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2부- 장성 관수정

입력 2021.06.24. 10:25

'지지(知止)'의 경지를 보여준 16세기 호남사림의 스승 송흠

'호남'은 '전라도'의 별칭이다. 금강 하류의 남쪽에 위치한 지방이라는 뜻의 호남(湖南)이다. 이 말은 조선 초기부터 있어왔지만 16세기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쓰였다. 전라도는 행정구역을 이르는 말로 정치 경제적 뜻이 강하다면 호남은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질과 풍속 같은 사회 문화적 정체성을 담는 뜻이 크다. '호남'이라는 말이 널리 쓰임은 주목할 만한 어떤 현상이 생겨났다는 의미가 된다. 그것이 사림(士林)의 형성이다. 물론 호남학문은 5세기 백제 왕인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하면서 태자의 스승이 되고 아스카문화를 태동시키는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 이후 단속(斷續)을 거듭하다가 16세기에 이르러 학문과 사상의 르네상스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광주대 고영진 교수의 『호남사림의 학맥과 사상』에 따르면 호남사림은 중종 대에 융성하여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고 교수는 '조선 건국 이후 정치적 변동 속에서 절의를 고집했거나, 정쟁에 연루되어 받았던 정치적 박해를 피해 전라도로 이주해 온 사대부 가문의 후예들로 연산군 대에 등장하여 중종반정 이후 본격 흥기하였다. 이들이 전라도를 택한 이유는 중앙으로부터 멀어 화가 덜 미치면서 기후와 물산이 좋아 은둔의 최적지로 여겼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라고 쓰고 있다. 그는 학자들의 논문을 참고하여 대체로 호남의 학맥을 김굉필, 최부, 송흠, 박상, 이항, 김안국 등 여섯 계열로 분류하고 있다. 장성 의 옛 누정, '관수정(觀水亭)'의 주인 송흠은 양팽손-나세찬-송순-안처성-양응정-김인후-임형수로 이어지는 지맥의 좌장인 셈이다.

관수정

송흠(宋欽, 1459~1547)은 장성 태생의 조선 전기 문신으로 호가 지지당(知止堂)이다. 1492년 33세에 문과에 급제, 승문원 정자로 관직에 입문했다. 이후 사헌부 지평, 승지, 전라도사, 나주목사, 병조판서, 이조판서와 판중추부사 등 내·외직의 벼슬을 두루 역임했다. 재물을 탐하지 않고 일을 공정하게 처리해 청백리로 이름을 떨쳤다. 포상을 일곱 번이나 받은 명신이며 89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청렴과 지지(知止)의 일관된 삶을 살았다. 그는 입신 이후 반세기, 조야(朝野)에 머물면서 진퇴 처신의 뛰어난 경지를 보여주었다. 연산군의 어지러운 시대에는 물러나 시문을 지으며 유유자적하였고, 중종반정 이후에는 조정에 나아가 여러 요직들을 거쳤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노모 간병을 이유로 다시 물러나 고향에서 5년의 세월을 보낸다. 이후 전주부윤에 임명되면서 다시 관직에 나아가고, 세상이 모질어지면 외직으로 돌다가 때가 되면 다시 나아가고, 때가 아니면 물러나면서 사화와 반정의 난세를 지혜롭게 살았다. 그의 나이 78세, 노모가 101세로 세상을 뜨자 한 번도 집에 가지 않고 3년간 시묘했다. 그 와중에 1540년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장성 선방산 아래 관수정을 지어 음풍농월하면서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전 우참찬 송흠이 전문(箋文)을 올려 사은하고 고향으로 아주 돌아갔다. 송흠은 사람됨이 청렴하고 간명하며, 부모를 위하여 여러 번 남방 고을의 수령을 자청해 나갔는데, 정사에 자상하였다. 만년에는 전라감사가 되었다가 청렴한 덕행으로 참찬에 올랐으며, 이때에 이르러 사직하니, 나이가 여든넷이었다. 조정에 선 50년 동안에 끝내 몸만을 보전하여 그때에 필요한 사람이 되지 못하였으니, 취할 만한 점이 없기는 하다. 그러나 공명을 세우는 데 있어 그 아름다움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 드문데, 송흠은 홀로 진퇴에 여유가 있었으므로 조야가 모두 그를 어질게 여겼다.' 『중종실록』에 나오는 송흠에 관한 기록이다. 끝내 몸만을 보전하여 필요한 사람이 되지 못하였으니 취할 점이 없다는 혹평 뒤에 공명의 아름다움을 끝까지 지켰고 진퇴에 여유가 있어 그를 어질게 여겼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그가 줄곧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면 난세의 어느 모서리에 걸려 화를 입지 않았을까 싶다. 세상을 내리 직선으로만 살 것인가, 때로 곡선으로 우회할 것인가는 각자 가치관의 문제로되, 송흠의 길에는 지혜로운 일이관지가 있다. 그가 이름을 지키며 천수를 누린 비법이 그의 호 '지지(知止)'에 담겨 있다. 근래 홍남기 전 부총리가 '재난지원금' 관련 언급으로 유명해진 '지지지지(知止止止, 그침을 알아 그칠 데 그친다)'라는 말이 있다. '지지(知止)'는 노자 『도덕경』 44장에 나온다.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침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 이로써 오래갈 수가 있다(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32장에는 '처음 만들어지면 이름이 있다. 이름이 나면 그칠 줄 알아야 한다. 그침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했다.

