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담양 문일정

입력 2020.11.05. 18:35
실천궁행의 지식인 이최선, 3대가 의병에 나서다

따뜻한 남쪽나라에서는 이기작(二期作)을 한다. 한 해에 같은 작물을 두 번 심어 거둔다. 태국 같은 동남아 국가들은 벼농사를 1년에 세 번도 짓는다고 하니, 곡식의 질은 떨어져도 굶어죽을 염려는 없다. 우리는 한 해에 다른 작물을 두 번 심어 거두는 이모작(二毛作)이다. 봄에 벼농사, 가을에 보리농사가 그것이다. 문제는 묵은 곡식은 떨어지고 햇보리는 여물지 않은 춘궁(春窮)이다. 이때 곡식을 빌려 먹고 가을에 갚는 춘대추납(春貸秋納)이 환곡(還穀)이다. 초기에는 열 가마니를 빌리고 열한 가마니를 갚았다. 자연감소분의 1할을 모곡이라 하여 붙였다. 지금 영세자영업자 신용대출 금리가 4% 정도이니, 이것도 고리(高利)이지만 견딜만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환곡과 토지세인 전정, 병무행정인 군정의 삼정이 문란해지기 시작했다. 환곡만 살펴보자. 출납에 관한 장부조작 보고서 번작(反作), 필요 이상의 곡식을 강제 대출하는 늑대(勒貸), 쌀을 빌려 주면서 겨를 섞는 반백(半白), 돌과 쭉정이를 섞는 분석(分石), 창고에 쌀은 없고 문서에만 있는 허류(虛留), 물 불린 쌀을 빌려주고 마른 쌀을 받는 증미(拯米), 빌려주지도 않고 위조문서로 이자만 받는 와환(臥還), 흉년에 환곡을 감해 줄 것을 알고 미리 챙기는 탄정(呑停), 비축식량을 사사로이 대여하는 가분(加分), 백성에게 제값 받고 나라에 헐값으로 넘기는 증고(增估)…

'태평세월 흥겨운 노래는 가을언덕 과부의 곡성(哭聲)으로 변했다. 민중은 한 푼도 포탈하지 않았는데도 상납은 해마다 쌓여간다. …의지할 곳, 하소연할 곳이 없고, 하늘에 무죄를 호소하려 해도 길이 없다. 살아서 헤어지고 죽어서 이별하고 자기를 팔고 자식을 파는 세상, 울부짖는 소리가 우레와 같다'

다산의 세태고발 시 '애절양(哀絶陽)'이 나오던 조선 후기. 혹세무민의 세도정치가 판을 치고, 삼정의 문란은 극에 달하던 때다. 분노한 백성이 들고 일어나 홍경래 난과 진주민란이 발발했다. 1862년 이최선이 쓴 '삼정책'의 부분이다.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청춘에 시부를 짓다가…하루아침에 고을 원님이 된 뒤에는 욕심이 격동하니 어찌 농부의 고충을 돌아보겠는가. 이런 사람을 목민관의 지위에 앉혀두면 무기만 들지 않았을 뿐 도적이 될 수밖에 없다'

문일정

석전 이최선(李最善 1825~1883), 관료를 도적이라고 꾸짖는 그의 글이 가을 서릿발 같다. 담양 출신으로 조선 후기의 문인이다. 양녕대군의 증손 이서(李緖)가 이곳에 유배온 뒤 뿌리내린 가문의 후손이다. 15세에 노사 기정진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웠다. 이후 40여년 두 사람은 사제의 깊은 인연을 이어간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 아래 예법과 경전을 탐구하여 학문적 역량을 축적했다. 특히 노사의 만년 저술 '외필'이 유림들의 비판을 받자 '독외필'을 지어 명확한 변호에 나섬으로써 노사학파의 탁월한 제자로 추존받기도 했다. 35세에 증광시에 합격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62년 조정에서 삼정에 관한 구언이 있자 지어 올린 것이 '삼정책'이다. 그는 '기강과 염치의 재정립'을 문제해결의 근본으로 봤다. '기강을 버리고 삼정을 구하려 하면 왜곡된 습관을 끝내 혁신할 수 없고, 염치를 버리고 삼정을 잡으려 하면 탐욕에 찌든 습속을 척결할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기강이 위에서 세워지고 염치가 아래에서 숭상되면 명분과 의리가 지켜져 온갖 방도가 모이게 된다'고 역설했다. 이 글은 재야 지식인의 충정과 식견을 담은 것이었으나 담양부사의 기각으로 조정에 전달되지는 못하였다.

