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 속 한말 호남 의병

대한제국군, 나라 위태롭자 민초들과 항일투쟁 선봉에

입력 2022.06.15. 18:43 이석희 기자
[판결문 속 한말 호남 의병] ③장교 출신 의병장 황준성(상)
해산군인을 포함해 각계 각층으로 의병모습(1907년 영국 종군기자 매킨리 촬영)

[판결문 속 한말 호남 의병] ③장교 출신 의병장 황준성(상)

세계유산에 등재된 해남 대흥사에 속한 심적암이 항일운동의 성지(聖地)라는 사실을 아는 이 많지 않다. 이곳을 무대로 치열하게 전개된 의병 전쟁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긴 고종황제는 1907년 6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내 한국의 주권 회복을 국제사회에 직접 호소하려 했다. 바로 '헤이그 특사' 사건이다.

고종의 신임장을 받고 헤이그에 도착한 이상설·이준·이위종은 일제의 방해로 회담장에 들어갈 수 없자 일제의 침략상을 담은 글을 각국 대표에게 보냈다. 이위종은 7월 9일 신문기자단 앞에서 '한국의 호소'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회의 참석이 무산되자 비탄 속에서 식음을 전폐하던 이준은 7월 14일 그곳에서 순국했다.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일본은, 7월 12일 이완용 내각이 고종의 퇴위를 결정토록 했다.

"죽어도 퇴위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버텼던 고종황제는 1주일 만인 19일 황태자에게 양위한다는 조직을 내렸다. 7월 20일 즉위한 순종황제는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임명한다는 이른바 '차관정치'의 내용이 들어 있는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통감부가 친일 내각을 직접 통제할 수 있게 되고, 중앙과 지방 행정기관에는 일본인 차관을 비롯해 수천 명의 일본인 관리들이 임명됐다.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된 셈이다.

그리고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한다는 극비에 부쳐진 정미7조약 '부수각서'에 따라 부대 해산명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서울 시위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지금의 소령 계급)은 해산명령을 거부하고 당일 자결했다.

중대장 오의선, 정위도 뒤를 따라 자결했다. 대한제국 장교의 존엄을 지킨 것이다. 남상덕 참위는 부하들을 이끌고 일본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전개했다. 해산군인들이 나아가야 목표를 제시한 셈이다.

8월 9일 광주진위대를 비롯해 지방의 진위대들도 해산됐다. 해산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을사늑약 체결로 다시 불붙은 의병항쟁은 '대규모', '조직적' 의병전쟁으로 발전했다.

서울 시위대로부터 시작된 해산군인들의 항전은 원주·강화·홍주·진주 진위대로 확대돼 갔다.

장교나 병사를 막론하고 대한제국 군대 구성원 대부분은 의병부대에 합류하거나 새로이 의병부대를 편성했다. 이들이 의병부대에 가담함으로써 의병 전투력은 크게 강화됐다.

해남 대흥사 심적암 의병 위령탑

완도, 해남 일대를 주름잡던 유명한 황준성 의병장 또한 대한제국 장교 출신이었다. 황준성은 군대 해산명령을 거부하고 의병에 가담한 죄목으로 내란죄로 완도로 유배형을 받았다.

그런데 그는 유배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의 간담을 소스라치게 했다. 황준성을 통해 의병 전쟁을 이끈 대한제국 군인들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살필 수 있다.

1897년 전북 진안군 남면 오정리에서 태어난 황준성은 지휘 능력이 탁월해 대한제국 군대의 참령 직급까지 올랐다. 자결한 시위대 제1대대장 박승환과 같은 직급이었다.

참령 이상으로 의병장이 된 인물은 이동휘와 황준성뿐이다. 그의 원적은 경성 남문 내동 56통 5호라고 되어 있다. 그가 시위대로 근무할 때 거주했던 주소로 믿어진다.

완도, 해남에서 의병 전쟁을 이끌던 황준성은 체포돼 사형(교수형) 선고를 받고 순국했다.

그에 관한 1심(광주지방재판소 목포지부, 19 10.2.26.), 2심(대구공소원 형사부, 1910.3. 19.), 3심(고등법원 형사부, 1910.4.22.) 등의 판결문이 남아 있다.

