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꼭대기 범이 포효하듯, 쩌렁쩌렁 울리는 마상격문

입력 2022.10.19. 18:14 이석희 기자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남구⑩] 대촌동 포충사
29세에 홍문관…명종 총예 받아
송강·석천 등과 '성산사선' 불려
쟁기 던지고 밭두둑서 일어나라
감동한 사람들 모이니 6천 의병
금산 전투 등서 순절 가족만 7명
임진왜란 이후 사당 짓고 제 모셔
압촌동 고씨삼강문.(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2호) 이 삼강문은 고경명(1533~1592)선생을 비롯한 그 일가의 충,효,열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이다. 정려는충신, 효자, 열녀 등 그들이 살던 마을입구나 길 앞에 붉은 칠을 한 문을 세운 것으로 국가에서 이러한 정표(旌表)를해 줌으로써 해당인물이나 후손에게 포상하는의미와 함께 풍속의 교화에 보탬이 되고자 한 것이다. 그림=김집중 작가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남구⑩] 대촌동 포충사 

◆말 못 타는 늙은 선비 말에 오르다

"나 고경명은 진실된 마음의 노인이며 백발 부유(腐儒)로서, 한밤중에 닭소리를 듣고 많은 고난을 견딜 수 없어 중류의 노를 쳐서 외로운 충성을 스스로 다짐하였다.… 위급존망의 날에 처하여 감히 하찮은 몸을 아끼겠는가. 처음부터 의병이라 칭한 이상 직분에도 매이지 않았으며, 병졸은 곧은 것으로서 장렬함을 삼았으니 강약을 따질 것도 없다.…아! 우리 열읍 수령, 각 처 사민(士民)들아! 충심이 어찌 임금을 잊을 것이며 의리상 마땅히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니, 혹은 무기를 빌려주고 혹은 군량을 도우며, 혹은 말을 달려 전장에서 앞장서고, 혹은 분연히 쟁기를 던지고 밭두둑에서 일어나라. 제 힘이 미치는 데까지 오직 의로 돌아가서 능히 나라를 위해 난을 막는 자가 있다면 그와 더불어 행동하기를 원한다."

말도 제대로 탈 줄 몰랐던 노선비가 말 위에서 썼다는 '마상격문(馬上檄文)'의 부분이다. 고경명의 나이 60세, 그 옆에 서 있는 것처럼, 그의 열기와 결기가 그대로 전해온다. 쟁기를 던지고 밭두둑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될, 바람 부는 들판에 서서 범이 포효하듯,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이 북상하던 중 전주에 이르렀을 때, 임진강에서 관군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각 도의 수령과 백성, 군인들에게 보낸 격문, 이 글에 감동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휘하로 구름처럼 모여들었으니, 그 수가 6천명을 넘었다고 한다.

◆식년문과 장원 급제 시문 뛰어나

광주 남구 대촌동 행정복지센터에서 남으로 내려가면 고싸움 놀이전수관이 있는 칠석(漆石)마을이 있고, 북으로 올라가면 제봉산 능선 아래 포충사가 가까운 압촌(鴨村)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의 옛 이름은 산이 어울려 있는 골짜기라는 뜻의 '올미실'이었는데 '올'이 '오리'로 변천하면서 '오리압(鴨)'이 들어간 '압촌'이 되었다.

15세기 말엽 장흥백파 고자검(高自儉)이라는 사람이 들어와 살면서 일가를 이루었다. 그가 고경명의 증조부다. 조부는 기묘명현의 한사람인 고운(高雲)이고 아버지는 대사간을 지냈다.

1552년(명종 7) 사마시에 수석에 이어 왕이 성균관에 나와 치른 시험에서도 수석을 차지했다. 그해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다. 29세에 홍문관이 되었으며 시문에 능해 명종의 총애를 받았다.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에 오르며 승승장구하다 명종 18년,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며 좌천 파직돼 광주로 낙향했다. 이후 호남가단을 이끌던 송순을 사사했다. 첫 벼슬길에서 물러나있던 19년의 세월, 그는 시를 지으며 송강 정철, 석천 임억령, 서하 김성원과 함께 '성산사선(星山四仙)'으로 불렸다. 송순의 면앙정 절경을 노래한 '면앙정 삼십영'을 김인후 임억령과 함께 지었다.

압촌동 고씨 삼강문

◆"호남 시인 중에 제봉이 으뜸"

황백국(黃白菊)

본래 색으로는 황색을 귀히 여기고

천품은 백색을 아주 귀하게 여긴다

세상 사람들 보는 눈은 다를지라도

찬 서리를 이겨낸 나뭇가지는 같도다

세상 사람들이 노란 국화가 아름답네, 흰 국화가 으뜸이네 하지만 찬 서리 이기고 꽃을 피워낸 그것 하나면 충분하지 않은가, 라고 노래한 이 시에서 그의 눈은 꽃에 머물지 않고 가지와 뿌리로 내려가 있으며, 더 깊게는 생명에 닿아있다. 훗날 백사 이항복은 '호남에 시인이 많다고들 하지만 그 가운데 제봉이 가장 뛰어나다'는 글을 남겼다.

