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주요 인사들 참석할 듯
한국 생존 주교 중 최고령 기록
1973년 광주대교구장에 임명
오월 구속자석방·진상규명 힘보태
평신도회 활성화 교회내 업적 평가
"사목회 권한 더 높여 민주 운영해야"
■백수(白壽) 앞둔 윤공희 대주교 인터뷰
한국 가톨릭 생존 주교 중 최고령 인물인 천주교 광주대교구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가 올 11월이면 백수(白壽)를 맞는 가운데 그의 백수를 기념하는 행사가 올 8월 열린다. 이 백수 행사는 한국 가톨릭 교회에서는 최초의 행사이기도 하며 윤 대주교가 오랜 주교생활을 함에 따라 그동안 재직했던 교구 등이 잔치에 참여할 것으로 보여 전국적 규모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천주교 광주대교구에 따르면 윤공희 대주교의 백수를 기념하는 행사를 오는 8월 27일 광주대교구에서 진행한다. 한국 가톨릭에서 주교 이상의 성직자가 백수를 맞이하는 것이 최초인만큼 이번 행사 또한 최초로 열린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행사는 광주대교구가 윤 대주교의 백수를 축하하기 위해 마련한 자체 행사이나 한국 가톨릭 최초의 백수인만큼 주한 교황청 대사를 포함한 주요인사와 그가 주교로 재직했던 수원교구 등을 초청했다. 특히 윤 대주교의 한국 가톨릭 내 의미에 따라 전국의 신자들 또한 백수 행사를 찾을 것으로 보여 전국적 규모로 예상된다.
백수에 앞서 무등일보는 지난달 7일 나주 남평 광주가톨릭대학 주교관에서 지내고 있는 윤공희 대주교를 만나 그의 사제 인생을 돌아보고 앞으로 한국 가톨릭 교회에 전하는 당부 등을 들어봤다.
◆비상한 상황 속 '평범'했던 사제
윤공희 대주교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일은 많았지만 평범한 인생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주교로서 교회 큰 책임을 맡아 잘한 것도, 못한 것도 있다"며 "주변에서 다들 도와주니 좋지 않은 일을 모두 지나올 수 있었다"고 지난날을 평했다.
윤 대주교는 1924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나 함경남도 덕원신학교에서 공부했다. 북의 가톨릭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월남한 윤 대주교는 1950년 3월 현재 가톨릭대학인 서울의 성신대학을 졸업하고 동시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후 서울, 부산 등서 사제 생활을 하다 교황청으로 유학한 그는 1957년 교황청립 우르바노 대학교 석사, 1960년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복직한 윤 대주교는 1963년 10월 주교 서품을 받고 초대 수원교구장주교가 됐다. 초대교구장인만큼 인력, 재정 문제 등 갖추고 해결해야할 문제가 많았으나 1967년에는 교구장이 공석이 된 서울대교구의 사정에 따라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서울대교구장 서리를 겸하기도 했다. 당시 서울대교구는 재정상황이 매우 좋지 않아 윤 대주교는 이를 해결해야하는 막중한 임무를 지기도 했다.
당시 서울대교구 사제들의 말에 따르면 윤 대주교는 코피를 쏟으면서까지 서울과 수원을 오가며 재정 문제 해결에까지 열심이었단다.
윤공희 대주교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니 이자라도 먼저 갚아보자며 이곳저곳에 편지를 보내 '도와달라' 요청했다. 제일 먼저 광주대교구 미국인 주교가 돈을 빌려주고 각 신학대에서 기금으로 도와주기도 했다"며 "당시 재정 문제 해결은 내 능력보다는 주변에서 모두 힘을 모아 해결해줬다"고 말했다.
◆사제 인생 대부분 광주서
1973년 10월 윤공희 대주교는 광주대교구장으로 임명됐다. 동시에 대주교로 승품됐다. 윤 대주교는 1980년 5월 광주시민들이 무장한 군인들의 폭력 진압에 스러져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죽어가는 한 청년이 쓰러지면서도 계엄군에 폭행 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후 곧바로 광주의 80년 오월을 상세히 알리는 자료를 전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배포하며 진상을 알리는가 하면 교황을 비롯해 미국대사, 계엄군 장교 등을 만나 원만한 수습을 요구하기도 했다.
1981년에는 5·18 관련 구속자에 대법이 사형 판결을 내리자 전두환을 만나 사면을 요구했으며 같은해 5·18 1주기에는 서울서 추모미사를 진행하며 전국민에게 그날의 진상을 상세히 알리는 강론을 펼치기도 했다. 이어 광주서도 1주기 추모미사에서 구속자 전원 석방을 촉구했으며 이듬해 구속자들이 석방된 이후로는 매년 추모 미사를 갖고 진상 규명 촉구에 목소리를 보탰다.
1973년 광주대교구장으로 와 1980년 5월을 시민들과 겪고 2000년 은퇴까지 사제 인생 대부분을 광주대교구장으로 지낸 그에게 광주는 어떤 의미일까.
"처음엔 낯선 곳이었죠. 아주. 이제는 어디가면 '나는 광주사람'이라고 이야기해요. 제2의 고향이죠. 내가 묻힐 곳이고. "
◆"한국 가톨릭의 미래, 평신도와"
지역내 여러 활동들로 지역서 '큰 어른'으로 통하는 그이기도 하지만 가톨릭 교회 내에서는 젊은 주교로서 새로운 문화를 정착하기도 한 인물이다. 평신도회를 활성화한 것은 그의 업적 중 하나로 꼽힌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전국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가 결성되자 한국에 처음으로 교구평신도 사도직 협의회를 결성하고 평신도 교육을 펼쳤다. 사제들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한국 가톨릭을 평신도에 역할을 부여해 사제와 평신도가 함께 교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하도록 한 것이다.
윤 대주교는 "서울대교구에서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사건을 겪고 나니 평신도의 역할을 강조하게 됐다"며 "평신도들도 사도와 같은 책임을 갖고 서로 협력해야 우리 가톨릭이 제대로 나아갈 수 있다고 봤다"고 말했다.
그가 앞으로의 한국 가톨릭에 바라는 바 또한 교회의 민주적 분위기다. 현재도 한국가톨릭은 평신도로 이뤄진 사목협의회를 꾸려 본당 운영에 대한 회의를 진행하는 등 민주적 분위기가 확산돼있으나 윤 대주교는 지금보다도 더욱 평신도가 교회의 지도적 책임에 동참해야 교회가 발전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윤 대주교는 "최근 들어서는 평신도에 사도적 책임이 많이 깨우쳐졌지만 더욱더 평신도들에 교회의 중요한 책임을 나눠 지도적 책임에 많이 동참하도록 해야한다"며 "한국 가톨릭이 더욱 발전하려면 성직자가 모든 중요 책임을 져서는 안되고 평신도와 함께 이뤄나가는 민주적 분위기가 돼야하며 사목회 또한 의사결정이나 책임, 권한이 더욱 독립적이어야한다"고 강조했다.
글=김혜진기자 hj@mdilbo.com
사진=임정옥기자 joi5605@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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