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마을의 질서, 나라 기강 바로 세운 자치 규약

입력 2022.09.21. 18:59 이석희 기자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남구⑧] 대촌동 광주향약-공동체 지탱해온 약속
부용정은 고려말 조선초에 활동한 김문발(1359~1418)이 1398년에서 1403년 사이 건립한 것으로 전해오니 600년이 훨씬 넘은 정자이다. 정자이름은 연(蓮)을 꽃 중의 군자라고 칭송하였던 북송(北宋)시대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에 담긴 뜻을 취하여 지었다고 한다. 그림=김집중 작가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남구⑧] 대촌동 광주향약-공동체 지탱해온 약속 

광주시 남구 대촌동(大村洞), 말 그대로 큰 동네이다. 면적(35㎢)이 여의도의 10배를 넘고, 남구의 절반을 차지한다. 북구 석곡동, 광산구 삼도동과 더불어 면적 대비 광주 빅3 중의 하나다. 대촌동은 행정동이다. 동은 행정동과 법정동으로 나뉘는데 법정동은 오랜 역사가 살아있는, 등기부 등의 토지문서에 나오는 이름이고, 행정동은 주민센터 설치 등 행정편의를 위해 묶어놓은 구역이다. 대촌동 안에는 양과동 이장동 원산동 압촌동 지석동 도금동 칠석동 대지동 석정동 화장동 월성동 양촌동 승촌동 구소동 신장동 등 15개의 법정동이 있고 그 속에 크고 작은 자연부락들이 많다. 법정동에 다 동사무소를 둘 수는 없는 일이어서, 이 권역을 하나의 행정동으로 묶고 회재로와 포충로와 고싸움길이 교차하는 지석동 사거리에 대촌동 주민센터를 두고 있다. 회재로를 따라 남으로 조금 내려가면 칠석동이 나오고 죽령산 아래 부용정(芙蓉亭)이 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은행나무 아래, 광주 향약의 시원이며, 고싸움놀이의 발상지이며, 양응정과 고경명의 시가 남아있는, 이 정자에서 대촌의 이야기가 피어난다.

부용정은 여말선초의 무신, 김문발(1358~1418)이 세운 정자다. 『태종실록』 그의 졸기에 따르면 고려 때인 1386년 남원과 보성에서 왜구를 물리쳐 이름을 떨쳤고, 조선 초기 충청도, 전라도 수군도절제사를 지냈다. 1418년에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그 해에 생을 마감했다. 부용(芙蓉)은 연꽃이다. 연은 탁한 진흙 밭 아래 구멍이 송송 뚫린 연근을 내리고, 우아하게 뻗은 연대, 시원스레 펼쳐진 연잎, 둥글게 휘어지는 연자, 청아하고 고고한 연꽃을 피워내니, 자비와 지혜를 뜻하는 불교의 상징이기도 하고, 나타태자의 화신으로 도교의 사랑을 받기도 했으며, 절개를 중시하는 유교의 선비정신과도 잘 어울렸다. 지금은 못이 없지만 당시 정자 앞에 연 방죽이 있었고, 그 이름을 따 편액을 걸었던 듯하다. 언제 지었는지는 기록이 없으되 세월은 500년을 넘었다. 그 앞에 동시대를 살아온 또 하나의 명물 칠석동 은행나무가 있다. 김문발이 심었다는 이 나무는 높이 26m, 둘레 13m에 이르는 거목이다. 죽령산 아래 넓은 들녘에 자리한 칠석동은 풍수지리상 소가 누워 있는 '와우상(臥牛相)' 모습을 하고 있어 그 소의 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고삐에 매어두기 위해 은행나무를 심었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앞 들판의 은행나무를 할머니 당산으로, 뒷산의 노거수를 할아버지 당산으로,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재앙을 물리치고 마을이 평안하기를 비는 당산제가 열린다.

부용정에 눈길이 머무는 것은 광주 향약이 여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정조 때 편찬한 『광주목지』에는 '세종조에 은일로 관이 형조참판에 이르렀으나 젊은 나이에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 부용정을 건립, 고을사람들과 남전지제(藍田之制)와 백록지규(白鹿之規)를 행하여 풍교를 장려하니, 광주의 향약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남전지제는 중국 북송시대 남전현에 살던 도학자 여씨 4형제가 마을 사람들을 교화선도하기 위해 처음 시행한, 훗날 '남전향약'이라고 부르는 향약의 원조다. 그 유명한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 4대 강목의 출처가 여기다. 이 여씨향약(남전지제)을 주희가 본문에 손질을 하고 주석을 붙여 백록동에서 제정한 학규가 백록지규이며, 이를 『주자증손여씨향약』이라 한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는 여말선초 『주자대전(朱子大全)』 등 주자학이 들어오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김덕진 광주교대 교수는 '김문발이 향약을 처음 시행하였다는 뜻이 아니라, 남전지제와 백록지규를 행하여 향약을 시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정도로 이해된다.…김문발은 거주지(칠석동 일원)를 중심으로 그곳 사람들과 함께 남전지제와 백록지규를 행하였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이때 20대로 추정되던 이선제도 와서 강마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선제는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성리학이 더 널리 보급된 때에 '김문발 향약'을 광주 전체를 아우르는 향약으로 발전시켰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태종 때까지 광주지역에 성리학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려는 움직임이 서적 효행 가례 자치조직 등 여러 측면에서 모색되었고, 그 속에서 김문발이 동약의 형태로 향약을 소개했다고 정리 할 수 있다.'고 한국학 호남진흥원이 펴낸 『광주향약』의 해제에서 쓰고 있다. 김문발의 향약이 광주지역 향약의 시원이기는 하나, 중국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소규모로 시행해 본 초기단계 한그루 나무 같은 '부용정 향약'(이종일)이라면, 그 강마 자리에 참석했던 한세대 뒤의 후학 이선제가 시대와 토양에 맞게 계승 발전시켜 널리 숲을 이룬 '광주향약'의 실질적 개창자라는 설명이다.

