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2부- 무등산 춘설헌

입력 2021.08.05. 14:08
‘광주정신’의 맑은 물이 흐르는 작은 집, 석아정-오방정-춘설헌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명경대이니/ 날마다 부지런히 털고 닦아/ 티끌 먼지가 끼지 않도록 하리라'(신수)

'보리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맑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없는 것/ 세상천지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티끌 먼지가 어디 앉을 것인가?'(혜능)

5세기 달마가 동쪽으로 와서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가 된 이래, 여러 조사를 거쳐 오조(五祖) 홍인에 이르렀다. 하루는 홍인대사의 수제자 신수(神秀)가 게송을 적어 벽에 걸어두었다. 심신을 부지런히 닦아 번뇌가 없도록 하자는 내용으로 모범생의 자세다. 뛰어난 게송이라며 도반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글도 모르는 나무꾼 출신의 행자 혜능(惠能)이 그 시를 듣고 즉석에서 한 게송을 읊으니 뒤의 것이다. 보리와 명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거늘 번뇌는 어디에 쌓일 것인가! 전자가 지상에서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들의 안목이라면, 후자는 우주공간의 무한을 홀연히 열어젖히는 듯하다. 스승은 혜능의 재목을 알아보고 가사와 바리때(衣鉢)를 그에게 전한다. 선종은 여기서 두 갈래로 나뉜다. 혜능(六祖)은 남으로 내려가 남종선을 열고, 신수는 북으로 떠나 북종선을 개창하게 된다. '육조단경'에 전하는 이야기다.

선종의 남종선-북종선처럼, 그림도 남종화-북종화로 나눠 부른다. 명대의 문인 동기창이 저서 '화설(畵說)'에서 그림을 남종화-북종화로 첫 개념정립 한 것이 오늘에 내려온다. 북종화는 대상물을 꼼꼼하고 정밀하게 그리는 작풍으로 이를 '공필(工筆)'이라 한다. 정치 중심지인 북방을 무대로 전문 화가들이 주로 그렸다. 웅장하고 체계적이며 세로그림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남종화는 대상물 속에 화가의 의중을 담는 화풍으로 이를 '사의(寫意)'라 한다. 자의든 타의든 낙향하거나 정치권력으로부터 멀어진 사대부 문인들이 주로 그렸다. 자연과 도가, 신선 등이 주요 소재이다. 필치가 굵고 여백의 미를 중시하며 가로그림이 많다. 북종화가 보이는 대로 그리는 그림이고 남종화가 느끼는 대로 그리는 그림이라면, 북종선이 한발 두발 비탈을 걸어 봉우리에 도달하는 '점수(漸修)'의 선정이고 남종선이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날아다니는 '돈오(頓悟)'의 선정이라면, 그림을 선종에 빗대 이처럼 나누는 것이 상통하면서도 흥미롭다. 우리나라 남종화는 18세기 김홍도의 스승이며 '시서화 삼절(三絶)'로 불린 강세황을 필두로 이인상, 김정희 등으로 이어오다가 추사의 제자 소치 허련이 남도문인화의 토착화를 이뤄낸다. 이어 미산 허형, 남농 허건, 의재 허백련으로 전수되면서 찬란한 꽃을 피우게 된다.

무등산 증심사 계곡을 올라가다 보면 절에 닿기 전에 '의재미술관'이 있고, 오른편 다리 건너로 작은 길이 나 있다. 대나무가 빽빽하게 늘어선 숲길 양편으로 수백년 됐음직한 은행나무와 참나무, 오동나무, 벚나무, 살구나무, 모과나무들이 높이 솟아 있다. 그 길 끝에 옛 초등학교 관사처럼 소담한 벽돌집이 한 채 있다. 의재(毅齊) 허백련(許百鍊 1891~1977)이 살았던 '춘설헌(春雪軒)'. 해방 직후인 1946년부터 타계하기까지 31년간 머물면서 우리나라 남종화의 마지막 걸작들이 그려졌던 화가의 집.

