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 속 한말 호남 의병

이름도 빛도 없이 쓰러진 이들, 마지막 한 명까지 찾아야

입력 2022.10.19. 18:14 이석희 기자
[판결문 속 한말 호남 의병 ]⑩·끝 이름 없이 쓰러진 의병 신원(伸寃)
호남, 의병전쟁 중심지 역할 불구
지역 활동 의병 서훈 숫자 저조해
판결문 등 역사적 기록 남았는데
미서훈자 수두룩… 발굴 사업 확대
황두일 의병장의 활약상이 기록된 해남 북평면 이진마을 비석. 이 비석에는 황 의병장의 활약상이 기록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까지 서훈을 받지 못했다.

[판결문 속 한말 호남 의병 ]⑩·끝 이름 없이 쓰러진 의병 신원(伸寃)

영국의 유명한 역사가 E.H.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그의 저서에서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곧 과거의 사실이 현재 상황과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지금의 상황에 따라 과거의 사실이 끊임없이 해석되는 것을 말한다.

필자는 그리스 도시국가와 페르시아의 전쟁을 통해 최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을 설명한다.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면서 동맹국들로부터 지나친 동맹세를 거둠으로써 동맹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리스의 또 다른 강국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결성해 아테네의 급작스런 팽창을 견제하려 했다.

이 과정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났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팽창을 두려워한 것이 전쟁의 원인이라 했다. '투키디데스 함정'이라는 유명한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한반도나 대만해협을 둘러싼 미, 중의 갈등이 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한다. 러시아가 페르시아 전쟁이나 '투기디데스 함정'에서 교훈을 얻었다면 우크라이나와 전쟁하는 것에 신중했을 것이다.

최근 중국 국가 박물관에서 개최된 한·중 수교 30주년 특별전에서 중국 당국이 대한민국을 소개한 연표에서 고구려, 발해 건국 사실을 삭제해 외교적 파장이 일어났다. 이는 고구려와 발해를 그들의 지방정권으로 인정하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이 집요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 충격의 여파가 끝나기도 전에 대한민국의 여당 정치인이 1910년 일제에 의한 국권 피탈이 일본에 전쟁에 패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의 '무능' 때문이라고 주장해 국민들을 아연실색하게 했다.

여당 정치인의 말에 많은 사람들이 '망언', '친일'이라는 표현을 쓰며 분노했다. 필자는 우리가 일본과 전쟁에서 패해 나라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는 그 정치인의 주장에 사실 관계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체결해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해 내정에 간섭하자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해산군인들이 의병부대에 합류해 의병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됐다. 그해 10월부터 전국에서 의병들이 부대를 결성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특히 13도 창의군을 결성해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한 연합의병부대는 '독립군'을 자처했다. 1908년 1월 서울진공작전이 실패로 끝난 후에도 전남을 비롯한 전국에서 수많은 의병부대가 편성돼 일본군과 싸웠다.

1908년, 1909년 2년 동안 의병 전쟁의 주무대는 전라도였다.

특히 전남 지역 곳곳은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전장터였다. 필자가 파악한 것만 하더라도 1907년 늦가을부터 1909년 말까지 만 2년 동안 400여 회 달하는 전투가 벌어졌다. 이틀에 한 번꼴로 전남 곳곳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른 셈이다. 이 전쟁에서 대한제국 의병부대가 안타깝게도 승리하지 못해 국권을 빼앗긴 것이다. 그럼에도 여당 정치인이 전쟁을 치르지 않은 채 나라를 넘겨주었다고 하는 발언은 당시 의병전쟁의 실상을 전혀 모르고 나온 것이다.

필자는 '의병운동'이라는 말에 거부감이 있다. 의병 운동은 한말 의병 연구자들이 일찍부터 사용해오던 일반화된 용어다. 의병 운동이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노골화되는 일본의 침략 정책에 대응하는 우리 민족 장기간의 반침략 운동을 포괄하는 의미를 지닌다면 러·일 전쟁 발발 이후 일본의 침략행위에 맞서는 '항일 독립 전쟁'을 '의병 운동'이라 하는 것은 동의할 수 없다. 국제법상 교전단체로 인정받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의병 스스로 '독립군'을 표방했던 독립전쟁이다. '의병 전쟁'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치열하게 전개된 의병부대의 성격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한말 의병전쟁을 다루면서 필자가 안타깝게 생각한 것은 의병 전쟁의 중심지였던 전남 출신들의 서훈자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이다. 1908년에는 호남의병 참여자 수가 1908년 25%, 1909년 59.9%를 차지하나 서훈 숫자는 전국 대비 12.2%에 그치고 있다.

이는 우리 지역에서 의병 전쟁에 참여한 인물을 찾으려는 노력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고흥 팔영산 만경암 전투에 참여한 고흥의병이 120명이라고 분명히 기록에 나와 있음에도 이 전투에 참여해 서훈된 이는 한 명도 없다.

영암도 필자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한말 의병이 187명 넘게 나오나 서훈된 이는 14명에 그치고 있다. 이들은 판결문에 나와 있지 않아 알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판결문에 이름이 엄연히 있음에도 서훈이 되지 않고 있는 이도 있다.

대표적인 이가 양진여가 이끄는 의병부대의 핵심을 이룬 김성국이다.

김성국은 의병 전쟁에 참여해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나 기각됐다. 그는 미서훈자이다.

곧 서훈이 후손들이 직접 신청하다 보니 같은 판결문에 있어도 김성국처럼 누락되는 경우가 많다. 1908년 담양에서 고광순이 이끄는 의병부대에 참전해 징역 10월을 받은 최영서, 엄순오는 서훈을 받았으나, 역시 같은 판결문에 있는 김옥출은 미서훈자로 돼 있다. 이처럼 의병 전쟁에 참여해 체포돼 순국했거나 수감생활을 한 사실이 판결문에 있어도 우리는 그들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동안 독립유공자를 찾는데 소홀히 했다는 증거다.

해남의병을 이끈 황두일 의병장 처럼 판결문 등 기록이 없다해 실체가 있어도 서훈이 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필자가 정리한 '판결문으로 본 광주·전남 3·1운동', '판결문으로 본 광주·전남 학생운동'만 보더라도 서훈받지 못한 사람이 대상자의 절반이 넘는다. 이 가운데는 일제 치하에서 친일, 해방 이후 공산당 활동으로 공훈대상자로 부적격 판결을 받은 이도 있다. 하지만 상당수는 아예 서훈 신청 자체가 되지 않은 이들이다. 서훈 여부를 떠나 그들의 활동 여부조차 파악이 되지 않은 이들이 많다.

이제는 국가가 나서 미서훈자를 찾고, 그들의 공적을 밝혀 공훈대상자로 예우해야 한다.

마침 전라남도는 광역자치단체로서는 처음으로 2021년 3·1운동 참여자 가운데 미서훈자 80명을 발굴해 서훈 신청했다. 2022년 미서훈자 발굴 2단계 사업으로 1895년 을미사변 이후부터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일제에 맞선 미서훈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있다.

이 사업에는 의병계열, 3·1운동 계열, 학생운동 계열, 농민·노동운동 계열 등 여러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심지어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한 우리 지역 애국지사들도 찾고 있다.

이 사업에 성공리에 마무리되어 우리 지역의 독립운동의 실상이 정확히 드러나고, 나아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애국지사들의 공적이 청사에 길이 빛나기를 원한다.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이다. 박해현 시민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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