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는 민주화의 '성지'로 불린다. 1979년 12·12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의 신군부는 이듬해 5월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따스했던 '서울의 봄'은 급속히 얼어붙었다. 모두가 숨죽이고 엎드려 주저했다. '시위 진압에 공수부대가 투입된다'는 썰이 돌면서다. 광주는 거침 없었다. 대가는 처참했다. 유언비어는 사실이었다. 광주는 총칼·군홧발에 무참히 짓밟혔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이런 의미일까. "해마다 5월이면 한 집 건너 한 집이 제사 지낸다"는 말이 돌 정도로 많은 사상자가 났다. 직접 피해를 당한 시민은 모두 5천517명에 달했다. 대학생·지식인들, 살아남은 자들의 감정은 복잡했다. 죄의식과 부채의식에 짓눌렸다. 광주가 80년 이후 재야·학생 운동권 발흥의 상징·명분이 된 이유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일이 민주화 운동이 됐다"고 했다.
5월 광주의 생채기와 아픔은 진행형이다. 우리사회의 좌·우, 지역·계층 간 갈등·대립의 출발점은 신군부의 집권과정에서 말미암았다. 5·18민주화 운동은 진보-보수 이념의 발화점이다. 지난 40여년 간 보수 세력들은 "5·18은 북한군 폭동"이라며 끊임없이 폄훼·왜곡했다. 망국적 지역감정도 이 때부터 싹텄다. 신군부 세력은 대구·경북을 기반으로 한 보수정당의 모태가 됐다. 한국의 정치지형의 양대축은 호남-영남으로 맞섰다.
대통령 취임식장 옮겨놓은 듯
5월 광주가 다시 뜨겁다. 대선으로 여·야가 뒤바뀐 상황에서 맞는 지방선거 국면에서 5·18이 소환되면서다. 올해 42주년 기념식은 파격의 연속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기념식 총동원령을 내렸다. 사실상 대통령의 1호 지시 사항이었던 셈. 대통령실 수석과 장관·국민의힘 의원들이 대부분 참석했다. 대통령 취임식장을 광주로 옮겨놓은 듯 했다.
세 가지 측면에서 흥미로웠다. 우선, 5·18에 대한 평가다. 올해 기념식은 윤 대통령 취임 후 첫 국가기념일 행사였다. 진보-보수 정권의 접근은 참석에서부터 갈렸다.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게 지난 97년. 현직 대통령의 참석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처음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5년 모두, 문 전 대통령은 세차례 찾았다. 반면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에만 참석했다.
국정운영의 핵심 키워드인 '자유민주주의'를 5·18과 연결했다. 윤 대통령은 "5월 정신은 보편적 가치의 회복이고, 자유민주주의 헌법 정신 그 자체"라고 했다. 후보 시절엔 5·18 정신을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반독재 투쟁이라 평가했다. 자유민주주의는 출마선언문부터 취임사까지 빠지지 않는 메시지다.
둘째는 광주 발전에 대한 비전. 윤 대통령은 "광주와 호남이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 위에 담대한 경제적 성취를 꽃피워야 한다"며 호남 발전론을 폈다. 경제 성장 전략을 자유에서 찾는 대통령의 철학으로,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꼽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와도 맥락이 닿아있다. 경제는 인공지능(AI)과 첨단 기술기반의 산업 고도화를 통해 발전시킨다는 전략이다.
윤 대통령은 광주는 낙후된 경제 발전이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고 한다. 윤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꼽히는 주기환 국민의힘 광주시장 후보는 "(대통령께서) 평소에도 검찰총장을 광주·전남사람 시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광주시민들이 잘 먹고 살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언급하곤 했다"고 전했다. 다만, 초대 내각 인선땐 대통령이 직접 광주·전남 출신 인사 두 명에게 장관 합류 여부를 타진했으나 거절당했다고도 했다.
셋째는 국민 통합 메시지다. 행사 과정·절차도 이전 보수 정부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이 대표적. 강경 보수들이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던 노래지만, 갈등·마찰은 없었다. 또한 윤 대통령은 5·18민주묘지 정문인 '민주의 문'을 통해 입장했다. 보수 대통령으로선 처음이다.
尹 "광주 담대한 경제적 성취 꽃피워야"
기념식은 많은 화제를 낳았다. 문제는 실천과 행동이다. 정치 지도자의 약속과 발언이 지니는 무게와 파급력은 가늠하기 어렵다. 영화 '킹스 스피치'는 1939년 9월 3일,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선언한 영국의 조지 6세의 명연설을 다뤘다. 위기의 순간, 진심을 담은 지도자의 말은 국민의 마음을 한데로 모았다. 광주는 민주당 계열의 진보세력 심장부다. 보수 정부가 5·18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국민 통합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는 점은 평가할 만 하다.
이맘 때면 5·18묘지 가는 길엔 새하얀 이팝나무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다. 윤 대통령이 오늘 다녀갔던 길이다. '이밥(흰 쌀밥)'라고도 불리는데, 꽃잎이 뜸 잘든 하얀 밥알처럼 생겼다. 꽃은 '주먹밥'을 떠올리게 한다. 광주의 주먹밥은 단순한 먹을거리가 아니다. 5·18 당시 광주 시민들이 고난을 함께 했던 '나눔과 연대의 실천'이다. 윤 대통령의 '광주 약속'이 그 간 소모적 갈등을 끊고, 통합의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대동(大同)의 상징인 광주 주먹밥엔 더불어 사는 나눔 공동체의 의미가 담겼다. 유지호 부국장대우 겸 뉴스룸센터장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