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후변화엔 면역력이 없다

@박광석 기상청장 입력 2021.09.28. 18:22

항체 생성은 생물의 생존에 있어 필수적이다. 항체란 치명적 바이러스가 체내에 침입했을 때 혈액에서 이를 제거하기 위해 생성한 단백질이다. 이 단백질은 외부 침입자를 분석하고 기억하는데, 그렇게 되면 침입자가 재차 공격을 시도해도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있다. 간단히 '면역력'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기후변화에도 면역력이 존재할까? 안타깝게도 지구는 기후변화에 대한 항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당연히 면역력도 없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이웃나라를 통해, 때론 자체적 경험에 근거해 체득해왔다. 지구촌에서 가장 선진화된 문명을 일궈냈다는 유럽마저도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에 매년 대규모 재산 피해를 반복해 입는 실정이니, 이를 반박할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올여름 기후변화로 인하여 발생한 극한 수준의 이상기상 현상은 선진국, 개발도상국을 가리지 않고 극심한 피해를 입혔다. 지난 7월 중국 정저우의 한 기상관측소는 5일간 강수량이 720㎜를 기록하며 1년 평균 강우량을 훌쩍 뛰어넘었다. 독일과 벨기에, 네덜란드 등 서유럽 국가에서도 두 달 동안 내릴 비의 양이 이틀 만에 몰아 내려 막대한 인명피해와 재산 손실을 피할 길이 없었다.

국내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광주와 전남지역은 지난 7월 장마철에 접어들자 강한 비가 내리며 최다강우량 기록을 새로 갱신한 지역들이 속출했다. 7월 6일 하루 동안만 전남 해남군에는 297.3㎜, 보성군 279.2㎜, 장흥군 211.2㎜, 강진군에 210.9㎜의 비가 내리면서 각각 7월 역대 최다강수량을 기록했다.

상황이 이러니 기후변화 백신이라도 맞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하지만 기후변화의 '가변적 특성' 때문에, 설령 백신이 있다고 해도 항체가 생성될 수 있을진 미지수이다. 기후변화는 국가와 사회시스템이 극한기상에 대한 면역체계를 형성하기도 전에 모습을 바꿔 전혀 다른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떤 해에는 극강의 더위로, 어떤 해에는 최악의 폭우나 산불로 나타나 소중한 목숨과 재산을 앗아간다. 정형화된 패턴과 형태가 없으니 예상 피해지역과 규모를 미리 가늠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백신마저 무용지물로 만드는 변이 바이러스의 개념에 대입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래도 하나 다행인 점은, 매번 모습을 바꾸는 이러한 기후변화의 '척도'를 가늠할 수 있는 나름의 지표는 마련돼 있다는 사실이다. 기상청은 전국의 시·군·구 대부분의 지역에 기상관측 장비를 설치하고 기온, 강수량, 바람의 세기 등 다양한 기상요소를 측정하고 있다. 이렇게 관측한 자료는 그 지역 기상관측의 기록이 되고, 기상요소별로 '최고' 혹은 '최저' 등과 같은 수식어를 앞에 달며 과거의 기록들과 비교 대상이 된다. 높고 낮은 순위를 결정함으로써, 과거로부터 기후가 변화한 정도를 보는 것이다.

광주·전남지역을 포함해 최근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여름철 이상기후 현상을 되돌아보자. 2018년 최악의 폭염, 2019년 한반도에 영향을 준 7개의 최다 태풍, 2020년 관측 이래 최장기간 장마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다. 통계자료도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최근 10년(2010~2019) 동안 자연재해 원인인 호우나 태풍, 강풍 등으로 인해서 전국에서 발생한 피해의 크기를 보면, 태풍이 전체 피해액의 54%로 가장 크고, 다음은 호우로 35%에 해당한다. 이렇게 여름철 위험기상 요소들은 기후변화의 가장 극명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두 해가 되도록 인류를 괴롭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기후변화의 모습을 포개어 겹쳐본다.

기후변화란 비슷하게 소리도, 냄새도 없이 침입해 극한기상이란 증상을 발현시키는 지구의 바이러스가 아닐까. 하지만 분명한 건 치료가 불가한 존재는 아니란 것이다.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과 같은 국제공조, 극한 기상에 대비한 선제적 대응책 마련, 기후변화 개념에 대한 정확한 인식 제고와 시민 참여라는 삼박자가 잘 맞물려 돌아간다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기후변화엔 면역력이 없다. 오직 끊임없는 노력과 적응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잊지 말자, 인류는 이미 '현명함'이란 만능 항체를 지니고 있음을. 박광석 기상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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