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 속 한말 호남 의병

밀정·약탈자 등 의병 내부 적에도 칼 겨눴다

입력 2022.09.13. 18:52 이석희 기자
[판결문 속 한말 호남 의병] ⑦보성 빛낸 손덕오·염인서·정기찬<下>
보성 벌교선근공원의 안규홍 의병장 동상과 황금주먹동상. 무등일보DB

[판결문 속 한말 호남 의병] ⑦보성 빛낸 손덕오·염인서·정기찬<下>

안규홍이 주도한 보성 의병부대는 앞서 언급한 바처럼, 손덕오, 염인서, 정기찬 등 같은 면 출신 인물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안규홍 의병부대가 이른 시일 내에 대규모 의병부대를 편성할 수 있었던 데는 정환종 등 그 지역 양반 지주 등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던 것도 중요한 역할이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안규홍을 안 진사(進士)라고 불렀다.

왜 담살이(머슴)를 '안 진사'라고 불렀을까.

안규홍의 가문이 여느 담살이와는 다름을 짐작하게 한다. 담살이의 경제 기반으로써는 수백의 의병부대를 유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관동 의병 출신으로 순천 지역에서 활동하던 강용언을 축출하고 독립 의병부대를 형성한 안규홍은 고흥, 순천 등지의 시장을 돌아다니며 의병을 충원하려 했다.

이처럼 시장을 돌면서 의병을 모집한 것은 후기의병(정미의병)의 특징이었다.

의병 주도층이 최익현, 기우만 등 지역의 명망가들이 앞장섰던 이전과는 달리 서당 훈장, 평민층, 해산군인 등 다양한 계층이 의병 전쟁의 전면에 나서면서 나타난 양상이었다.

한편 후기의병은 일반 백성들까지 대거 가담했으므로 군기 확립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전라남도의 폭도 가운데 거괴(巨魁) 심남일, 강무경, 안계홍, 임창모 등의 일당에 이르러서는 약간 그 향함을 달리해 엄히 부하의 비행을 단속하고, 약탈을 금하며 오로지 한민(韓民)을 선동해 폭동을 영속, 도당의 강화에 힘쓰는 듯 하다.(臨時韓國派遣隊の南韓大討伐實施報告の件)"

영암 국사봉을 중심으로 '호남의소'를 결성한 심남일, 강무경과 보성 의병을 결성한 안규홍, 임창모 등이 군기 확립에 앞장섰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들은 모두 다른 지역에까지 나아가 의병을 모아 부대를 결성한 인물이다.

따라서 이들은 엄정한 군기 확립을 무엇보다 강조했다. 이들 의병부대가 그 지역 백성들의 구심점이 되는 계기가 됐다.

안규홍이 1908년 7월 겸백 석호산에서 재기하려 할 때 촌민들이 스스로 나서서 음식물을 제공한 사실은 이를 잘 말해준다.

한편 안규홍의 보성의병의 활동 내용을 손덕오 등의 판결문에서 찾을 수 있다.

피고 염인서, 정기찬은 1908년 5월 초순(음력 4월 초순 경)에 위 우두머리 안계홍(安桂洪·안규홍과 같음)이 일진회 회원 염영화는 폭도의 행동을 일본 관헌에게 밀고한 자라하여 동인(同人)을 살해하려는 것을 알고, 그 살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안계홍의 부하 40여 명과 함께 전라남도 보성군 봉덕면 법화촌에서 염영화의 집을 포위하고 동인을 묶어 이를 방조하고, 안계홍은 위 방조에 의하여 동인을 총살하였고…중략

피고 염인서는 융희 3년(1909년) 3월 6일 무렵 위 우두머리 안계홍이 일진회 회원 박봉조가 양민에게서 재물을 빼앗는 자라하여 동인을 모살하려는 조의(造意)에 응하여 안계홍의 부하 수십 명과 함께 전라남도 보성군 송곡면 봉동에서 박봉조를 붙잡아 피고는 다른 3명과 함께 돌 및 몽둥이로 난타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고…중략

피고 3명은 동년(1909년) 9월 4일 경 위 우두머리 안계홍이 일진회원 이용서는 양민에게서 재물을 빼앗는 자라하여 동인(同人)을 살해하려는 것을 알고, 그 살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안계홍의 부하 30여 명과 함께 전라남도 순천군 낙서면 상고리 주막에서 이용서를 체포해 이를 방조하고 안계홍은 위 방조에 의해 동인을 참살한 것이다.

일본군 작성 폭도(의병) 대토벌 결과 보고

안규홍이 제거 대상으로 삼은 이들이 일진회원임을 알 수 있다. 일진회는 1904년 8월 송병준이 일본의 비밀지령으로 조직한 친일단체였다.

