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 속 한말 호남 의병

남평 거성동 전투 승리 뒤에는 천재 전략가 있었다

입력 2022.10.04. 18:55 이석희 기자
[판결문 속 한말 호남 의병] ⑧호남의소 모사장 권영회<上>
심남일 의병장 전폭적 보필
작전참모 역할 도맡아 활동
영광 등서 日과 치열한 전투
의병부대 옮기며 전술 펼쳐
권영회의 교수형 항소 기각 재판기록

[판결문 속 한말 호남 의병] ⑧호남의소 모사장 권영회<上>

한국 근현대사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에 꺾인 수천 년 민족의 자존심을 찾으려는 우리 민족의 지치지 않는 항전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단초를 연 제2차 동학농민전쟁과 이어진 의병 전쟁은 한편의 장엄한 서사시였다.

특히 의병 전쟁은 일제의 국권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무력투쟁으로 무려 20년 넘게 전개됐다. 대한제국기에 일어난 의병은 임진 의병의 전통을 계승해 쓰러져 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오로지 애국심 하나로 일어선 사람이다.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한 박은식은 "의병은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난 민군"이라고 의병을 정의한 바 있다.

심남일 또한 의병은 "아침에 적을 치고 저녁에 조국의 산에 묻히는 것"이라는 가슴이 찡한 정의를 내렸다.

심남일은 함평 월야 출신으로, 본명은 수택이다. '남일(南一)'은 '전남 제일의 의병장'이라는 뜻으로 본인 스스로 사용한 호였다.

향리에서 서당 훈장과 향교의 교임을 맡을 정도로 학식이 풍부하던 심남일은 기삼연 의진, 김율 의진과 손을 잡고 활동하다가 영암으로 부대를 이동해 박평남, 박민홍 등 영암 의병부대와 연합부대를 결성했다.

박평남과 박민홍은 심남일이 영암으로 이동해 오기 이전에 이미 그곳에서 의진을 결성,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심남일이 이들 기존 영암에서 활동했던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새롭게 의병부대를 편성한 것이 호남의소였다. '호남의소(湖南義所)'는 대장, 모사장, 서기 겸 모사, 도집사, 선봉장, 중군장, 후군장, 도통장, 군량장 등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부대 편제를 갖췄다. 의병부대가 이러한 의진을 갖춘 것은 다른 의병부대와 비슷하다. 호남의소의 부대편성에서 다른 부대와 비교해 특이한 편제를 이룬 것이 '모사장'의 존재이다.

'모사장(謀事長)'은 부대의 작전을 세우는 요즘으로 말하자면 작전참모에 해당한다. '호남의소'에서는 모사장이 대장 바로 다음 직책에 있다. 이는 그만큼 모사장의 역할을 심남일이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심남일을 보필한 모사장으로 권영회가 있다.

남평군 욱곡면 출신인 그에 대해 판결문 및 심남일 실기 등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를 통해 그가 작전 수행을 포함한 부분뿐만 아니라 부대 편제와 관련해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1909년 3월 8일 남평 거성동에서 심남일의 부장인 강현수(무경), 박봉주, 박채홍 등이 이끄는 연합 의진과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이 전투를 앞두고 권영회가 점을 치는 장면이 나와 실기에 나와 있다.

"권영회가 점을 치니 점괘에 '두 호랑이가 다투어 싸우는데 서쪽들이 어떻게 변했는가' 했기로, 즉시 군중에 영을 아래와 같이 내렸다. 한 부대는 동쪽 대치에 매복해 능주의 적을 방어하고, 또 한 부대는 대항봉에 매복해 광주·나주·남평 고을의 적을 방어하고, 한 부대는 서남 간 월임치에 매복해 영암의 적을 방어하고, 한 부대는 덕룡산 상봉에 매복하고, 한 부대는 병암치에 매복해 서로 응원하게 하라"

권영회의 작전에 따라 연합의병부대가 매복해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작전에는 위의 연합부대 외에 박민홍·여홍 형제가 이끄는 의병부대 등도 투입됐다. 이때의 전투 상황이 심남일 실기에 자세히 기록됐다.

