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2부- 순천 옥천서원

입력 2021.06.10. 10:15
왜 사림은 문묘종사 조선의 첫 인물로 김굉필을 꼽았을까
순천 옥천서원 '임청대'

'한훤(寒暄)선생은 수천 년 뒤에 태어나 홀로 드높게 서서 고인의 학문에 힘썼으니, 그 유풍과 여운이 사람의 마음을 착하게 하고 세도(世道)를 부지할 만 하였다.…내가 들으니, 옛날에 배우는 자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爲己之學)'을 하였는데, 지금에 배우는 자들은 '남을 위한 학문(爲人之學)'을 한다고 한다.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면 성현에 이를 수 있고, 남을 위한 학문을 하면 겨우 과거에 급제하여 명예나 취하고 녹이나 얻는 것을 꾀할 뿐이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이제 사문(斯文)이 불행하여 철인(哲人)이 서거하였다.…'


1571년 고봉 기대승이 쓴 '옥천서원기'의 부분이다. 옥천서원은 무오사화로 순천에 유배되었다가 희생된 한훤당 김굉필(金宏弼 1454~1504년)의 학덕을 기려 순천부사 이정이 짓고 이황이 편액을 쓴 '경현당(景賢堂)'이 그 뿌리다. 뒤에 옥천정사가 되었다가 선조1년(1568) 전라도에서는 처음으로 '옥천서원(玉川書院)'이라는 편액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봉이 당시 쓴 서원기가 '고봉집'에 전한다. 고봉은 앞에 이러저러한 시말을, 뒤에 스스로 헤아린 한훤당의 뜻을 기록해 놓았다. 골자는 김굉필이 위인지학이 아닌 위기지학을 한 철인으로 그의 서거가 애통하다는 것이다. 위기지학은 '논어' 헌문편에 '자왈, 옛 학자들은 자신을 위해 배웠지만, 오늘날 학자들은 남을 위해 하는구나(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고 나온다. 김굉필은 위로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으로 내려오는 성리학의 정통계보를 잇는 인물이고 아래로 조광조-이장곤-김정국 등을 거쳐 율곡 이이에 이르는 기호사림파의 스승이었으며, 1610년 문묘 오현(五賢)에 종사되는 우리나라 유학사의 반짝이는 별 가운데 하나이다. 고봉은 한없이 길어질 한훤당의 수식어 대신 '위기지학'으로 간명하게 설명한다. '위기'는 자신을 위한 것이어서 이기적이고, '위인'은 남을 위한 것이니 이타적으로 생각하기 쉽다. 여기서 위기냐, 위인이냐는 관점의 차이이다. 나는 왜 공부하는가? 나는 내가 인정하는 내가 되고 싶은가, 남이 인정하는 내가 되고 싶은가의 문제, 내가 나의 거울이며 등불인가 남이 나의 거울이며 등불인가의 문제, 내가 구하는 것은 내 안의 가치인가 내 밖의 가치인가, 이런 문제는 쉬운 듯 어렵다. 공자는 몇 페이지 뒤에 이런 말씀을 보태 놓았다. '군자는 스스로에게서 구하고, 소인은 남으로부터 구하더구나!'(위령공) 문제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는가, 남에게서 찾는가? 이렇게 묻는가 하면, '저 자신은 몹시 꾸짖고, 남 탓하기는 가벼이 한다면, 원망을 멀리할 수 있으리라'(위령공), 하고 처방도 두루 내려놓았다.

성리학에서는 변하는 마음(人心)과 변하지 않는 마음(道心)으로 사람에게는 두개의 마음이 있다고 설명한다. 인심은 부귀공명과 같은 바깥세속의 명리를 쫓는 것이고, 도심은 인의예지와 같이 내면의 진리에 다가서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각박한 세상 살다보니 도심은 어디 가버리고 인심만 남는다. 그 잃어버린 마음, 도심을 찾는 것이 숙제다. 맹자는 학문이란 '잃어버린 마음을 다시 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대학'의 '명명덕(明明德)', 본래 밝았던 덕을 다시 밝히는 것이 같은 말이다. '명명덕'은 불교의 '무무명(無無明)', 밝음도 없고 밝지 않음도 없다는 말과 일견 상치되는 듯 보이지만, 명명덕은 본래 있다는 것을 구하고 무무명은 본래 없다는 것을 구하니, 궁극의 유무가 다를 뿐 참구하는 여정은 같다. 이 구하는 행위를 유교에서는 '학(學)'이라 하고, 불교에서는 '각(覺)'이라 한다. 학이든 각이든 구하는 대상이 남이 아닌 나로부터 비롯되는 '수기(修己)'임에는 틀림없다. 조광조가 "말을 사랑하는 것, 꽃을 사랑하는 것, 오리 기르기를 좋아하는 것 따위는 마음을 바깥의 사물에 달리게 하여 반드시 진흙에 빠지게 되므로 끝내 도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한 말 역시 도는 밖이 아니라 안에서 찾으라는 뜻이고,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이 무엇이냐는 학승의 물음에 조주스님이 "그대 어디를 보고 있는가, 뜰 앞에 잣나무 한그루 서 있네!"라고 응수한 것 역시 '나'를 일깨우는 대동소이한 삽화들이다.

