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화순 절동마을 영사재

입력 2020.07.09. 18:25
성천, 효당,만 취…궁벽한 마을에 학문의 숲을 일구다

화순(和順)은 풍속이 화순한 것이지 땅이 화순한 것은 아니다. 인심은 질박하고 도탑지만 지세는 험준한 산악이다. 무등산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멀리 대해에서 물결쳐오는 파도처럼 산맥과 준령들이 굽이굽이 이어져 있다. 너른 들은 서쪽에 능주평야 하나이고, 도곡, 이양, 춘양 등지에 작은 논밭이 있을 뿐이다. 동편은 더욱 빈약하다. 동면, 사평, 동복 방면은 비산비야의 구릉이나 비탈에 농토라는 것이 손바닥만 하다. 산자수명(山紫水明)은 자주색 산 빛과 맑은 물이 있어 경치가 빼어나다는 말이지만, 사실은 농지가 얼마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곳 사평면, 동복천 물길이 흘러가는 왼편으로 절산리, 절동마을이 있다. 앞에 지천이 흐르고, 뒤로 산들이 둘러쳐 풍광은 아름답되, 논도 작고 밭도 좁은 그야말로 산자수명한 마을이다.

1908년 이 마을에 서당계(書堂契)가 조직된다. 구한말 향교·서원의 고등교육은 언감생심이고 초등과정의 서당도 형편에 따라 없는 곳이 많았다. 배우고자 해도 배울 곳이 없으니, 가난한 이들의 유년은 무학으로 흘러갔고, 그 무학은 세습되었다. 절동마을 서당계는 누대로 살아온 광산김씨 성천 김전(1879~1947)이 그해 겨울 돈 닷 냥을 종자돈으로 내어 시작된다. 선생은 지주도 부호도 학자도 아닌 평범한 농부였다. 당시 닷 냥이 큰돈은 아니고, 논 한마지가 좀 안 되는 것이라 한다. 이 곗돈을 마을의 김씨, 창원 정씨, 함양 박씨가 공동관리하면서 식리(殖利)해 나간다. 세월이 가면서 돈이 불어나 어느덧 답 11필지 20두락을 장만하였다. 그 즈음인 1932년 마을 산자락에 재각과 별실을 지어 '영사재(永思齋)'라 하였다. 재각(齋閣)은 제 지내는 제각(祭閣)이면서 공부방과 숙소의 기능도 한다. 위로는 제를 지내고 아래로는 글을 가르치는 일거양득의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서당은 갖추었으되 스승이 없으니, 성천은 스승을 찾아 나선다. 당시 8세에 시를 지었다는 효당 김문옥(1901~1960)의 문명이 높았다. 정인보, 이현규와 더불어 3대 경학문장가로 추앙받던 인물이다. 노사 기정진의 학맥을 이은 학자로 당시 구례에 머물고 있었다. 영사재가 완공된 그해(1932) 효당을 찾아간다. 성천은 종파라는 사실을 전하면서 22세 아래 스승에게 예를 갖춰 초빙했다. 이듬해 효당이 절동마을을 답방하고 서신왕래가 있었으나 갑자기 소식이 뚝 끊어진다. 1933년 5월, 한용운·홍명희·안재홍 등과 교유하였던 효당은 항일운동의 본산인 노사학파라는 이유로 일경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성천이 이 소식을 듣고 순창구치소로 찾아가 면회한다. 효당은 6개월 옥살이를 마치고 1934년 1월 출감했다. 한 달 뒤 성천이 효당을 찾아 다시 구례로 간다. 이번이 세 번째, 삼고초려와 다름없다. 일제강점기에 항일인사를 옥중 면회하는 것도, 그를 스승으로 모시기에도 저어되는 측면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뜻이 한결 같았으니, 스승은 여기서 감복한다.