'지지지지(知止止止)'에서 '지지(知止)'는 대개 감이 온다. 너무 나가면 안 되고 어디쯤 그쳐야 할지 직감으로 안다. 하지만 그치지 않는다. 이번은 아닐 것이라는, 나는 아닐 것이라는 속삭임 속에 지지(知止)는 무지(無知) 속에 파묻히고 만다. 이어지는 '지지(止止)'가 어렵다. 누구나 금연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누구나 금연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담배는 와병 전에 끊어야 하는 것이니, 지지가 어려운 것은 실행의 타이밍이다. 송흠은 수차례 화를 피하는 절묘한 타이밍을 보여준다. 『도덕경』의 '지지(知止)' 앞에 '지족(知足)'이 나온다. 그러니까 '지족'해야 '지지'하듯, 만족해야 멈춘다. 배부른데 더 먹을 사람은 없다. 문제는 어느 정도에 만족할 것인가이다. 여기서 송흠이 보여준 또 하나의 경지, 그것은 '청렴'이다. 그는 세상의 기준에 비해 스스로 만족의 크기를 줄여놓았다. 청렴에서 지지로 이어지는 그의 수신(修身)은 견고하고 지혜롭다.

송흠은 '삼마태수(三馬太守)'라는 별칭이 유명하다. 당시 관료가 부임할 때 말 7필 정도를 쓰는 것이 관례였다. 대부분 지방관들은 가족과 짐을 실은 말 7~8필을 거느리고 떠들썩하게 부임했다. 송흠은 늘 3필만을 썼다. 자기 탈 것, 어머니, 부인 하여 말 세 마리로 간소하게 행차했다. 백성들은 '삼마태수'라고 부르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나중에 '삼마태수'라는 말은 '청백리'를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된다. 이렇게 되기까지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송흠이 최부(崔溥)와 홍문관에서 일했을 때다. 최부는 정4품으로 벼슬도 높고 나이도 많은데 고향이 이웃하여 나란히 휴가를 나왔다. 하루는 송흠이 최부의 집을 찾아가 얘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최부가 묻는다.

"자네, 무슨 말을 타고 왔는가?"

"역마(驛馬)를 타고 왔지요."

"역마는 자네가 서울서 내려올 때 집까지만 타라고 나라에서 내준 말이 아니던가?"

"……."

"내 집까지는 분명 사행(私行)인데, 어찌 역마를 타고 올 수 있단 말인가?"

송흠은 부끄러웠다. 뒤에 송흠이 홍문관을 떠날 때 최부를 찾아가 그 일을 사과하니, 최부는 "자네는 나이가 젊네. 관리는 작은 일에도 조심해야 하네"라고 타일렀다고 한다. 송흠은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최부가 갑자사화에 연루돼 처형될 때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송흠이었다. 여한을 물으니, 최부는 무안의 부모 산소에 아직 석물을 다듬어 세우지 못했고, 시집보내지 못한 막내딸이 마음에 걸린다고 하였다. 송흠은 훗날 전라감사로 부임하였을 때 최부 조상 묘소에 석물을 세워주고, 딸을 응교 김자수의 아들과 정혼시켜 주었다고 한다. 말과 관련된 두 개의 삽화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큰 것을 찾아 실천하는, 세상사에 관한 그의 안목과 자세를 보여준다. 초기 공심(公心)과 사심(私心)의 분별이 깨달음을, 그 깨달음이 욕심의 자기통제로 이어지고, 그것이 쌓여 청렴이 되고, 청렴은 지지를 낳고, 지지는 '관수(觀水)', 달관의 경지로 승화되고 있다. 욕되기 전에 만족했고, 위태롭기 전에 멈췄던 송흠, 그가 16세기 호남사림의 한 맥을 이루며 스승의 자리에 앉아있는 이유이다. 글=이광이 시민전문기자·그림=김집중

글 : 이광이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그림 : 김집중

호는 정암(正巖)이다. 광주광역시 정책기획관 등 공직에서 30여년 일했다. 지금은 고봉 기대승선생 숭덕회 이사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강의도 한다. 고교시절부터 한국화를 시작하여 끊임없이 작업을 하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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