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 속 한말 호남 의병

용마 타고 솟거나 풍운 조화로 날아올라··· 변화무쌍 작전 구사

입력 2022.10.18. 17:12 이석희 기자
[판결문 속 한말 호남 의병 ] ⑨호남의소 모사장 권영회<下>
지난 4일 월야면 달맞이 문화센터에서 남일 심수택 의병장 서거 112주기 추모식이 거행됐다. 함평군 제공

[판결문 속 한말 호남 의병 ] ⑨호남의소 모사장 권영회<下>

2022년 10월 4일은 전남 중남부 지역을 호령한 의병부대 호남의소를 이끈 심남일 의병장이 순국한 지 112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을 기념하는 행사가 장군의 고향인 함평 월야 현지에서 이상익 함평군수, 유형선 전남 서부 보훈지청장, 송인정 광복회 전남지부장, 최광열 광복회 광주지부장, 그리고 장군의 손자인 심만섭(79) 선생 등 후손, 그리고 함평 주민 등 많은 내외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심남일 장군이 이끄는 '호남의소' 의병부대가 영암 국사봉을 부대로 위세를 떨칠 때 호남 의병은 절정기를 맞이했고, 심남일 의병부대가 무너졌을 때 호남 의병도 빛나는 활동을 마감하게 됐다. 한말의병전쟁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그런데 심남일 장군의 활약상을 소개한 함평군 문화관광해설사인 윤영 선생의 얘기 속에 필자가 장군을 평가한 내용이 담겨 있어 기뻤다.

사실 심남일 의병장에 대한 우리 학계의 평가는 그리 후하다고 볼 수 없다.

다음은 심남일 의병장을 소개하는 광주교육청에서 제작한 자료집 내용이다.

"심남일은 본명이 심수택이며, 남일이란 이름은 '전남 제일의 의병장'이라는 의미에서 스스로 지었다. 심남일은 서당 훈장을 하던 시골 선비였으나, 호남창의회맹소에 가담해 김율 의병장의 부장으로 활동했다. 1908년 김태원·김율 의병장이 순국하자, 그는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이끌며 나주, 함평, 영암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이어 나갔다.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으로 체포돼 순국했다"

심남일 의병장이 기삼연이 이끈 호남창의회맹소 및 김태원 형제 의병장의 부장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심남일이 호남창의회맹소의 일원이었는가에 대해 논란이 있다. 일본군의 심남일 신문조서에 "일본을 한국에서 구축하고자 융희 원년(1907년) 9월에서 12월까지 기삼연. 김태원·김율 등 수괴들이 어떠한 행동을 하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장성·영광·함평 각 군을 돌아다녔다"라고 해 그가 기삼연, 김태원 형제의 휘하에 약 4개월 참여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이를 가지고 심남일이, 기삼연이 조직한 호남창의회맹소의 일원이 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학연이나 지연으로 볼 때 기삼연 의병부대에 가담했던 다른 유생들과 관련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를 호남창의회맹소의 핵심인물로 파악하는 데 주저하게 된다.

이러한 의심을 하는 또 다른 근거로, 심남일이 여러 차례 혁혁한 전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기삼연이 저술한 '성제기선생거의록약초(省齋奇先生擧義錄略招)' 권3에 실린 호남의병장 열전에 누락이 됐기 때문이다. 심남일이, 기삼연계열 의병장들보다 안규홍 등 다른 계열 의병부대와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추정을 하게 하는 근거라 하겠다.

심남일 의병장 

심남일이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결성한 것은, 기삼연 체포(1908년 2월2일), 김율 체포(1908년 3월29일), 김준 전사(1908년 4월25일) 등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심남일은, 애초부터 기삼연 부대에 가입하려는 의사가 강하지 않았다.

다른 기록에 "별도로 의진을 결성할 생각을 처음부터 가졌지만 여의찮았다"라고 하는 구절과 위의 인용문의 "기삼연 등 수괴들이 어떠한 활동을 하는가를 알아보려고 다녔다"는 표현에서 심남일이 애초부터 독자 의진을 구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처음에 고향 이웃인 신광면 덕동고개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심남일이 본격적으로 의병전쟁을 이끌기 시작한 것은 영암으로 이동해 그곳에서 활동하던 의병부대와 손을 잡고 국사봉에 본부를 둔 호남의소라는 의병 연합부대를 결성하면서부터였다. 국사봉이 심남일이 이끄는 의병부대 본부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주목한 이는 필자였다.

심남일이 오기 이전에 박평남·박민홍 등을 중심으로 국사봉에는 호남창의소라는 강력한 의병부대가 결성돼 있었다. 국사봉은 영암을 중심으로 남평, 능주, 보성, 강진, 장흥, 해남으로 연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천연의 요새로 이루어져 장기전을 꾀하기에도 유리한 곳이었다. 국사봉이 의병본부라는 사실은 일본군 측 기록에도 자주 보인다.

한편 심남일 이끈 호남의소를 기삼연이 조직한 호남창의회맹소의 후신인 것처럼 언급하기도 한다.

호남의소가 처음 결성될 때 대부분 독립의진을 이끈 인물들이 영암의병의 핵심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심남일이 영암 의병이 조직한 호남창의소를 계승했다고 보는 것이 순리이겠다.

지역별 전남 의병과 일본군 전투 횟수로 △는 국사봉을 나타낸다.

호남의소가 확대 개편될 때 영암 출신 일변도에서 보성 출신을 비롯해 다른 지역 인사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심남일이 이끄는 호남의소가 본격적으로 전남 의병의 특징인 합진을 꾀하는 과정에서 보성 의병까지를 작전 부대 안에 편입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심남일이 영암 의병이라는 확고한 지지기반을 바탕으로 다른 지역 의병부대와 연합부대를 결성함으로 인해 의병의 전투력이 막강해지게 됐다. 일본 정규군과 맞서 대승을 거둔 남평 거성동 전투는 이러한 호남의소의 연합 작전의 빛나는 성과였다.

심남일이 이끈 의병부대의 활약상을 이렇게 설명할 때 비로소 그가 대한제국 의병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새롭게 드러나게 된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은 사실상 일제에 빼앗겼다. 그때부터 이루어진 의병 전쟁은 사실상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위대한 '독립전쟁'이었다.

호남의소 의병부대는, 게릴라전을 포함해 남평 거성동 전투처럼 몇 시간 동안 일본군 정규군과 물러서지 않는 대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전투를 전개한 심남일을 '항일투쟁'이라고 평가한 것은 너무 박하다.

권영회는 조경환, 박민홍 등의 의병부대를 오가며 연합작전으로 펼쳤다. 여기에는 그의 탁월한 전략을 높이 평가해 모사장직을 신설해 작전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한 심남일 의병장의 탁월한 지휘력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심남일은 용마를 타고 산 밖으로 뛰어나갔고, 강현수(무경)는 풍운조화를 부려 공중으로 날아갔다"는 동요는 변화무쌍한 작전을 구사한 심남일의 의병부대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권영회는 1910년 7월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애국장을 추서했으나 그의 공적으로 볼 때는 독립장 이상은 능히 된다.

의병 독립전쟁을 이끈 핵심인물 심남일은 독립장이 추서됐으나, 최고 서훈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해도 전혀 아깝지 않다. 박해현 시민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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