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 속 한말 호남 의병

추기엽·황두일과 해남 의병 주축··· 수많은 공적 쌓고 형장의 이슬로

입력 2022.07.10. 18:03 김현주 기자
[판결문 속 한말 호남 의병] ④의병장이 된 대한제국 장교 황준성(하)
영암·해남 의병부대 치열한 교전
성한 기세 일본인들 도망갈 정도
심적암 전투서 패한 뒤 겨우 탈출
부대원 희생 막고 후일 도모하려
경찰서 자수했으나 교수형 확정
대구 형무소에 수감된 전남의병장들(뒷줄 맨 왼쪽이 황두일)

[판결문 속 한말 호남 의병] ④의병장이 된 대한제국 장교 황준성(하) 

심남일 의병장의 전적비가 광주공원에 세워져 있다. 심남일이 광주 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웠다는 얘기는 없음에도 그를 추모하는 비석이 이곳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에서 그의 빛나는 활약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가 '거괴(巨魁)'라고 불렀던 심남일은, 함평 출신으로 본명이 수택이었다. '남일(南一)'은 '전남 제일의 의병장'이라는 뜻으로 본인 스스로 사용한 호이다. 1906년 향리에서 서당 훈장과 향교의 교임을 맡을 정도로 학식이 풍부하였다. 기삼연이 조직한 '호남창의회맹소'에서 활동하다 영암으로 이동해 그곳의 의병들과 더불어 국사봉에 사령부를 둔 '호남의소(湖南義所)'라는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그는 국사봉을 중심으로 나주, 영암, 강진, 장흥, 해남, 무안, 함평, 보성 등 전남 중남부 곳곳을 휘젓고 다니며 일본군과 일진일퇴의 전쟁을 치렀다.

심남일은 그의 의병부대에 '서기'라는 직책을 두어 전투 상황을 기록하게 하였다. '심남일 실기'는 그의 전투 일지인 셈이다. 여기에는 적지 않은 전투 상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물론 그들이 기록한 것이기에 전과(戰果)에 약간의 과장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이곳에 기록된 전투들의 상당수가 일본군 기록 등 다른 자료와 일치하는 것으로 볼 때 당시 전투 상황을 객관적으로 설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적지 않는 것으로 볼 때 는 의병들의 사기를 고려하여 약간 전과를 부풀렸을 수는 있지만 섞여 있다고 의심할 수 있지만, 그 실기를 통해 당시의 심남일 부대의 전투 상황을 충분히 살필 수 있다.

이 전투기록을 보면 해남 지역의 전투 상황도 있다. 전투 일지를 그대로 옮겨 본다.

"해남 성내(城內) 접전 (1909년) 10월 9일, 군사 3백 명을 거느리고 기세 좋게 출발하여 해남 성 밖 10리 지점에 진을 쳤다 정탐꾼이 여러 차례 내왕하므로 짐짓 겁내어 위축하는 모양을 보이다가, 밤 10시 무렵 군사를 끌고 성안으로 출동해 들어가서 마구 포를 쏴 왜적 백여 명을 베었다. 이튿날 새벽 전에 대둔사로 퇴진했다."

추기엽 의병장 기념비(담양 무정)

해남에서 심남일이 이끄는 의병부대가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일본군을 격퇴하고 대둔사로 퇴각하였다고 되어 있는 데서 유명한 대둔사 전투를 기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전투를 설명하기에 앞서 영암으로 이동한 심남일이 의병부대를 결성할 때 기군장 직책을 담당한 이덕삼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암 출신으로 연합의병의 귀재인 김치홍도 이덕삼과 같이 기군장 직책을 맡았었다. 이덕삼을 영암 출신이라고 보기도 하나 아직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가 해남 일대에 편성된 여러 의병부대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해남 출신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하튼 심남일이 해남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데는 기군장인 이덕삼이 중심이 된 해남 의병들의 활약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가 해남 출신이라고 한다면 심남일이 이끄는 '호남의소'가 연합의병 부대임을 확실히 하겠다.