불과 2개월 사이에1심부터 최종심까지 매우 빨리 재판이 진행됐음을 알려주는 이들 판결문과 일본군 의병토벌의 활동 상황을 알 수 있다.


"평리원(1907년 12월 말까지 존속한 대한제국 최고 재판소), 피고 황준성을, 정사(政事)를 변경하기 위해 난을 일으킨 자로 사형에 처해야 하나 그 사정을 살펴 감경해 유형(流刑) 10년에 선고한다" -승정원 일기 中


"평리원에서 심리한 순천군 의병 황준성을 유형(流刑) 10년에 처했다" -순종실록 中


그가 의병 전쟁에 가담한 죄로 유배형이 내려졌음을 알 수 있다.

그가 형을 받았을 때가 1907년 12월이다. 곧 그는 군대 해산 직후에 최익현, 임병찬이 주도한 태인 의병에서 윤현보·이봉오·추기엽 등과 함께 참여했다가 체포된 후, 내란죄의 명목으로, 유배형 10년을 받고 전남 완도로 이송됐다.

1908년 말에서 1909년 초를 전후해 전남 내륙 곳곳에서 이루어졌던 의병 활동이 해안 지방에까지 확대됐다. 군대 해산 후 의병에 가담했다가 이 지역으로 유배 온 인물들이 의병에 다시 참여하는 계기가 됐다.

완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황준성은 향교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봉오·추기엽 등이 전주지방재판소에서 10년 유배형을 받고 완도로 오자 1909년 6월 유배지를 이탈해 의병 투쟁에 나섰다. 이때의 모습을 당시 판결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피고(황준성)는 융희 원년(1907년) 12월 25일 내란죄로 인해 유배형 10년에 처해 전라남도 완도에 유배되어 그 집형(執刑) 중에 전남 각 지역에서 폭도의 봉기가 있음을 기회로 해 그 수괴 강성택과 연락하여 1909년 6월 유배지를 탈출하여 강성택의 부하 십여 명과 함께 각각 총을 휴대하고 완도군 고금, 청산, 여호의 각 섬 및 해남군 화이면의 각 부락을 휘젓고 다녔다. 다음 7월 7일 해남군 북종면 이진리에 이르러 그 지역에서 폭도 수괴 추기엽 및 황두일과 그 부하 10여 명과 합동하여 피고가 추대되어 그 수장이 됐고 강성택, 추기엽 등의 각 부장과 함께 그 부하를 인솔해 각각 흉기 또는 칼과 검을 휴대하고 미황사 및 대둔사 부근을 배회하다가 일본수비대의 공격을 받았다" -광주지방재판소 목포지부, 1910


장흥경찰서장 보고 문건에 "황준성은 완도군 군내면 죽청리에 유배중, 1909년 6월 수괴 이덕삼의 부장이 되어 활동했다"라고 나와 있는 것을 볼 때, 황준성이 이 무렵 유배지를 탈출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덕삼의 부장이 됐다고 나와 있는데, 이덕삼은 해남반도에서 200~300명의 대규모 의병을 거느렸던 의병장이었다.

이와 같이 대부대를 거느린 이덕삼의 부대는 얼마 안 있어 해체되고 황준성 등 여러 휘하 의병장들이 부대를 각각 분리해 관리한 것으로 보인다. 곧 분진(分陳)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황준성이 강성택, 추기엽 등의 부장과 함께 부대를 이끌었다고 하는 것이 좋은 예라 하겠다.

일본군 의병 토벌기록에 이때의 상황이 자세히 나와 있다.


"수괴 황준성은 부하 9명을 인솔하고 영국제 사냥총 5정, 화승총 6정, 군도를 휴대하고 완도군 고금도 농상리, 조약도 관상리 숙박, 생일도 장도 등을 휘젓고 다녔다. 수괴 유현수는 화승총을 휴대한 부하 10명을 인솔해 황준성과 동행했다."


각 진의 대장인 황준성, 유현수가 각기 부대를 이끌고 연합작전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분진과 합진을 통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러내고 있는 한말 의병부대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박해현 시민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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