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독립운동에 뛰어는 광주·전남 교사
애국심 자극·시위 앞장…잇단 옥고
죽음 불사 기개 제자에 고스란히…
천귀례, 여성조직 결성·독립 투쟁
노근후, 학교 떠난후 야학운동 전개
교육통한 독립 정신 항일 투쟁으로

[박해현의 독립운동가 교사 열전] ① 독립운동에 뛰어는 광주·전남 교사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은 혹독한 탄압을 뚫고 독립운동을 전개해 민족 해방을 쟁취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이후 1945년 해방 그날까지 젊은 학생, 청년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나라잃은 수 많은 젊은이들이 일본식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에 앞장선 것이다. 민족의 정기를 잃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바칠 수 있었던 데는 곡성보통학교 신태윤 선생처럼 일제 강점기 속에서도 민족의 주체성을 학생들에게 길러준 교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얘기를 밝히는 것은 올바른 민족 정체성 함양과 관련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무등일보는 일제 강점기 광주·전남 각급 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며 민족혼을 일깨워 준 인물을 발굴해 소개한다. 편집자주
1919년 일어난 3·1운동은 종교계 인사들이 학생들과 연합하여 일으킨 위대한 민족항쟁이었다. 독립선언서를 서울 지역 학교와 시내에 뿌리며 선전 활동에 앞장선 학생들은 3월1일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중앙 지도부가 없는 공백에도 불구하고 탑골공원에서 열린 기념식을 성공리에 거행하였다. 특히 3월5일 학생들이 독자적으로 추진한 남대문 역 시위는, 1만명 이상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로,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결정적 계기를 이루었다.
◆광주·전남 22개교 시위 참여… 34% 달해
광주·전남에서도 만세 시위의 전개 과정에 학생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기존 연구에서는 64개 학교 가운데 7개 학교가 참여해 전국 평균보다 훨씬 낮다고 분석하였다.
하지만 필자가 최근 살핀 '판결문으로 본 광주·전남 3·1운동'(한국학 호남진흥원·2021)에서는 22개 학교가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광주·전남 학교의 34%에 달하는 숫자였다. 판결문에 드러나 있지 않은 학교를 포함하면 이보다 비율이 높았음은 분명하다. 판결문에 나타난 수감 학생만 하더라도 117명으로, 농업에 종사한 인물 130명과 거의 비슷하다.
이는 광주·전남 만세 시위를 학생들이 이끌었음을 말해준다. 또 다른 통계에서 참여 학생에 대한 처분 비율을 보면 광주·전남에서 302명이 참가해 222명이 처분을 받아 73.5%에 달해 두 번째로 많은 비율을 차지한 경북 37.1%와도 비교되지 않는다.
이렇게 학생들이 시위의 전면에 나선 데는 목숨을 건 교사들의 민족 교육의 영향이 컸다. 최근 '판결문으로 본 광주·전남 3·1운동'과 '판결문으로 본 광주·전남 학생운동'(한국학호남진흥원·2021)을 잇달아 번역 출간한 필자는 3·1운동, 학생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교사들이 학생에 끼친 영향이 컸음을 실증적으로 살필 수 있었다. 심지어 교사들이 학생 시위를 이끌기도 하였다.
1919년 3월 영광 3·1운동을 이끈 영광보통학교 교사 이병영은 학생들에게 "조선이 현재 그 행동을 속박당하고 있음이 유감이다. 너희들은 속히 이 구속을 면하기 위해서는 조선 독립을 노력해야 한다"라고 하며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하다 구속되어 징역 2년을 복역하였다.
곡성 보통학교 교사 신태윤은 천렵(川獵)하는 학생들에게 "조선의 사정이 태평하게 천렵을 즐길 때가 아니다. 이미 남원·담양의 각 보통학교 학생들은 솔선하여 조선 독립운동을 외쳤다. 썩어빠진 곡성의 청년들은 그러한 용기도 없다"라고 하며 학생들의 애국심을 자극하고 시위를 앞장서 이끌다 징역 2년을 복역하였다. 광주 3·1운동을 계획한 첫 모임부터 참여하고 시위에 학생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한 숭일학교 최병준,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을 시위에 참여시킨 박애순 교사도 광주 시위를 빛낸 영웅이었다.
