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 속 한말 호남 의병

아침에 적을 치고, 저녁이면 산하에 묻혔던, 그들을 말한다

입력 2022.05.02. 18:54 박지경 기자
[판결문 속 한말 호남 의병] ①의병 전쟁을 이끌다
일제의 '남한폭도대토벌작전'에 체포된 호남의병장 대구 감옥에 갇혀 있던 당시 모습.

[판결문 속 한말 호남 의병] ①병 전쟁을 이끌다 

우리 민족은 나라가 어려울 때 강한 애국심을 표출시켰다. 임진왜란·병자호란 때, 을미사변·단발령과 을사늑약 후 국권 피탈 과정에서 전 민족이 목숨을 건 항쟁을 했다. 이때 분연히 일어난 '의병'은 우리 민족의 자존감이었다.

한국 근대민족운동의 커다란 줄기였던 의병 전쟁은, 일제의 국권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무력투쟁으로 무려 20년 넘게 전개된다.

한말 의병에 대한 최초의 저술인 '의병전'을 기술한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뒤바보(桂奉瑀)가 "의병이라 하면 그 명사만으로도 큰 가치가 있다"고 말한 바처럼,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의병들에 대한 평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스스로 전남 제일 의병장이라 한 함평 출신 심남일(본명 수택)은 "의병은 아침에 적을 치고 저녁에 조국의 산에 묻히는 것"이라 했다.

얼마나 가슴 뭉클한 이야기인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한 박은식은 "'의병'은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난 민군(民軍)"이라고 정의했다. 대한제국 시기에 일어난 의병은,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났던 의병의 전통을 계승해 쓰러져 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오로지 애국심 하나로 일어선 사람들이다.


◆헤아릴 수 없는 이들의 활약

한말 의병은, 박은식이 그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무장한 의병의 피살자가 10만 명이었고, 무고한 촌민으로 학살당한 자는 곧 독립 이후가 아니고서는 그 통계를 구할 수가 없다"라고 기술할 정도로, 의병에 가담한 숫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은 그 죄목으로 "국권을 회복하려는 한국 의사들과 그의 가족 10여만 명을 죽인 일"을 들었다. 일제가 작성한 '조선폭도토벌지' 등을 분석한 연구에서도 가장 활발히 의병 활동이 이루어지던 1907년부터 1911년까지 불과 5년 동안의 의병 숫자를 약 14만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또 다른 일제가 작성한 통계에도 1907년 7월부터 11월까지 불과 5개월 동안 피살된 의병 숫자만 1만 5천 명으로 나와 있다.

한말 의병으로 이름을 남긴 의병들은 10만명이 아니라 적어도 수십만 명은 거뜬히 넘으리라는 추정의 근거들이다.

일제와 독립전쟁을 하다 산화한 의병들 숫자만 일본 측 통계를 따르더라도 1만 5천명을 넘는다. 기록에 잡히지 않은 숫자까지 포함하면 조국의 독립을 지키다 쓰러진 의병 통계를 세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하겠다.

이때 광주·전남 의병들이 항쟁의 중심에 있었다. 임진왜란 때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이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若無湖南 是無國家)"라 해 광주·전남의 역할을 강조한 바 있다. 한말 의병 때도 박은식이 "대체로 각 도의 의병을 말한다면 전라도가 가장 많았다"고 이미 지적한 바 있다.

1908년 광주·전남·북 의병이 일본 군경과의 교전 횟수와 교전 의병 수에서 전국 대비 25%와 24.7%를, 1909년에는 46.6%와 59.9%를 차지하고 있다. 필자가 여러 자료를 통해 분석한 광주·전남에서 1907년 12월부터 1909년 10월까지 전개된 일본군과 의병 사이에 전개된 전투 횟수만 380회 가까이 된다.

거의 이틀에 한 차례이다. 전국적인 의병 전쟁의 기세가 주춤하던 1908년 무렵부터 오히려 치열하게 전개된 우리 지역 의병의 활약은 눈물 없이는 설명할 수 없다.


