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탐구자와 걷는 도시건축 산책

풍경있는 건축물에서 허백련 선생을 느끼다

입력 2021.09.23. 18:18 김혜진 기자
공간탐구자와 걷는 도시건축 산책 <32> 의재미술관
지하에서 올려다 본 브릿지와 1층 모습. 유리입면이 무등산의 풍경을 공간으로 끌어들인다.

공간탐구자와 걷는 도시건축 산책 <32> 의재미술관

필자는 매주 일요일 무등산에 오른다. 후배들의 성화에 시작된 등산이 이제 한 주를 마무리하는 루틴이 됐다. 이 원고를 의뢰받았을 때 어떤 곳이 좋을까 고민하던 중 지난 1년 여 간의 리모델링 공사를 마치고 다시 문을 연 의재미술관이 눈에 들어왔다.

개인적으로 건축물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주변 환경과의 관계 맺기'라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의재미술관은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미소를 짓게 만드는 곳이다. 경사진 대지에 두드러지지 않고 조용히 자리 잡은 건축물이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오래된 바윗돌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의재미술관은 의재 허백련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미술관이다. 허백련 선생은 남종화를 잇는 대표 화백으로, 진도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 후 서울에서 활동하다 1946년 광주에 내려와 30년 동안 무등산 자락에서 생활했다. 화백은 이곳에 살며 평생 남도의 산수를 그렸을 뿐만 아니라 무등산 차밭을 사들여 삼애다원을 설립하고,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삼애학교)를 세우는 등 지역사회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그런 그의 사상을 전승하고 기념하기 위해 사후 20년 즈음 의재미술관 추진위원회가 결성됐고, 76억원이 투입돼 미술관이 건립됐다.

의재미술관 내부 모습. 구름다리 형태의 브릿지가 보인다. 동선의 연계와 지하 층고에 개방감을 주는 요소다.

1999년에 이 미술관의 설계 공모가 있었다. 주변의 남아있는 화백의 흔적과 삼애학교 건물을 보존해야 한다는 조건이 걸렸다. 18개 팀이 응모했다. 조성룡 건축가와 김종규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공동으로 만든 설계가 당선됐고, 건물은 2001년 11월 27일 완공됐다. 완공 당시 의재미술관은 국내 건축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인 한국건축문화대상을 수상했다. 산자락에 만들어진 소담한 미술관이 무려 인천국제공항을 누르고 대상을 차지해 세간의 큰 주목을 받았다.

의재미술관은 무등산 국립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1.7㎞를 걸어야 한다. 사찰에서 운영하는 곳을 제외하면 국립공원 내에 위치한 국내 유일한 미술관이다. 미술관으로 가려면 도시에서 벗어나 산을 향해 20분 정도 걸어야 한다. 20분이라면 꽤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지만 경사도가 완만한 산책로에 나무가 우거져 만들어 준 그늘, 그 옆으로는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물이 선물처럼 펼쳐지는 시간이다.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에 물소리까지 더해져 미술관으로 걸어 오르는 길은 정화되는 기분을 들게 한다.

의재미술관은 무등산의 맑은 정기가 흘러드는 곳에 터를 잡고 있다. 출입구는 두 곳이다. 주차장에서 올라가면 먼저 만나게 되는 남쪽 출입구는 산책로에서 계단으로 연결된다. 다른 출입구는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등산객들을 자연스럽게 초대하는 모양새다.

무등산의 맑은 정기가 흘러드는 곳에 터를 잡고 있는 의재미술관. 친환경적 마감재료와 색상을 사용해 주변 환경에 녹아든 모습이 인상적이다.

의재미술관은 길고 폭이 좁은 경사로에 위치한 대지라는, 쉽지 않은 조건 위에 설계됐다.

건축가는 경사면을 활용해 시설을 배치하고 일대의 산세, 숲의 경관과 조화를 고려해 건물의 규모와 공간의 위치를 정했다. 건축의 외형은 단순하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적삼목 목재와 노출콘크리트, 유리 박스 등 친환경적인 마감 재료와 색상을 사용해 주변 환경에 녹아들게 만들었다.