칠석마을 전경

남광주 사거리에서 서방사거리까지를 '필문대로'라고 하는데, 필문 이선제(1389~1454)를 기리는 길 이름이다. 이선제는 남구 이장동에서 태어나 양촌 권근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1419년 증광시에 급제했다. 세종 원년에 출세하여 단종 2년(1453) 타계까지 30년 이상을 관직에 머무른 관료이며 학자였다. 그는 광주향약을 처음 실시했고, 무진군으로 강등당한 광주를 목으로 승격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그 기념으로 지금의 광주우체국 자리에 희경루(喜慶樓)를 지은 것도 그의 공이 컸다. '함께 기뻐하고 서로 축하'한다는 뜻의 희경루는 전라도 정도(定道) 1000년(2018년) 기념사업으로 광주공원에 복원을 추진해 곧 준공을 앞두고 있다. 허전이 쓴 필문의 행장에는 '선생이 일찍이 현감 안철석과 더불어 상소하여 광주현을 목으로 승격시켰으며, 그 기념으로 희경당을 창립하였다. 문벌이 좋고 문장 학문이 훌륭한 선비 30명을 별도로 선발하여 유적(儒籍)을 만들고 또 여씨향약을 증감하여 조례를 제정 시행하니, 이로써 기강이 서고 풍속이 바르며 사림이 성한, 호남의 훌륭한 고을이 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김문발의 향약은 문건이 없어 실체를 알 수가 없고, 이선제의 광주향약은 『수암지』에 실려 내용이 전한다. 총 3장으로, 1장은 주로 가족과 향촌의 질서유지를 위한 조항들로 이뤄져 있다. 부모에게 불순한 자, 형제끼리 싸우는 자, 가족의 질서를 어지럽힌 자, 고을의 연장자를 능멸한 자 등에 대해서는 가장 엄한 상등의 벌을 규정하고 있다. 2장은 촌민들이 지켜야 할 일반적인 내용이다. 친척과 화목하지 않는 자, 정부인을 박대한 자, 친구끼리 싸우는 자, 염치가 없는 자, 힘을 믿고 약자를 구휼하지 않는 자, 국가의 각종 세금과 역을 행하지 않는 자 등에 대한 내용으로 중등의 벌을 규정한다. 3장은 회의 불참자나 문란한 자에 대한 내용으로 하등의 벌을 규정하고 있다. 부칙을 두어 하급관리들이 향촌 사회에서 백성에게 민폐를 끼치거나 국가의 공금을 탐할 경우 관에 고발하는 등 지방관을 보좌하는 역할도 규정하고 있다.

가족의 질서를 가장 중시했으며, 그 다음이 향촌의 질서이고, 관청의 하급관리가 민폐를 끼치는 행위도 용납하지 않고 있음을 보면 자치규약이면서도 엄정한 구속력이 느껴진다. 이선제 사후 '광주향약'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계승, 발전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15세기 말~16세기 초에 만들어져 100여 년 동안 실시된 '양과동 동약'이 이선제의 광주향약과 대동소이함에 미루어 김문발에서 이선제로, 다시 양과동 동약으로, 광주향약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음을 짐작케 한다.

괘고정수(掛鼓亭樹), 남구 만산마을에 수령 500년이 넘는 왕버들이다. 이선제가 이 나무를 심으면서 '왕버들이 죽으면 가문도 쇠락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후손들은 과거에 급제하면 이 나무에 급제자의 이름과 북(鼓)을 걸고(掛) 잔치를 열었다. 이선제를 시작으로 1세손 이시원, 2세손 이달손, 3세손 이공인, 4세손 이중호, 5세손 이발과 이길이 대를 이어 과거에 합격하여 괘고정수의 북을 울렸다. 그러다가 이발, 이길 형제가 기축옥사 당시 정여립 옥사에 연루되면서 멸문지화를 당하여 이선제의 저술은 모두 소각됐고 왕버들 마저 싹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반세기 후에 두 형제가 무죄로 신원되자 왕버들에 다시 싹이 돋아나고 그 푸르름을 되찾았다는 얘기가 전한다. 이광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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