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칼럼]서구청 ‘가로수 행정’ 낙제점

@류성훈 입력 2021.12.22. 11:03

또다시 한 해의 마지막 달이다. 일년 중 가장 밤이 긴 동지(冬至)를 지나면서 겨울이 더 깊어간다.

동네 뒷산은 얼마 전까지 빛 고운 단풍을 자랑하더니 겨울로 접어들자 빈 가지를 흔들고 선 나무들만 남아 있다. 풍성한 잎을 자랑하던 은행나무를 비롯 메타세쿼이아, 이팝나무 등 도심 가로수들도 차디찬 겨울을 이기지 못하고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아 차가운 거리를 더 추워 보이게 하고 있다. 쓸쓸한 겨울 풍경이다.

가로수의 몸짓은 철 따라 변신한다. 봄에는 새싹을 틔우고 여름에는 녹음을 우거지게 하며 가을에는 형형색색의 단풍으로 물들고, 겨울에는 나목(裸木)으로 서 있으며 봄을 기다린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내내 이웃과 동고동락 해오던 아름드리 나무들이 올 가을 광주 서구에서 모조리 싹둑 베이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겪었다. 시민들이 뒤늦게 알고 깜짝 놀라 가슴 아파하고 분노하는데, 가관인 것은 해당 자치단체의 반응이었다.

가로수를 베도록 허가해 준 서구청이 '수종 교체가 불가피했고 절차상 문제 없다'며, 주민들의 상식에선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해명을 견지했다.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은 것은 백번 양보해 그렇다 치더라도, 최소한의 설명조차 하지않았으면서 되레 큰 소리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30년이 넘도록 광주 서구 월드컵4강로와 염화로 도심을 지켜왔던 가로수 118그루가 지난달 재건축 아파트 주변 도로 확장 과정에서 모두 잘려나갔다. 베어진 가로수는 은행나무 62그루, 메타세쿼이아 56그루에 달한다. 이 나무들은 1987년 염주주공아파트가 지어지면서 심어졌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시민들에게 그늘과 선선함을 안겨주고, 마을 풍경으로 자리 잡았던 가로수들은 직경이 20~80㎝에 이르고 높이도 7~8m에 달할 정도로 굵직한 나무들이었다. 34년동안 이곳에 뿌리내리고 살던 나무는 최근까지도 단풍이 곱게 물들었다. 은행나무와 메타세쿼이아 나무는 공룡시대부터 지구에 살아 '화석식물'으로도 불린다. 은행나무는 광주시를 상징하는 나무이기도 하다.

그런데 염주주공아파트를 부수고 2천세대에 가까운 대규모 아파트를 짓는 염주주공 주택재건축정비사업(재건축조합) 측은 지난 11월 서구청에 '가로수 이식 협의'를 요청했다.

염주주공 재건축 사업은 당초 1천198세대에서 800여 세대가 늘어난 1천976세대를 짓게 되면서 관계로 기존 도로를 3~8m 확장해야 했다. 때문에 이 구간에 식재된 가로수의 위치변경이 불가피했다.

서구청은 기존 가로수를 옮겨 심는 방식 대신 모두 베어내고 직경 15㎝ 이상의 이팝나무 141그루를 새로 심는 방식을 건의한 재건축조합 측의 협의 요청을 10여일만에 일사천리로 허가해줬다.

'행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할지언정, 서구는 주민을 위한 최소한의 상식적인 절차도 거치지 않고 수령 30년 이상의 가로수 제거를 결정해버렸다는 비난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서구청은 '도로와 가로수의 공존 방안', '수십년간 가로수를 만끽했던 지역민들의 추억', '가로수의 공익적 기능' 등을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최소한 주민들의 의견이나 전문가의 자문을 구하는 절차 조차 없이 속전속결로 제거를 결정했다.

다행히 광주시에는 가로수들이 함부로 베어지지 않도록 '가로수 관리 조례'가 존재하지만, 무용지물이었다. 2019년 제정된 이 조례에 따르면 가로수를 제거·교체할 때는 '도시림 등의 조성·관리 심의위원회' 심의를 상정한 후 실행토록 하고 있는데도, 서구청이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 작업으로 인정해 재건축조합 측이 수목들을 베어낼 수 있는 명분을 줬다는 논란도 거세다. 주민을 위한 서구청인지, 아파트 재건축조합을 위한 서구청인지 의문이 들 정도다.

"제거된 나무는 다수의 민원이 발생, 가로수 수종 변경이 필요했고, 재건축조합이 '원인 행위자'이기 때문에 조례 대상이 아니다"고 서구청은 행정상 정당함을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지역사회의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그제야 '대형 가로수 처리방안 업무 간담회'를 하는 등 전형적인 뒷북행정을 펼쳐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다.

시민들은 밑바닥을 드러낸 서구청의 가로수 행정에 분노하고 허탈해하면서, 함부로 잘려 나가는 가로수가 더는 없도록 관련 제도의 재정비 및 근본적인 대책 마련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설이나 존치에 대한 고민 없이 30년 이상 된 가로수를 새로운 수목으로 대체하면 된다는 식의 미숙한 행정을 편 서구청은 다시 한번 절차상 아무런 하자가 없었는지 성찰해보고, 지역사회가 분노한 이유를 정확히 파악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강산이 세번 이상 바뀌는 동안 한 곳에 뿌리내리고 살아오다가 2021년 11월27일과 28일 생을 마감한 118그루의 나무들에게 미안함을 전한다. 류성훈 취재3부 부국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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