화순 절동마을 영사재

그해 따사로운 볕이 내리쬐던 봄날 효당 선생, 절동으로 이거해 들어온다. 그가 솔가하여 마을로 들어섰을 때, 성천 선생 마음이 어떠하였을까, 필생의 한 짐을 내려놓은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서당은 영사재로 하고, 거처는 별당으로 삼고, 월사금으로는 서당계의 전답 소출을 스승 앞으로 했다. 스승이 영사재에 좌정하니, 마을 100여 호 주민들이 한바탕 잔치를 벌였다. 그날 이후 아이들은 농사일에서 놓여나 서당으로 갔고, 마을에는 반세기 넘도록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솔바람 소리, 시냇물 소리, 산새 소리, 밤벌레 소리, 학 울음소리, 거문고 소리, 바둑 두는 소리, 빗방울 섬돌에 떨어지는 소리, 눈보라 들창에 흩뿌리는 소리, 차 끓이는 소리, 이는 모두 소리 가운데 지극한 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허균이 송나라 문절공의 글을 인용하여 쓴 '독서성'의 부분이다. 하지만 이 모든 소리가 누군가의 책 읽는 소리만 못하며, 또 그것은 내 자식 책 읽는 소리만 못하다고 했으니, 마을 어른들은 듣는 기쁨이, 아이들은 읽는 기쁨이 가득했다. 효당이 머무는 동안 명성을 들은 남도의 유생, 학생들이 수없이 찾아와 절동은 유학의 '학림(學林)'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 무렵 이곳에서 수학한 김영재, 윤정복, 나갑주, 위계도 등이 효당의 이름 난 제자들이다. 그렇게 마을에 학문의 길을 열고 성천은 1947년 흙으로 돌아갔다. 향년 68세. 이듬해 효당도 14년간 절동 생활을 마치고 외지로 떠나갔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일어나 마을은 전소되었다. 전쟁의 상흔이 가시고 얼마간 마을이 재건되었던 1960년, 주민들은 다시 효당을 찾았다. 그는 전란의 와중에 화순, 장흥, 보성 등지에 머물다가 지병을 얻어 곤궁하던 차에 다시 절동으로 돌아온다. 그해 유월, '문전의 동백나무를 두고 떠난 것이 못내 부끄러웠다'던 효당은 시름시름 앓다가 '만사지지(萬事止之)'를 유지로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향년 60세. 주민들은 스승이 떠난 빈자리에 제자 만취(晩翠) 위계도 선생을 모셨다. 만취는 그로부터 1985년까지 25년 동안 절동 학림을 이끌며 수많은 후학을 양성했다. 남도에서 글을 읽은 선생·학생들 가운데 만취를 사사(師事)하지 않은 이는 드물 것이다. 그는 우리시대 마지막 한학자로 맥을 이으며, 저물어가는 시대의 한 모퉁이에 앉아, 애인(愛人)을 가르쳤다.

어려서 뜻도 모르고 글을 외운 아이들은 일찍 문리가 터서 공부들을 잘 했고, 예를 배워 사회로 나아갔다. 이 마을에서 고관대작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어느 집은 5남매 중 넷이 공직으로 진출했고, 어느 집은 법조계로, 혹은 의료계로, 큰 기업체로, 다들 우리 사회의 중요한 자리들을 찾아 출세(出世)해 나갔다.

"서당에 가지 않으면 같이 놀 아이들이 없었지요. 서당은 학교이면서 놀이터이기도 했어요. 제를 올릴 때는 아이들을 다 모아놓고 술 따르는 법을 가르쳤어요. 옷에 단추가 풀린 채로 돌아다니다가 혼이 난 적도 있었지요" 어린 날 이곳에서 공부한 김도수씨(65)의 말이다. 그가 '소학'을 마치고 사서를 배울 즈음, 선생은 '논어'를 놔두고 '맹자'를 가르쳤다. 그 이유가 못내 궁금했다. "어른이 되어 헤아려 보니, 가난한 집 애들에게 '맹자'를 먼저 가르쳤던 것 같아요. 사서에서 한 권 밖에 못 배울 형편이라면 '논어', '중용'보다 '맹자'가 먼저입니다. '맹자'는 사회생활 하는데 실전적인 논리와 지혜를 갖게 해주거든요. 그래서 선생님이 그랬는가 싶으면 참 애잔한 마음이 전해옵니다"

성천의 서당계 종자돈은 돈이 아니라 씨앗이었다. 그 씨앗이 뿌리내리고 열매를 맺고 수많은 나무를 키워 화순의 동쪽 궁벽한 마을에 울창한 학문의 숲을 이루었다. 지난 1세기 동안, 이 작은 마을에서 빚어진 아름다운 인연, 성천에서 효당으로, 만취로 이어지는 그 인연은 하나의 절실하고도 진정어린 마음이 어떻게 꽃이 되고, 길이 되는 지를 잘 보여준다. 절동 주민들은 2008년 서당계 100주년을 맞아 마을 어귀에 기념 빗돌을 세웠다. 서당계는 장학사업 등을 벌이는 마을 공동체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1962년 시가와 산문을 엮은 '효당집'이 발간되었다. 1974년 사우 절산사가 지어졌고, 2011년 신축된 도남서원에 배향되었다. 글=이광이 시민전문기자·그림=김집중

글 : 이광이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그림 : 김집중

호는 정암(正巖)이다. 광주광역시 정책기획관 등 공직에서 30여년 일했다. 지금은 고봉 기대승선생 숭덕회 이사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강의도 한다. 고교시절부터 한국화를 시작하여 끊임없이 작업을 하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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