"8시경, 능주에 있는 적 20여 명이 동쪽에서 쳐들어오므로 우리 의병부대가 일제히 사격해 적 15명을 죽였다. 10시경 광주·나주·남평에 있는 적 60명이 북쪽에서 들어와 싸움을 걸기로, 우리는 승세를 타고 추격해 적의 장수인 경무사(警武師)와 졸병 수십 명을 죽였다. 그리고 영암에서 들어온 적 10여 명은 이미 서남 간에 매복한 우리 군사에게 패배를 당했다. 이번 싸움에서 적을 잡은 것이 70여 명에 달했고, 우리 군사도 약간 명이 죽었는데, 특히 의병장 박민홍의 아우인 박여홍·박태환·박기춘 등이 전사했다. 여홍·태환은 박민홍의 좌·우익장이었고, 기춘은 본진 총독이었다." 의병사에 길이 남을 유명한 남평 거성동 전투이다.

의병이 거성동 전투에서 승리한 데는 효율적인 연합 의진을 구성한 데다 적을 유인해 기습 공격하도록 작전을 세운 권영회 공이 크다.

권영회의 행적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판결문이 당시를 이해하게 한다.

"제1. 피고(권영회)는 융희 2년 7월 26일 (음력 6월 28일)에 폭도 수괴 심남일(沈南一)이가 총 약 60정을 휴대한 도당 약 60~70명을 모아 폭동을 일으키는 정을 알고, 그 부하로 투입해 모사(謀士)라는 명목의 책임을 맡고 위 도당과 함께 총을 휴대하고 동년 10월(음력 9월)경까지 동일한 의사를 계속해 전라남도 영광·강진·장흥·남평 등 각 군내에서 군대·헌병대·순사대의 진무(鎭撫)에 대해 5회에 걸쳐서 반항해 위 수괴 심남일의 폭동 행위를 방조하였고…"

이에 따르면 1908년 7월 영암으로 이동한 심남일이 부대를 결성할 때 '모사', 곧 작전참모의 역할을 맡아 심남일을 도와 10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영광, 강진, 장흥, 남평 등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권영회는 그해 10월 무렵 조경환 부대로 옮겨 같은 해 12월까지 '모사'를 맡았음을 다음 판결문은 말하고 있다.

"제2. 피고는 동년 10월경(음력 9월경)에 폭도 수괴 조경환이가 총 약 1백여 정을 휴대한 도당 약 1백여 명을 모아 폭동을 일으키는 정을 알고 그 부하로 투입해 모사(謀事)라는 명목의 책임을 맡고 위 도당과 함께 총을 휴대하고 동년 12월경(음력 11월경)까지 동일한 의사를 계속해 동도 함평·광주 등 각 군내에서 헌병의 진무에 대해서 4회에 걸쳐서 반항해 위 수괴 조경환의 폭동행위를 방조하였고…"

"제3. 피고는 동년 12월경(음력 11월경)에 폭도 수괴 박민홍(朴珉洪)이가 총 약 40정을 휴대한 도당 약 40~50명을 모아 폭동을 일으키는 정을 알고 그 부하로 투입해 참모장이라는 명목의 책임을 지고 위 도당과 함께 총을 휴대하고 동 3년 3월경(음력 2월경)까지 동일한 의사를 계속해 동도 나주·남평 등 각 군내에서 일본군대의 진무에 대항해 2회에 걸친 위 수괴 박민홍의 폭동 행위를 방조하였고…"

권영회가 같은 해 12월 박민홍의 참모장이 돼 이듬해 3월까지 작전참모의 역할을 담당했다고 나와 있다. 위의 판결문을 통해 권영회가 작전 수행의 계획을 수립하는 전문가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권영회가 심남일, 조경환, 박민홍 등 주요 의병부대를 옮겨 다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여러 의병부대가 각기 독립된 부대 편성을 바탕으로 연합의진을 구성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일 때 권영회가 이들 의진을 옮겨 다니며 효율적인 연합작전을 지휘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박해현 시민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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