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산제·고인돌 등 역사와 전통 살아 숨 쉬는 마을들

입력 2022.11.30. 17:35 박지경 기자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남구⑪]남구 효덕~송암동
광주 남구 덕남마을에서는 약 400년전 마을이 형성 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거르지 않고 정월 대보름에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일제시대에 당산제를 지내지 못하도록 '굿물(농악기)'을 모두 공출해 갔어도 마을사람들이 몰래 결의해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당산나무 아래에 당산할아버지와 당산할머니 묘가 있는 특이한 사례이기도 하다.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남구]남구 효덕~송암동


효덕

산과 물이 풍부한 골짜기에 자리해

덕남·노대·진제, 당산제 명맥 유지

마을 풍요와 평안 기원하며 제 올려

노대마을 만오정 앞엔 고인돌 10기


◆송암

임정마을서 선사시대 주거지 확인

지석·효덕·송하 등에 고인돌 분포

청동기시대부터 사람 살았던 터전


광주 남구는 관할구역의 모양새가 버선발 같이 생겼다. 그것을 크게 세 구역으로 나눠볼 수 있다. 구청과 양림동을 포함한 시내 일원이 버선발의 발목에 해당한다. 효덕 송암동 일대가 버선발의 뒤꿈치 형상을 하고 있고, 발등에서 발가락까지 서남쪽으로 넓게 퍼진 지역이 남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대촌동 일원이다. 남구는 사직동과 광주공원, 광주향교가 자리한 시내의 중심부이면서 근대 공교육이 뿌리내린 곳이다. 영산강을 통해 내륙도시로 들어오는 첫 들머리에 자리해 목포에서 뱃길로 서양 문물이 들어와 '호남의 예루살렘'으로 불리기도 했다. 최초 또는 최고 서양식 무엇무엇 하면 대개 양림동에서 나온다. 그때는 지금 서현교회가 있는 언덕 아래까지 강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시내 일원이 개화기의 은성(殷盛)했던 한 시대를 풍미하는 곳이라면 대촌동 일대는 호남 향약의 발상지이고, 고경명이 태어난 곳이며, 당산제와 고싸움놀이 같은 우리 정신과 문화가 면면히 흐르는, 전통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이다. 그 사이에 효덕동과 송암동의 이야기가 있다.


효덕동은 북으로 금당산이 자리한 진월동, 동으로 분적산 아래 노대동, 남으로 건지산이 있는 덕남동, 서로 도등제와 숲이 우거진 행암동을 법정동으로 두고 수많은 자연부락을 거느린 큰 동네다. 사방으로 산과 물이 풍부한 골짜기에 자리한다.

효우(孝友)동의 효(孝)와 덕남(德南)동의 덕(德)을 취해 효덕동이다. 노대(老大)마을은 '노대실', '노대굴'이라고도 했다. 노대실은 산이 갈라진 곳에 세워진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중국 '악부시집'에 나오는 시 '장가행(長歌行)'에 '젊어서 노력하지 않으면(小壯不勞力) 늙어서 부질없이 슬퍼한다(老大徒傷悲)'는 대목의 '노대'를 출처로 보기도 한다.

또 김재선이라는 사람이 정착해 살았는데 그를 '노대(老大)한 유자(儒者)'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고, 함안윤씨, 밀양박씨, 김해김씨가 화목하게 살면서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 노대마을로 불렸다는 일화 등 이름과 관련한 재미난 얘기들이 많다.

이곳에는 고인돌 10기가 남아있다.

마을 앞에 함안윤씨 제각으로 만오정이 있는데 그 정자 40m 사방으로 고인돌 10기가 군집돼 있다. 상석이 직사각형인 8호기가 가장 크다.

이 마을은 효덕동에서 화순 넘어가는 계곡에 자리한 오지였다. 지금은 칠구재 터널이 뚫려 교통이 좋지만 예로부터 화순 사람들이 명절을 쇠기 위해 광주로 장을 보러 올 때 넘던 고개였고, 5·18 때는 많은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화순으로 피신을 했던 곳이다.

노대마을 만오정과 고인돌

노대마을은 효우동 일대에서 가장 큰 마을로 번성해, 성종의 왕비이자 연산군의 생모로 후에 폐비가 된 함안 윤씨 종친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마을이 해방 직후 정치적 격변 속에서 몰락해 1950년대에는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가 양동시장에 나가 팔고 그 돈으로 죽을 쑤어 먹을 정도로 빈한한 생활을 했다는 얘기도 전한다.

밀양박씨 효열 기념비, 돈암처사 김덕경의 유허비, 남촌 윤지화의 재실 분산재 등 유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윤지화는 1506년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추대하는 중종반정이 일어나 윤씨 일가에 대한 핍박이 시작되자 이곳에 들어와 살았다.

조계 정만종, 눌재 박상, 하천 고운 등과 교분이 깊었으며, 그의 행적이 '광주읍지'에 남아있다.

구암마을은 노대마을에서 칠구재를 넘어 화순 세량리로 가는 길목에 있다.