◆그늘에 가린 업적들

이러한 빛나는 광주·전남지역 의병들의 활약은 일본의 식민지 야욕을 지연시켰을 뿐만 아니라 3·1운동, 학생운동 등 일제강점기에 전개된 독립운동의 토대가 됐다.

이처럼 민족독립운동사에 차지하는 비중이 그 무엇에 비교할 수 없음에도 우리는 일제의 침략에 맞서 목숨을 초개처럼 바친 의병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이순신의 '약무호남 시무국가'만 반복하고 이야기할 따름이다.

일본 정규군과도 2년 넘게 맞서 싸울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실증해 우리 지역 의병 활동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밝혀야 한다.

가령 우리 지역 의병 활동을 연구한 한 연구자는 "1909년 호남 지역의 의병 운동은 유례 없이 강화됐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적 통일을 꾀하는 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그 투쟁의 열기를 다른 지방으로 적극적으로 전파하지 못한 채 끝을 내고 말았다.

이것은 호남 지역의 의병운동이 자체 내에 지니고 있었던 조직상의 결함과 지역성 한계성을 또한 간과할 수 없다"고 해 광주·전남 의병 활동이 성공하지 못한 까닭을 내부의 분열 때문이라는 점을 부각했다.

그러나 세계 최강 러시아를 격파한 일본 정규군과 2년 넘게 물러서지 않은 독립 전쟁을 광주·전남 의병이 지속한 데는 '분진'과 '합진'의 특성을 바탕으로 부대를 운영한 탓이었다.

이러한 특성을 '내부 분열'이라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다음으로 광주·전남 의병사는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다루어진 의병이 강하다.

예를 들면, 심남일 의병, 안규홍 의병, 전해산 의병 등 주요 의병장을 중심으로 부대를 설명하려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몇 년 전 나주에서 임진의병을 다룬 세미나에서 '김천일 의병'이 아닌 '나주 의병'으로 정리하는 것이 중요함을 언급한 바 있다. 심남일이 이끌었던 '호남의소', 안규홍이 이끈 '보성 의병' 등 의병들이 활동한 부대나 의병부대의 주축을 이룬 지역 명칭을 사용해야 의병들의 활동 및 성격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아울러 특정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집중되다 되니 의병전쟁에서 전사한 개별 의병에 대한 조사 및 평가가 소홀했다. 의병 전쟁에 쓰러진 의병들의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나 있지 못하고 있다. 더더욱 그들의 빛나는 활동을 국가로부터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2022년 4월 18일 현재 본적이 전남 출신인 의병계열 서훈자가 326명이다.

10만명 넘는 사람이 참여하여 독립운동사를 빛낸 광주·전남 의병의 활약상에 비한다면 턱없이 적다. 필자가 파악하고 있는 자료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적어도 100명 이상의 서훈 대상이 서훈되지 않고 있다. 지역별 의병 연구 및 서훈 추진이 시급하다.

필자는 광주·전남 독립운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려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판결문으로 본 광주·전남 3·1운동', '판결문으로 본 광주·전남 학생운동' 등 판결문을 번역, 정리함으로써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의 항쟁 모습을 담담히 정리했다.

이제 필자가 주목한 것은 판결문을 통해 의병 전쟁의 구체적인 양상을 살피는 작업이다. 의병 전쟁에 참여하다 체포돼 재판에 넘겨진 의병들의 적지 않은 판결문이 남아 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로 통감부가 설치됐다. 그러므로 그 이후에 이루어진 의병 재판은, 대한제국이 내린 판결이라고 하나, 사실상 일본 당국이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1909년 7월에는 기유각서가 강제로 체결돼 형식적으로 우리가 가졌던 사법권조차 일본으로 넘어갔다. 의병 판결문도 3·1운동, 학생운동과 마찬가지로 일본 사법부가 내린 판결문이라 하겠다. 필자는 의병 전쟁의 다양한 양상을 의병들의 판결문을 토대로 복원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광주·전남 의병이 지닌 구체적인 모습이 생생히 드러나고, 역사적 평가가 새롭게 되기를 바란다. 박해현 시민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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