목포 정명여학교 학생운동의 주역 천귀례는, 투옥 후에 암태 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 주었고, 여성 독립운동 조직인 목포 근우회 결성에도 앞장서는 등 평생을 독립 투쟁의 선봉에 섰다.
완도 사설 학술강습소 교사 박성래는 1925년 학생들에게 '지나친 감정에 의지'라는 제목으로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아동의 각성을 촉구하는 유인물을 제작하였고, 1926년 1월20일에는 '신년을 맞이하는 어린 친구에게', 동년 2월 24일 '고민의 서곡' 등의 유인물에서 현실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제작하여 교육하다 집행유예 3년 형을 받았다.
1929년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한 함평 출신 노근후 교사는 첫 부임지인 해남 마산보통학교에서 우리말 노래를 가르치고 학생독립 운동단체에 후원금을 내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 구속되어 학교를 떠나게 되었음에도 굴하지 않고 야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사를 지낸 김용근은 1937년 영광 염산의 개량 서당에서 임시교사로 있을 때 "조선이 일본을 극복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그러면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게 될 것이다"고 하여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맞서 강인한 민족정신을 가질 것을 강조하다 투옥되었다.

◆"조선이 일본을 극복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최근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광주고보 교사 송홍은,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강조한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1909년 광주서석초등학교의 전신인 광주보통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광주농업학교, 광주사범학교에서 근무하면서 민족의식을 일깨웠던 송홍은 1924년 광주고보에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일제 감시를 피해 우리 역사를 가르쳤다. "선생은 학교 당국의 감시 눈길을 피해 수업 시간이면 칠판에 강의 제목만 써 놓고 한국 역사 및 세계정세 등을 설명하며 학생의 미래의 지표는 조국광복임을 강조하였다."라는 졸업생의 회고가 당시의 사정을 말해준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우리 교사들은 교육을 통해 민족 독립을 쟁취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스승의 가르침은 학생들의 항일운동으로 이어졌다.
1910년 국권을 빼앗은 일제는 조선교육령을 반포하고 내선일체를 표방하며 우리 민족 얼을 말살하려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민족의식이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광주고보 학생들이 일으켰던 무등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남정준의 판결문 일부이다.
"(남정준은) 언문(조선어) 통제, 국어(일본어) 상용, 창씨 제도, 지원병 제도 등은 조선 민족을 멸하고 내지인(일본인)의 세력 신장을 꾀하는 기만정책이라고 판단하고, 조선 민족은 다른 민족보다 열등하지 않은 기질을 소유하고 있으나 일한 병합 이후 중심을 잃고 겉으로는 제국의 압박에 굴복해 있다고 해도 자세히 이를 보면 조선인 사이에는 피압박민족으로서의 의식은 쌓여 있고, 때가 이르면 폭발하여 독립의 실현을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1923년 출생인 남정준이 일본 식민통치를 비판하고 독립의 강한 의지를 표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42년 임시정부와 연결된 비밀결사 무등독서회를 결성하여 전원 구속되어 온갖 고문을 받았던 옥대호 등도 1925년 전후에 태어난 10대 후반의 어린 학생들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학교나 사회에서 철저한 식민지 동화교육을 받았음에도 학생들이 정체성을 잃지 않고 민족 독립을 위한 항일의지가 더욱 굳건해진 데는 선배들로부터 이어진 전통과 학생들에게 혼을 심어준 자랑스러운 광주·전남의 스승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스승들의 기개가 고스란히 제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들의 얘기를 통해 36년 가까이 지속된 일제의 간악한 식민통치에도 독립운동이 해방 그날까지 쉼 없이 이어지게 된 원동력이 무엇인가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초당대학교 글로벌화학기계공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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