옛날 옹기를 굽던 독점이 있었다고 하며, 그 근처 다리를 지금도 '독점다리'라고 부른다. 이 마을은 화순 태생의 명창 김채만(1865~1911)이 득음을 하기 위해 숨어 살았던 독공(獨功)의 장소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전설의 명창 이날치를 사사해 전라감사가 베푼 소리판에 나갔으나 송만갑에게 밀리자 그 길로 당시 '속골'이라 불리던 이 마을에 들어와 소리 공부에 전념했다고 한다.

단단하기로 유명한 대추나무 토막을 북채로 두드려 두 조각이 나도록 3년간 정진한 끝에 득음에 이르렀다는 그의 일화가 전한다.

덕남마을은 덕고개를 타고 들어가는 계곡 안쪽에 있다. 원래 이름은 둔택(屯澤)이었는데 마을이 커지면서 덕남으로 고쳐 불렀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부유하게 살아 광주의 첫 부촌으로 재매마을(신안동 봉정산 아랫마을)을, 두 번째로 덕남마을을 꼽을 정도였다고 한다. 1908년 겨울 큰불이나 마을이 전소된 뒤 복원됐다.

마을 뒤편에 덕남제라는 저수지가 있다.

이 물은 향등제를 거쳐 수춘천의 지천이 된다.

마을 서쪽에 덕남정수장이 있는데 1994년부터 주암호의 물을 하루 44t가량 정수해 시내에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덕남마을에서는 400여년 전 마을이 처음 생겨난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정월 대보름에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일제강점기 당산제를 지내지 못하도록 효천 주재소에서 굿물(농악기)을 모두 공출해 갔을 때도 사람들이 몰래 결의해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당산은 마을 왼편 귀목나무숲을 이루는 곳에 윗당산(할아버지), 동산 아래 길가 흙무덤에 자리한 아랫당산(할머니)이 있었다.

두 당산은 최근 마을도로 확장사업 때문에 윗당산으로 합장해 지금은 하나가 됐다. 아들이 없는 사람들이 화주를 지원해 정성을 올리면 반드시 아들을 점지해 주는 효험이 있다고 전해진다. 전에는 당산제를 지내는 날 마을잔치가 열리면 외지에 나갔던 젊은이들이 고향을 찾아 함께했을 만큼 성대하게 치러졌다. 남구에서 당산제의 명맥이 유지되는 곳은 덕남, 노대, 진제마을 정도이고, 10년 전까지만 해도 세 마을을 포함한 구소, 승촌마을, 그리고 벅수제를 겸했던 임정마을에서 당산제가 열렸다고 한다.

송암동은 송하(松荷)동의 송(松)자와 임암(林岩)동의 암(岩)자를 취해 이름 지어졌고, 법정동으로 송하동·임암동·행암동 일부를 관할한다. 송하동 북쪽으로 금당산 자락에서 황새봉에 이르는 능선과 임암동 화방산 자락이 자리하며 남으로 칠구재에서 뻗어 나온 능선이 행암동 다릿재를 지나 임암동의 남쪽 능선을 이루고 있다.

송암동 임정마을 뒷산에서 선사시대 주거지가 발견됐다.

1977년 전남대 박물관에서 발굴할 당시 군사훈련장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부분 발굴됐다.

주거지는 풍화된 화강암반을 깎고 들어간 타원형 형태로 발견됐다. 북벽 가까이 감실이 있었고 기둥구멍이 남아있어 천막이나 원형 움집, 벽에 원추형 지붕을 씌운 몽고포식 형태의 청동기시대의 집터로 추정된다. 민무늬토기 조각, 석기류 등 80여점이 출토돼 당시 석기를 제작하던 곳으로 보고 있다. 이 주거지에서 머지않은 압촌동과 지석동, 효덕동, 송하동 등지에서 청동기 시대 족장의 무덤인 고인돌 25기 이상이 분포돼 있는 것으로 보아 BC 6~3세기 전후 취락 집단 분포지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효천역 서편으로 펼쳐진 들을 따라 경지 정리가 잘 된 너른 농토가 있다.

효천역을 중심으로 경전선이 있어 일찍이 철도교통이 발달했다. 1970년대 말 조성되기 시작한 송암산단이 자리하고 있으며 농토를 중심으로 시설원예가 활발한 지역이기도 하다. 1930년 광주-여수간 철도개통으로 그해 12월 영업을 시작한 효천역은 이 일대 주민들에게 추억이 서린 곳이다. 송암동은 해방 이후 연탄공장으로 유명했다. 철길로 화순 방면에서 실어 온 석탄의 적하장소로 편리했고, 미개발지역으로 상주인구가 적은 녹지대였고, 광주의 상풍(常風)인 북서풍을 받아 연탄재가 도심으로 날아들 가능성이 작았기 때문에 연탄공장의 최적지로 각광받은 곳이다.

1970년대 국도 연변을 따라 연탄단지가 조성되면서 많은 연탄제조업체들이 이곳에 모이게 된다. 1954년 시내 학동에서 문을 연 남선연탄은 72년 송암산단으로 옮겨 지금까지 영업을 하고 있는 유일한 연탄공장이다. 사업이 잘 풀리던 시절 남선연탄은 150여명의 직원이 하루 100만장 이상을 찍어냈는데 지금은 10분의 1로 줄어 직원 10여명이 하루 10만장 정도를 생산하면서 겨우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광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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