기문과 편액을 써 주었다. 12월 퇴계가 세상을 떠났다. 고봉은 부음을 듣고 신위를 설치하며 통곡했다. 고봉은 도산으로 사람을 보내 조문한 뒤 퇴계의 묘갈명과 묘지를 지었다. 고봉은 퇴계의 마지막 벼슬이었던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었다. 고봉은 퇴계 사후 2년 뒤인 1572년 타계했다. 하늘에 뜬 달과 물에 비친 달을 통해 인간의 마음을 각각 다르게 해석한 두 사람은 조선 철학사상의 독자적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글=이광이 시민전문기자·그림=김집중

글 : 이광이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그림 : 김집중

호는 정암(正巖)이다. 광주광역시 정책기획관 등 공직에서 30여년 일했다. 지금은 고봉 기대승선생 숭덕회 이사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강의도 한다. 고교시절부터 한국화를 시작하여 끊임없이 작업을 하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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