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규리 ▲경기
광주에 살 때 가끔 엄마와 서울로 백일장을 다녔습니다. 평소에 일반석만 타는 엄마인데 백일장에 간다고 하면 고민도 하지 않고 우등석 두 장을 끊었습니다. 백일장을 핑계로 엄마와 서울 데이트를 즐겼습니다. 백일장 결과에 상관없이 그냥 엄마와 단둘이서만 함께하는 시간이 좋았습니다. 시제를 받아서 한참 글을 쓰고 있으면 멀찍이 돗자리를 깔고 앉아서 집에서 가져온 책에 가만히 밑줄을 긋는 엄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그때만은 역할로서의 엄마가 아니라 진짜 본연의 엄마를 보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심야 버스에서 우리는 택시기사의 덤터기에 화가 난 마음도, 백일장에서 빈손으로 돌아가 속상한 마음도, 휴게소 표 어묵 국물을 먹으면서 같이 삼켰습니다. 그러고 나면 모든 게 다 괜찮아졌습니다. 글 쓰는 일이 저에겐 그때 그 휴게소 표 어묵 국물 같습니다. 모든 걸 다 괜찮게 만드는 마법. 갑자기 마음에 온기를 확 들이붓는 일. 그래서일까요. 원하는 만큼 글이 나오지 않는다며 푸념하는 마음도 글로 남겨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동안 일상 속에서 동그라미만 봐도 콩이 떠오르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빈 세상을 넘어'의 초고를 쓸 때가 그랬습니다. 콩이 모여 단단한 두부가 될 수 있듯 글이 모여 소설이 된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워서 들뜨기도 했고, 동시에 두부가 되어도 언제 어떤 충격을 받아 무너질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밤과 새벽의 경계에서 글을 쓰며 다양한 상념에 빠졌습니다. 그러다 언젠가 베란다를 창밖으로 새벽의 도로를 달리는 차들을 봤습니다. 운전자가 새벽에 일을 나가는 사람일 수도 있고 반대로 돌아오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러고 나니 신기하게도 같은 풍경이 매일 그날의 상태에 따라서 다른 해석을 불러왔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저의 소설이 최종에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살아있는 생생한 풍경처럼 그 자리에 있지만 볼 때마다 다른 밀도와 느낌으로 독자의 삶에 살짝 스며들어 동행하는 그런 글을 쓰고 싶습니다.
저는 이제 막 등산로 앞에 섰습니다. 올해의 당선 소식은 저의 산행에 대한 경쾌한 응원과 지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제일 먼저 기회를 주신 무등일보와 심사해주신 정지아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주셨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간직하며 더욱 진실한 글을 쓰겠습니다.
이미 삶의 큰 일부가 되어버린 사색 식구들 덕분에 절망의 무게를 지고 살던 힘든 시절을 잘 견디며 소설을 놓지 않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소설을 쓰는 자세와 마음에 대해서 많이 나눠주신 끼움 선배님들, 특히 임하 작가님과 규일 선배님 덕분에 방향성을 계속 고민하면서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로가 선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길로 나아 갈 유쾌하고 즐거운 소동 문우님들, 여러분의 다정하고 세심한 합평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한 시절 문학 얘기로 함께 밤을 새웠던 소설동아리 문우님들 덕분에 잊지 못할 멋진 추억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길고 짧은 인연으로 스치며 영감을 주셨던 수많은 분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한때 소설을 쓰려는 마음만 큰 탓에 내용이 형태로 머물지 못하고 문장 사이로 물처럼 새어나가는 글을 썼습니다. 그땐 소설이 뭔지도 모르면서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을 허무는 경계의 소설을 써보겠다고 패기 좋게 선언하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소설의 기본기를 알려주고 소설 쓰기의 첫 시작을 함께해주신 김종광 선생님, 서툰 습작임에도 스타일과 장점을 발견해서 깊은 지혜를 나눠주신 손홍규 선생님, 두 분의 은혜에 무궁한 감사를 드립니다. 우연한 계기로 만나 소중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상은과 한별, 전공과 다른 길을 가는 저를 묵묵히 응원해주는 친구들, 등단 소식을 듣고 함께 기뻐해 준 회사 분들, 이 모두가 있어 오늘의 제가 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가끔은 각박한 현실에서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게 사치일까 생각했습니다. 무겁기만 하고 끝은 보이지 않아서 꿈을 놓으면 모든 게 조금은 더 녹록하고 편해질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손 내밀어 저를 일으켜주던 멋진 언니들 덕분에 지치지 않고 소설을 쓸 수 있었습니다. 희정 언니와 승아 언니께 수줍은 사랑과 커다란 감사를 보냅니다. 언니들을 알게 된 건 정말 천운입니다. 그리고 통화할 때마다 '언니는 소설 쓰는 사람'이라며 저 자신보다 저의 가능성을 더 믿어준 은영과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며 변함없는 사랑으로 곁을 지켜준 남편에게 특히 무한한 애정과 감사를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진수 오빠, 건우, 정신적 멘토가 되어주신 승환 삼촌. 아낌없이 사랑을 주는 수미 이모 감사합니다. 삼 남매 중 유일한 딸이라고 특별대우해준 아빠, 아빠의 방식으로 사랑을 주셨다는 걸 잘 압니다. 사랑합니다.
사실 등단하면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습니다.