춘설헌

이 집은 처음에 최원순(1891~1936)이 살던 '석아정(石啞亭)'이었다. 돌 벙어리라는 뜻의 석아 최원순은 동경에서 2·8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민족운동가다. 3·1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2·8독립운동은 이광수가 독립선언서를 쓰고 최원순이 등사·배포하는 등 배후 역할을 맡았다. 1922년 변절한 이광수가 잡지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했을 때, 최원순이 민족개조의 윤리적 근거가 무엇인가를 따져 묻는 장문의 반론을 써서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뒤에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했던 최원순은 1926년 칼럼에서 '현재의 총독정치는 조선인을 이롭게 하는 인사는 박해하고 배척하면서도 조선인을 해롭게 하는 놈들은 절대적으로 보호하는 방침'이라며 '그러므로 총독정치는 악당(惡黨) 보호정치'라고 비판, 3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그는 귀향하여 민중운동을 벌이다가 폐결핵을 앓으면서 무등산 초입의 이 터에 작은 집을 지어 요양했다. 1936년, 4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석아정'은 최원순과 계유구락부에서 민중운동을 주도했던 오방 최흥종 목사가 들어와 살면서 '오방정(五放亭)'으로 바뀐다. 오방은 젊은 시절 '최망치'라는 별명으로 장바닥과 뒷골목을 주름잡는 깡패였다. 그는 1909년 겨울, 누더기 차림으로 추위에 떨며 길바닥에서 죽어가고 있던 나병환자 노파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가 자신의 외투를 벗어주고 병원으로 데려가는 미국 선교사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큰 깨달음을 얻은 이후 '성자(聖者)'의 삶을 살며 다시 태어난 인물이다. 광주 최초의 목회자로, 독립운동가로, 사회운동가로, 나환자의 아버지로, 한 생을 일관했던 오방은 이곳 오방정에서 1966년 86세를 일기로 귀천했다. 그의 영결식은 광주시 첫 사회장으로 치러졌다.이 집은 오방의 지기였던 허백련이 이어받으면서 '춘설헌'이 된다. 의재는 진도 태생으로 허련이 종고조부다. 어려서 진도에 유배 중이던 정만조에게서 한문을 익히고, 운림산방 미산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 아호 의재(毅齋)는 정만조가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의(毅)는 논어 '강의목눌근인(剛毅木訥近仁)'에서 따왔는데, '강인하여 하기 어려운 것을 능히 한다'는 뜻이니, 예인에게 잘 어울린다. 1912년 21세에 일본 유학하여 도쿄 메이지대학 법학과 등에서 공부했다. 이때 김성수, 송진우 등을 만나 사귀게 되면서 나중에 동아일보와 인연이 깊어진다. 곧 자퇴하고 일본 남종화의 대가 고무로스이운(小室翠雲)을 찾아가 다시 그림을 배웠다. 니가타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일본에서 6년간 활동하다가 1918년 부친 위독 소식을 듣고 귀국했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추경산수도'를 첫 출품하여 1등 없는 2등 상을 수상하면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등의 높은 상을 받은 허백련씨는 종래 경성 서화계에서는 별로 이름을 듣지 못하든 사람이라 더욱이 일반이 주목하는 바가 되었다'고 평했으며, 특히 허련의 족손(族孫)이라는 점에서 세간의 이목을 끌게 된다. 그는 조선미전에 계속 출품, 크고 작은 수상을 해오다가 제6회 미전에서 '매월도(梅月圖)'로 특선에 오른다.

그 뒤 광주에 정착하여 독자적 화풍을 개척하며 후학지도에 전념했다. 동시대 작가들이 서울 중심의 근대적 작풍을 추구한 것과는 달리 오직 옛 법(古法)의 뿌리를 더욱 단단히 내리는 방식으로 자기세계를 고수했다. 그것은 전통 남종화의 정신과 기법에 대한 철저한 계승이었다. 그는 1938년 광주에서 연진회(鍊眞會)를 발족시켰다. 연진회는 화가와 문필가, 독립운동가, 정치인 등 36명이 참여한 '구락부'로, 그림의 남종화를 비롯해 시·서·화를 아우른 호남 문예부흥의 구심점이 된다. 초기 의재 문하에서 이범재, 구철우, 김옥진 등 걸출한 제자들이 배출되었고, 연진회 소속 화가들이 1960~70년대 국전(國展), 특히 사군자 분야에서 상을 휩쓸며 호남화단은 큰 성장을 이룬다. '예향' 광주의 뿌리였던 셈이다.

의재는 화가로 머물지 않았다. 그는 '삼애(愛天·愛土·愛家)정신'을 신념으로 삼아 해방 직후 우리 전통녹차를 되살리기 위해 '삼애다원'을 설립, 춘설차 보급에 힘썼다. 또 오방과 함께 '삼애학원'을 세워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자의 길을 걷기도 했다. 삼애학원은 1953년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고 30여 년간 농촌 지도자를 양성했다. 의재는 이곳 춘설헌에 30여년 머물면서 한국남종화를 대표하는 수많은 작품들을 그리고 제자들을 길러냈으며, '25시'의 작가 게오르규,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 영국의 신학자 리처드 러트 주교, 지운 김철수 선생 등 국내외 명사들과 교유를 이어갔다. 그는 "나는 차를 마시고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며 내 한평생이 춘설차 한 모금만큼이나 향기로웠던가를 생각하고 얼굴을 붉히곤 한다. 무등산에 해가 지면 그들조차 돌아가고 나는 혼자 누워서 빈손을 허공에 휘두른다. 아직도 그리고 싶은 그림이 많아 그렇게 허공에 그림을 그리고 누워 있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1958년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선임되었고, 1973년 동아일보 주최의 대규모 회고전을 가졌다. 한시와 남종화, 그리고 서법(書法)에서도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여 시·서·화 겸전의 상징적 거봉으로, '남종화의 마지막 꽃'으로 불리던 허백련은 1977년 8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시대상주 시대명주 시무등등주(是無等等呪)…' '반야심경'의 끝부분에 나오는 '무등(無等)'은 비교할 대상이 없다는 뜻이다. 무등산 동쪽 기슭에 '석아정'이었다가 '오방정'이었다가 '춘설헌'이 된 이 작은 집 한 채, 이곳에 암울했던 한 시대를 고결한 정신으로 헤쳐 나간 선각자들의 옛 이야기가 맑은 물처럼 흐르고 있다. 글=이광이 시민전문기자·그림=김집중

글 : 이광이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그림 : 김집중

호는 정암(正巖)이다. 광주광역시 정책기획관 등 공직에서 30여년 일했다. 지금은 고봉 기대승선생 숭덕회 이사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강의도 한다. 고교시절부터 한국화를 시작하여 끊임없이 작업을 하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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