대한매일신보(국문판) 1908년 11월 5일자 '의병광장' 난에 "전라남도에서 온 사람이 말을 들은 즉 해남 등지에 의병이 창궐하는 데 그 의병의 당파는 남일파라 하고 세력이 굉장하다더라"라 하는 데서 해남 일대에서 의병들이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전개하고 있고, 그 중심에 심남일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시 같은 신문 1909년 3월 23일자 '남일파의 기세' 난에 "영암과 해남 등 군에는 의병 남일파의 기세가 점점 성하여 일인을 보는 대로 죽이는 까닭에 그 지방에는 일본 상인과 거류민이 모두 도망하였다더라"라 하여 영암, 해남 등지에서 의병부대의 기세가 대단함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해남이 영암과 더불어 의병항전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된 데는 해남 일대의 의병부대를 이끌며 심남일이 편성한 연합의병 부대의 기군장 직책을 맡은 이덕삼의 역할이 컸다.

이덕삼 부대는 독립 의진을 이끈 황준성, 추기엽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담양 출신 추기엽은 전주 진위대 소속 군인이었다. 군대 해산 이후 익산 출신의 의병장 윤현보의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유형 10년 형을 받고 완도로 귀양 왔었다. 추기엽은 우수영 일대에서 약 1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황준성, 추기엽과 함께 해남 의병 중심인물 황두일이 있다. 황두일은 해남군 북평면 고달동 출신이었다. 그의 휘하에 120명의 의병이 있었다 한다. 이덕삼을 중심으로 이들 셋이 해남 의병의 주축을 형성하였다.

해남 출신 의병 지도자들과 해산군인 출신 지도자들은 독립된 부대를 유지하면서도 유사시에는 서로 긴밀히 연결하여 연합작전을 전개하였다. 곧 분진과 합진을 자유로이 전개한 '호남의소'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이들은 심남일이 이끄는 '호남의소'와도 연합작전을 전개하였다. 심남일의 실기에 나온 해남 성내 전투가 바로 그 대표적 증거라 할 수 있다. '실기'에 언급된 대둔사 전투를 살펴보기로 한다.

1909년 7월 7일 일본 수비대와 황준성, 추기엽 등의 해남 의병부대 사이에 치열한 교전이 해남군 북평면 성도암에서 있었다. 두륜산을 근거지 삼아 곳곳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던 이들 의병부대는 미황사로 이동하여 전열을 정비한다. 이때 이들은 황준성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였다. 곧 연합의진의 사령관이 된 셈이다. 약 70명의 의병부대는 두륜산으로 이동하기에 앞서 친일에 앞장 선 일진회원인 박원재와 진태진을 붙잡아 현산면 초평리에서 사살하였다. 그리고 7월 8일 대흥사 심적암으로 부대를 이동하였다. 그곳은 지세가 험해 일본군과 싸우기에 유리하다는 황준성의 판단 때문이었다.

7월 8일 심적암에 도착한 의병부대는 현산면 덕흥리 김인옥이 의병들의 사기 앙양을 위해 내놓은 소를 잡아 약주를 한 잔씩 하며 새로운 전략을 논의하였다. 황준성은 잠이 들면서 부대의 절반이 되는 30명을 보초로 세워 일본군의 야습에 대비하였다. 이날 밤 해남수비대장 요시하라 대위가 이끄는 수비대 22명, 경찰 3명, 헌병 4명 등 30여 명의 일본군이 의병의 뒤를 추격하여 대흥사로 출동하였다. 경계 근무를 하던 의병들은 새벽에까지 특별한 징후가 보이지 않자 심적암으로 돌아왔다. 이들 뒤를 밟은 일본군 수비대는 새벽 4시 무렵 심적암을 포위하고 집중 공격을 가하였다.

기습을 당한 해남 의병부대는 전사자 24명, 포로 8명, 화승종 47정, 군도 5개를 빼앗기는 피해를 입었다. 이때 일본군 공격으로 심적암의 침허당 스님 등 5명의 승려도 함께 목숨을 잃었다.

이때 다행히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는 데 성공한 황준성은 보성, 순천 등지로 피해 다니다 12월 7일 해남 경찰서에 자수하였다. 그가 자수한 것은 부대원들의 희생을 막고 후일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는 1910년 4월 22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형이 교수형이 확정되어 죽임을 당했다. 추기엽도 다행히 탈출에는 성공하였으나 7월 29일 부하들에게 피살되었다. 심적암 전투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부하들이 물은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황두일은 8월 30일 부하 8명과 함께 해남 수비대에 자수를 하였다. 황준성과 마찬가지로 후일을 기약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모습은 대구 형무소에 수감된 전남의병장의 사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재판에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박해현 시민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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