김굉필은 서울 정릉의 양반가문에서 태어나 대구 달성에서 자랐다. 어려서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어 저자거리를 다니면서 사람들을 매로 치는 일이 많아 그를 보면 모두 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영남의 유학자 김종직 문하에서 수학하던 중 '소학'을 읽고 크게 감동하여 학자의 길로 들어선다. 남들보다 학업이 늦었는데 "학문에 늦고 빠른 것은 없다"면서 "새벽닭이 울 때 일어나 세수하고 앉아 책을 읽으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한다면 나중에는 크게 발전할 것"이라는 스승의 말을 듣고 그대로 실천했다고 한다. 그는 '소학'에 심취하여 '소학동자(小學童子)'라 불리었으며 "'소학'을 알지 못하고는 학문을 할 수 없다"면서 평생 그 가르침대로 살았다고 한다. 주자는 "'소학'은 집을 지을 때 터를 닦고 재목을 준비하는 것이며 『대학』은 그 터에 재목으로 집을 짓는 것이 된다."고 비유했다. 남들은 8세에 시작하여 10세에 놓는다는 '소학'을 그는 평생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하니, 그 토대와 심지가 얼마나 단단한지 알 수 있다.

한원당은 1480년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했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의 천거로 남부참봉에 제수되었고, 사헌부감찰, 형조좌랑 등을 지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조직했다는 죄목으로 장(杖) 80대에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지방관으로 부임한 조원강의 아들 조광조를 제자로 맞아 학문을 전수했다. 2년 뒤 순천으로 이배되었다. 그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최산두, 김인후 등 여러 문인들과 교우하면서 호남지역 사림형성의 초석이 되었다. 순천에서는 서원 근처 '임청대(臨淸臺)'에서 허염, 배숙, 정소, 정사익 등과 이학(理學)을 논하였는데 이들을 '승평사은(昇平四隱)'이라고 부른다. 이를 기려 1565년 이황이 글씨를 쓴 석비, '임청대'를 세워둔 것이 오늘날 전한다. 그는 순천에서 4년을 머물고 1504년 갑자사화로 극형을 당해 숨졌다. 향년 51세. 1575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10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문묘에 배향된다.

순천 옥천서원 '임청대'

도라는 것은 겨울에 갖옷 입고 여름에 얼음 마심이니,

비 개면 가고 비 오면 멈춤을 어이 전능하다 하겠는가.

난초가 세속을 따르면 끝내 변하고 말 것이니

소는 밭 갈고 말은 탄다는 그 말을 그 누가 믿으리오.


김굉필이 스승 김종직에게 날린 칼날 같은 시다. 비 개면 가고 비 오면 멈추는 것을 누가 못하겠는가, 난초가 세속에 뒹굴더니 잡초가 되었구나, 소는 밭 갈고 말은 타는 것인데 당신의 등은 소의 등인가 말의 등인가? 성종 15년(1484) 김종직이 이조참판에 중용되었을 때 사림은 훈구파에 맞서 직언을 기대했으나 스승이 현실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자 단도직입(單刀直入)의 이 시를 쓴 것이다. 등골이 서늘해진 김종직은 '분에 넘치는 벼슬에 올랐지만 임금을 바로잡고 세속을 구하는 일을 어찌 능히 하겠는가, 후배에게 못난 조롱까지 받으니 구구한 권세 취할 것이 못 되는구나'라며 일이 말처럼 쉽지 않다고 항변을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로부터 사제의 관계는 멀어졌다. 1492년 스승의 사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서실을 열고 성리학을 연구하며 제자를 길러내는데 전념했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김굉필의 생애에서 딱히 기릴 만한 것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왜 사림들은 정몽주에 이어 김굉필의 문묘종사를 주장했고, 이황은 김종직이 아닌 김굉필을 '근세도학의 조종(祖宗)'으로 추앙했을까? 이 의문에 대하여 저 시는 답의 실마리를 준다. 김종직은 생육신 남효온을 비롯한 쟁쟁한 제자가 60여명이며 그중 문과 합격자가 무려 48명, 장원 급제자 13명에 이르는 최고의 스승이자 고위관료이고 사림의 영수였던, 그야말로 '근세도학의 조종'이었다. 그 잘나가는 스승을 향하여 당신은 난초인가 잡초인가라고 묻는 서릿발 같은 비판, 이 대목이 비범하다. 스승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옳고 그름이 우선이며 옳다면 행하는 것이 절대선이다. 김굉필은 '소학'으로 다져진 단단한 바탕을 보여준다. 집터와 재목이 준비되었다면 집 짓는 것이야 어려운 일이겠는가, '소학'으로 '수기(修己)'가 되었다면 '대학'의 '치인(治人)'은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그는 말하는 듯하다. '홀로 드높게 서서 학문에 힘썼으니, 그 유풍과 여운이 사람의 마음을 착하게 하고 세도(世道)를 부지할 만 하였다'고 눈 밝은 고봉이 이 대목을 보고 있다. 김굉필은 문묘에 종사된 조선의 첫 인물이다. 글=이광이 시민전문기자·그림=김집중

글 : 이광이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그림 : 김집중

호는 정암(正巖)이다. 광주광역시 정책기획관 등 공직에서 30여년 일했다. 지금은 고봉 기대승선생 숭덕회 이사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강의도 한다. 고교시절부터 한국화를 시작하여 끊임없이 작업을 하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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