1866년에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안으로는 민란으로 피폐해지고, 밖으로는 병인양요, 신미양요(1871)를 거쳐 병자수호조약(1876)이 체결되면서 나라는 기울고 있었다. 스승 기정진이 밖으로 서양세력의 침략을 염려한 첫 '병인소'를 올리고, 안으로 국가적 폐습과 관료의 부패를 준엄하게 비판한 두 번째 '병인소'를 올리던 즈음이다. 그는 척양척사의 정신으로 의병에 나선다. 각지에 격문을 띄워 구암 땅에서 모병한 뒤 강화도로 출병했다. 의거에 나서는 제자에게 보내는 스승의 시가 남아있다.

금성의 가을빛 속 이별 노래에 드는데

(金城秋色入離歌)

긴 말채찍 들었으되 늙음을 어찌하리요

(持贈長鞭柰老何)

종성이 마땅히 평민의 앞장을 서야지

(宗姓宜爲編戶倡)

경서 지님이 어찌 창칼 든 것만 하랴

(橫經孰與揮戈多)

다만 일월이 황도에 있음을 볼지니

(但看日月麗黃道)

남아가 어찌 녹사 입고 누워만 있겠는가

(焉有男兒臥綠簑)

객중에서 혹여 나그네 기러기 보거든

(客裏若逢賓鴈翮)

한강수 잔잔하여 파랑이 없더라고 전해주오

(爲傳漢水靜無波)

그들이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양인들은 도주한 뒤였다. 석전은 성이 수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흥선대원군을 만나 난국을 타개하는 여러 방책들을 논의한 뒤 돌아온다.

그는 35세에 사마시 '일시(一詩)'과목에 2등으로 합격하여 증광진사가 되었다. 이후 40세에 초시에 합격했다. 1874년 50세 나이로 왕세자 탄생 축하 증광회시에 응시했다가 과거의 폐단을 목도한 뒤 더 이상의 출사(出仕)를 단념하였다.

문일정은 그가 1861년 마을 입구에 지은 정자다. '지팡이 짚고 산을 나서지 않을 것이며, 서울로 띄우는 편지를 쓰지 않으리라'는 최치원의 시와 '푸른 이끼 낀 황량한 돌밭 모옥에서, 여생을 밥이나 배불리 먹는 게 소원'이라 읊었던 두보의 시를 걸어놓았다. 정자 이름을 두고 문일정(聞一亭)과 견일정(見一亭)을 고민하였는데, 기정진이 '한 이치는 열 번을 듣고서야 터득되고 열의 경지는 한 이치에서 나아간다'고 설명하면서 '문일정(聞一亭)'으로 택하고 창건기문을 지어 걸었다. 문일정은 이후 수많은 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으며, 매년 두 차례 강회를 열어 노사가 강론하는 등 구한말 위정척사 사상이 꽃피고 의병운동이 불붙는 이론적 산실이 된다.

그는 1883년 "이 세상에 왔다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향년 58세. 노사학파의 일원으로 의병운동에 나서는 등 실천적 지식인의 면모를 보였던 그의 정신은 후대로 이어진다. 아들인 청고 이승학(1857∼1928)은 송사 기우만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다가 스승과 함께 의병활동을 펼쳤으며, 그의 손자로 성균관 박사를 지낸 옥산 이광수(1873∼1953) 역시 윤주찬, 민형식 등과 을사오적 암살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발각되어 사형을 언도받기도 했다. 나라가 기울던 시대 정의에 관한 옛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단아한 모습의 문일정, 늙은 팽나무의 낙엽이 난분분 휘날리는 만추의 서정이 가득하다. 글=이광이 시민전문기자·그림=김집중

글 : 이광이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그림 : 김집중

호는 정암(正巖)이다. 광주광역시 정책기획관 등 공직에서 30여년 일했다. 지금은 고봉 기대승선생 숭덕회 이사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강의도 한다. 고교시절부터 한국화를 시작하여 끊임없이 작업을 하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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