건물 내부로 들어서면 왼쪽 전면의 유리 입면이 끌어들인 무등산의 풍경에 시선을 빼앗겨 자칫 무심코 지나치기 쉽지만 이 건물의 진수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구름다리 형태의 브리지가 우리를 기다린다.

측면과 정면에는 무등의 풍경이 가득 차 있고, 아래로는 시원하게 뚫린 지하공간이 훤히 내다보이는 이 브리지는 실내에 들어왔음에도 여전히 길 위를 산책 중인 기분이 들게 만든다.

외부에서 내부로 이어지는 길에 동일한 바닥재를 사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동선을 이어지도록 구성한 건축가의 섬세함이 돋보인다.

동선의 연계뿐 아니라 이 브리지는 지하의 층고까지 시야에 넣어 개방감을 두 배로 확보하고, 습기가 많은 지하공간에도 자연광이 닿게 해 답답함을 덜어내고 습도를 조절하는 등 기능적 역할도 수행한다.

의재미술관에 가려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20여분을 걸어야한다. 완만한 산책로와 나무가 만들어주는 그늘, 시원한 계곡물 소리가 또다른 기쁨을 선사한다.

이 유니크한 브리지는 보다 깊은 철학적인 요소도 담겨있다. 단순히 물리적인 기능을 넘어 일종의 전이공간으로 기능한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는 장치인 셈이다. 사람들은 무등산의 사계를 고스란히 실내로 끌어들이는 유리 입면과 수직 프레임을 보고 저절로 의재 허백련의 6폭 병풍 속 산수화를 떠올린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30년을 살다간 의재 허백련과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여러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장치인 셈이다.

이 미술관은 경사로를 그대로 살려 지은 탓에 내부 공간들이 여러 레벨로 분할된다. 전체적인 규모도 크지 않은 데다 좁고 긴 매스라 설계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을 것이다.

건축가는 이런 장애 요소를 마치 축복인 것처럼 적절하게 활용했다. 우선 공간 배치 자체가 예술적이다. 미술관 내부 공간은 어느 하나 동일한 형태가 없다. 또한 완만한 경사로와 낮은 계단 등을 활용해 자연스럽게 산책하는 느낌으로 걷게 만든다. 대지의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경지에 감탄했다.

내부 디자인도 훌륭하다. 지형에 따라 단차가 있는 2개의 기획전시실은 스킵 플로어 형태로 만들고, 경사로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선은 물론이고 상설전시실로 이어지는 공중통로의 경사까지 디자인 요소로 적극 끌어들여 정적인 실내에 리듬감을 부여한다.

또한 건축의 주요한 재료로 사용된 유리와 철제프레임을 디자인적 요소로 활용한 공중통로와, 바닥재와 가림막 등으로 사용한 목재의 따뜻함, 때로는 과감하게 때로는 은은하게 배치된 자연광과 인공광의 조화도 아름답다.

이 미술관이 20년 전에 지어졌다는 사실이 경이롭게 느껴진다. '풍경 있는 건축'과 '문학적 산책로'라는 건축 개념을 적용해 지었다는 것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다만 건축가로서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2층 상설전시실에서 외부로 나가는 출구가 폐쇄된 부분이다. 안전이나 관리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지만 한 편의 아름다운 영화의 멋진 엔딩을 싹둑 잘라낸 것 같은 기분이다.

상설전시관으로 오르는 공중통로의 아름다운 사선을 해치는 거대한 냉난방기와 상설전시실 경사로에 새로 깐 마룻바닥의 이질적 컬러도 못내 마음에 걸린다.

부디 이 건축물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이며, 내부와 외부 그리고 기억과 자연을 경험하며 순환하는 '문화 산책로'라는 점이 이해받고, 건축가가 의도에 따라 섬세하게 구성된 시퀀스가 존중받으며 중후하게 나이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최환석 라온건축사무소 대표

최환석 건축사는

최신 트렌드를 고집하기보다 체형에 맞는 옷을 디자인하는 마음으로 공간을 설계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좋아지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무엇보다 주변과의 조화와 뺄셈의 미학을 추구한다. 현재 라온건축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강남 리에바움, 제주 블랑드 애월, 첨단 중해마루힐 주상복합 등 소규모 건축물에서 아파트까지 다양한 공간을 설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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