그는 은거를 마치고 49세(선조 14)에 영암군수로 다시 벼슬길에 나서 10여년을 봉직한 뒤 정철의 추천을 받았다는 이유로 다시 파직이 되어 귀향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패장으로 죽음이 있을 뿐이다"

고경명은 격문을 쓴 지 한 달 만에 임진왜란 사상 최대 규모인 의병 6천명을 모아 유팽로, 양대박, 안영을 부장으로 삼고, 종후, 인후 두 아들과 함께 출전했다. 전주를 출발하여 북으로 진군하던 중 왜군이 금산을 넘어 전주를 칠 것이라는 소식에 계획을 바꾸어 금산으로 향했다. 7월10일 운명의 날, 금산전투에서 정병 100여기를 거느리고 서문을 치는데 동문을 공격하던 관군 쪽이 왜적에 무너지면서 쫓기고 도주하고, 전세가 급박하게 내몰렸다. 종사관 안영이 후퇴를 간했다.

고경명은 "내 어찌 구차하게 죽음을 피하리오, 패장으로서 죽음이 있을 뿐이다."는 말을 남기고 안영, 유팽노와 함께 적장의 칼을 막으면서 분투하다가 그곳에서 전사했다. 차남 인후도 최전방에서 수많은 적들을 쳐내다가 마침내 순절했다.

장남 종후는 부친과 아우의 죽음도 모른 채 최후까지 싸우다가 혈로를 뚫고 탈출했으나 비보를 접하고 통곡했다. 아비와 아우의 시신을 찾아 숲속 산사에 가매장하였다가 나중에 화순 흑토평으로 장사지냈다. 종후는 상복을 입고 다시 경남 진주로 출전했다.

2차 진주성전투에서 성이 함락되면서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 김천일, 최경회와 함께 북쪽에 재배하고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했다.

고경명의 동생 고경신은 제주에서 군마를 구해오다 풍랑을 만나 죽었다. 고경명의 또 다른 동생 고경형도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했다. 둘째 딸과 조카딸은 정유재란 때 왜군에 맞서 저항하다가 자결했다. 고경명의 집에서 남녀 7명이 순절했다. 함께 제사를 지내주는 봉이와 귀인까지 합하면 9명이다.

수많은 침탈을 당한 조선 역사 어디에도 이런 가문이 없다. 조정에서 고씨 일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충(忠), 3효(孝), 2열(烈), 1절의(節義)로 7명을 정려했다. 1충은 고경명, 3효는 장남 종후, 차남 인후, 손자 부금, 2열은 딸 노상룡의 처와 질부인 거후의 처 광산정씨, 1절은 동생 경형이다.

압촌마을 전경

◆제갈량 '출사표'에도 손색 없어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 포충사를 짓고 봄, 가을에 제사를 모시게 했다. 그가 태어난 마을에는 세금과 잡역을 면제해주는 특전을 베풀어 마을 이름이 복촌(福村)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사당 주벽에 고경명을 배향하고 우측에 고종후·유팽로, 좌측에는 고인후·안영을 배향하여 충절을 기리고 있다.

포충사는 장성의 필암서원과 더불어 훼철되지 않은 광주·전남 2개 서원 중 하나다. 홍살문 옆에는 '충노봉이귀인지비(忠奴鳳伊貴仁之碑)'라고 적힌 빗돌이 서 있다. 고경명의 가노로 금산전투에 참전하여 고경명과 인후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냈고, 이듬해 다시 장남 종후를 따라 진주성 전투에 참가, 왜적과 싸우다가 주인과 함께 순절한 '충노(忠奴) 봉이(鳳伊)와 귀인(貴仁)'을 기리는 비석이다.

명나라 참군 여응종은 조선록에서 '금산 싸움에 아비는 국가를 위해 죽고, 아들은 아비를 위해 죽고, 군사들은 의리를 위해 죽었으니, 이 한 싸움에는 충신, 효자, 열사가 모두 있었다.'라고 기록했다.

3부자가 한 전쟁에서 전사한 예는 세계 전쟁사에 없다고 한다. 고경명의 장녀도 남편이 전사하자 자결했고, 아버지와 형을 따라 전쟁터로 나가려던 15살 막내만이 고경명의 명에 따라 어머니를 모시다가 아버지의 시문과 격문을 간직해 유고문집을 편찬했다. 그가 남긴 문집으로는 시문을 수록한 '제봉집(霽峰集)'과 무등산 기행문을 실은 '유서석록(遊瑞石錄)', 격문과 통문, 기문을 담은 '정기록(正氣錄)' 등이 있다.

그의 '마상격문(馬上檄文)'은 최치원이 쓴 '황소격문(黃巢檄文)'과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와 견주어 손색이 없는 '3대 격문'으로 회자된다. 금산전투는 전주로 진출하는 적에게 타격을 주었으며, 호남을 왜적으로부터 지키는데 큰 몫을 하였다고 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이광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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