천국에서 제 삶을 모두 지켜보았을 엄마에게 이 모든 영광을 돌린다는 말,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단편소설 당선=나규리씨
- 시와 그림으로 피어난 꽃의 절규와 함성 시는 시인의 얼굴이자 내면이다.시인은 시를 통해 속내를 털어놓고 표정에 담지 못한 언어를 끄집어낸다.박노식 시인의 시도 이와 다르지 않다.박노식 시인이 최근 신작시집을 낸 데 이어 올봄을 넘기지 않고 시화집을 내놓았다.그의 첫 시화집 '기다림은 쓴 약처럼 입술을 깨무는 일'(달아실 刊)을 펴냈다.박노식 시인은 등단 후 9년 동안 5권의 시집을 냈고, 이번에 첫 시화집을 내는 것이니 부지런히 시를 쓴 셈이다. 그 원동력이 어디에 있냐고 묻자, "세상과 싸우기 위해, 밥벌이를 위해 삼십여 년을 접어두어야 했던 만큼 '시'를 미치도록 그리워했다"며 "남보다 늦은 나이에 꿈을 향해 걸음을 내디딘 만큼 더 치열하게 시 창작에 몰두하였다"라고 답했다.시화집 '기다림은 쓴 약처럼 입술을 깨무는 일'에는 모두 37편의 시가 실렸는데, 각 편마다 꽃말을 제목으로 하고 부제로 꽃 이름을 달았다. 각 시편마다 서양화가 김상연의 그림이 곁들여져 있어, 꽃시(詩)와 꽃말과 꽃그림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시화집이라고 할 수 있다.가령 "자기애"라는 꽃말을 지닌 "수선화"를 시인은 이렇게 시로 적고 있다."마주 앉아서 그대의 말끝을 따라갈 때면 어느새 저녁이 오고 나의 눈빛은 강 하구에 이릅니다/가만히 보면 그대 얼굴이 우물 같아서 달이 뜨고 거기에 내 얼굴도 떠 있습니다/그대는 흰 꽃잎으로 나는 노란 꽃잎으로 다시 태어나서 우리는 지금 서로의 운명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자기애-수선화' 전문)"모든 슬픔이 사라진다"라는 꽃말을 지닌 "미선나무꽃"은 또 이렇게 시로 풀어냈다."아득한 기억처럼 슬퍼지는 시간들이 있지요/ 폭발 직전의 꽃망울은 순수의 가지에 놓여서 눈을 감아요/ 지난 노래를 부르지 말아요/ 한 장 꽃잎이 강물에 떠내려간들 누가 울어주나요/ 눈물은 온몸에 있어요/ 온몸이 울어요/ 당신이 다시 돌아와 내 눈물의 노래가 되었어요('모든 슬픔이 사라진다-미선나무꽃' 전문)독자들은 시화집을 통해 37개의 꽃과 꽃말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 그런데 꽃말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이야기를 꽃에 투영한 결과이며 오랜 세월 인구에 회자되면서 꽃말로 굳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시인이 이번 시화집의 부제를 '꽃말을 시로 읊은 가슴 저민 자화상'으로 명명했다. 시인이 정작 쓰고 싶었던 것은 꽃이 아니라 꽃 너머, 꽃말이 아니라 꽃말 너머, 그러니까 우리 모두의 자화상인 셈이다.박노식 시인은 이번 시화집 출간에 맞춰 '꽃말시'를 화가 김상연이 그림으로 표현해 낸 특별한 시화전을 연다.시화전은 광주시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에서 5월2~14일까지 박노식 시인의 첫 시화집 '기다림은 쓴 약처럼 입술을 깨무는 일' 출판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마련됐다.전시회 첫날인 5월 2일 오후 6시 오프닝과 출판기념회를 함께할 예정이다.김상연 화가는 "기존의 시화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그림, 화가의 눈으로 시를 재해석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며 "시화집에 인쇄된 그림과 원화가 주는 느낌은 또 다른 것이니 전시회에 오셔서 직접 감상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박노식 시인은 "'꽃말시'는 처음부터 시화집을 목적으로 구상했었다. 시집 한 권 분량의 60여 편을 염두에 두었으나 시화집으로 묶기에는 다소 벅찰 것이라며 그가 말렸다. 그래서 37편에 머물렀으나 꽃만 남고 훗날 그는 구름이 되어버렸다"며 "더는 가슴 저미는 일이 없길 바라므로 나는 죽은 사람처럼 이 시화집을 열어보지 못할 것이다"고 말했다.시인은 차마 더 이상 열어보지 못하겠다고 하니 시화집을 열어 꽃말시를 읽는 일은 우리들의 몫이다..박노식 시인은 광주에서 태어나 조선대 국문과를 나와 지난 2015년 '유심' 신인상을 받고 등단했다. 그동안 시집 '고개 숙인 모든 것' '시인은 외톨이처럼' '마음 밖의 풍경'을 펴냈으며, 화순 한천면 오지에서 시 창작에 몰두하고 있다. 지난 2018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수혜했다. 현재 광주 동구 '시인 문병란의 집'큐레이터로 활동 중이다.김상연 화가는 화순에서 태어나 전남대와 중국 미술대학원을 거쳐 현대미술을 특유의 기법으로 회화와 설치, 미디어, 판화 등 다양한 장르로 표현, 주목을 받고 있다.최민석기자 cms20@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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