처음에는 '유신회'로 조직했다가 곧 '일진회'로 명칭을 바꿨다. 이 단체는 한일병합을 앞장서서 주창했다. 안규홍은 이들 단체 회원을 척살하는 것을 가장 주요한 임무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의병의 거취를 밀고했거나 양민들의 재물을 함부로 빼앗았기 때문에 제거됐다.

일진회원에 대한 척살이 특히 1909년에 집중된 것은 이 무렵 일진회가 정찰대를 조직해 일본 헌병대의 앞잡이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안규홍은 내부의 적 차단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내부의 적 차단에 집중한 안규홍은 일본군과 물러서지 않는 전면전을 추진했다.

영암에서 의병을 조직한 심남일과 만나 작전을 논의하고 있다. '심남일 일기'에 따르면 "(1908년) 5월 12일 천동에 주둔하고 보성 창의장 안규홍에게 통지해서 석호선에 집합해 서로 병사를 의논하게 하였다"라는 내용이 있어 이러한 사정을 짐작하게 한다. 1908년 5월이면 안규홍이 석호산에서 의병을 규합하며 기세를 올린 시기이다.

전남 중남부를 호령하던 심남일이 석호산에 와 안규홍을 만났는데 이는 연합의진을 구축하기 위함이었다. 안규홍은 고흥의병과도 연합의진을 구성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앞서 언급한 만경암 전투가 이를 잘 말해준다.

안규홍의 보성 의병은 일본군 병력 규모에 따라 그에 알맞은 공격형태를 취했다. 정면공격을 수행하기도 하고 기습공격 또는 유인작전을 전개하기도 했다.

항소 기각한다는 고등법원 형사부 판결문(손덕오 등 3인)

안규홍이 이끄는 보성의병은 여러 차례 일본군 수비대, 헌병대와 전투를 벌였다. 그렇다면 막대한 인적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특히 1909년 4월 하순부터 일본군 광주수비대 제2대대와 남원수비대 제1대대가 합동해서 순천, 보성 사이에 출몰하는 '폭도 거괴' 안규홍이 이끄는 의병부대를 섬멸하기 위해 토벌 작전을 개시했다. 그럼에도 일본군 진중일지를 바탕으로 작성한 1909년 8월 의병 세력 비교표를 보면, 7월에 보성 의병 규모가 200명이었으나 8월에는 220명으로 오히려 20명이 늘어났다.

이는 보성 지역의 의병 활동이 일본군의 강력한 진압 작전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축됨 없이 더욱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활발히 움직이던 안규홍의 보성의병은 1909년 9월부터 전개된 일제의 '남한폭도 대토벌작전(호남의병 대학살 사건)'으로 마침내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안규홍은 이제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일본군과 치열한 독립전쟁을 위해서는 의병부대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다음의 판결문은 이러한 사정을 짐작하게 한다.

"피고인 손덕오의 상고 이유는 피고는 안 대장의 강박을 당해 폭도무리에 가입했으나 본래부터 그 뜻이 아니어서 도주했으나 동인의 엄명에 의해 부득이 다시 폭도가 되었는데 교수형에 처한 것은 부당하고…"

손덕오의 상고 이유다. 염인서나 정기찬의 상고 이유도 안 대장의 겁박을 이유로 들었다. 다음은 정기찬의 상고 이유다.

"안대장에게 강박을 당해 잠시 폭도의 무리에 들어갔으나 본래부터 본뜻이 아니므로 도주해 광주수비대에 자수했거늘 수일이 지나서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하게 됨은 부당하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들의 한결같이 안규홍의 겁박에 의해 의병이 됐고, 이제 탈출해 자수했다고 진술했다.

보성의병의 가장 핵심 인물들이 동시에 자수했다는 것은 이들의 자수 동기가 의도적임을 알게 한다. 곧 일제의 거센 탄압을 피하면서 장기 항전을 꾀하려는 고육책이었다.

하지만 일제는 이러한 의병들의 전략을 눈치채고 속전속결로 재판을 마무리하려 했다. 이미 1909년 7월 기유각서를 통해 조선의 사법사무를 강탈한 일본은 재판을 그들의 의도대로 처리했다. 이들에 대한 항소심 재판이 1910년 6월2일 대구공소원에서 이루어졌고, 2심 판결이 내려진 후 불과 3주도 지나지 않은 6월21일 상고심을 했다. 교수형으로 이들은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들 3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해 공을 기렸다. 이들과 함께 한 대한제국의 전남 의병의 실체를 밝히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국가기록원 의병관련 기록물의 번역물에는 2심의 대구 공소원 판결이 6월20일이라 나와 있으나 6월2일이 옳다. 이처럼 국가기록원 자료에도 오류가 발견됐으므로 반드시 원문 대조하는 습관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박해현 시민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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